이번엔 약간 골치아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링'이후 오랜만에 센셔이셔널하게 창조적인 호러

영화로 인정을 받았던 '주온'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원래 비디오 용으로 제작된 저예산

호러 영화인데, 인기를 끌자 당연한 수순대로 극장용으로도 제작되어 우리나라에도 개봉되었다.

사실 일본 영화가 흥행하기 쉽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해보면, 이 영화는 열광적인 반응도

없고 비난어린 여론도 없었던 평범한 영화치고는 제법 관객을 모은, '성공한'호러영화였다. 그런데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극장용 주온이 아니라 비디오판 주온에 대해서인데, 사실 극장용 주온은

센세이셔널이니 창조적이니 하는 평가가 민망할 정도로 무난한 호러영화였기에 나는 이 영화에

아무런 애정도 가질수 없었다. 사실 실망만 했을 뿐이다. 날때부터 운명과도 같은 이끌림으로 호러

영화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나로서는 '주온'의 섬뜩한 영화 포스터에 꽤나 강렬한 자극을

받았고, 짧은 포상휴가 기간동안 무리해서 시간을 내어 이 영화를 극장에 보러갔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결과는 대실망이었고, 사실 링의 '사다코' 이후 재기넘치는 아가씨 귀신들의

등장을 더이상 기대할 수없었던 동양 호러영화는 이대로 몰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감에

골치가 아프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구해서 보게된 주온의 오리지널 비디오판은 나의

이런 우려감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이 영화는 정말로 놀라운 영화였는데, 사실 어떤 부분에서

인상적인 자극을 받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때문에 최초에 이 이야기를 '골치아픈 이야기'

라고 말한 것이다. 자, 이제 내가 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다지도 골치를 썩고 있는지에 대하여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극장판 주온에서 가장 유명했던... '무릎위에 손 얹고 손가락 꼼지락'거리는 토시오 포즈가

유행하게 된 바로 그 장면.)

 

'링'의 사다코가 연출한 TV씬은 호러영화사에 길이남을 명장면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이쪽 업계(?)

에 꽤나 센셔이셔널한 파장을 일으킨건 그 감동적인 연출때문이 아니라 바이러스라는 특별한

매개체를 이용한 살인술을 실용화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원래 동양권에서 세력화된 처녀귀신들은

완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어서, 서양의 프레디나 제이슨, 심지어 위대한 핀헤드가 자유자재로

목공용, 도살용 연장들을 휘둘러 효율적인 살인행각, 또는 대규모 학살파티를 벌인 것과 같이

압도적인 피의 향연을 보여주기에 그녀들의 역량은 아무래도 딸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신출귀몰

하게 여기저기서 난데없이 얼굴을 들이밀거나, 붕붕 날아다니거나 깔깔깔 웃거나 하는것 외에는

이렇다할 재주가 없었던 그녀들은 살인은 커녕 상대를 노이로제에 걸리게 만드는 것밖에는

자신있게 해낼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링'의 사다코는 바이러스라는 아주 효율적인 매개체를

이용해 쓸데없는 노력을 들이지 않고 사람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기발한 발상을 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러한 방식에도 문제는 있다. 서양의 용맹한 살인마들이 주로 사용하는 벌목도나

전기톱, 쇠갈고리 등과 같은 흉기는 사실 살인 그자체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켜주는 쪽과는 거리가

먼 흉기들이다. 사용하기도 어렵고, 전기톱 같은 경우는 여차하면 사용하는 본인이 험한 꼴을

당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이들이 살인을 저지르는데 이런 비효율적인 흉기를 선택한것에는

분명 납득할만한 근거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 의의 자체가 영상과 소리를 이용하여 요란스런

작태-거의 퍼포먼스에 가까운-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심리적 부담감을 가중시키는데 있기

때문이다. 링의 사다코가 VTR의 저주를 통한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효과적인 살인술을 습득하고도

굳이 힘들게 우물을 기어올라와 TV에서 튀어나오는 수고스러운 퍼포먼스를 감행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즉, 단순히 죽이기만 해서는 호러캐릭터로서 재대로된

역할을 다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의 바이러스 살인술은 참신한 것이기는 했지만

뭔가 번지수를 잘못찾은 참신함에 불과했던 셈이다. TV에서 기어나오는 퍼포먼스도 그 자체로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지만, 그녀의 이런 속사정을 고려해본다면 결국 어쩔수없는 미봉책이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못할 듯하다.

 

하지만 주온의 사에키 가야코는 달랐다. 그녀는 세상에 가공할만한 원한을 품고 있었고, 사다코

처럼 일주일 정도의 유예기간을 줄 정도로 느긋한 성격도 못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한명도 예외없이 죽이고 싶어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동양의 여자 귀신들이 스스로를

제한시켰던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가야코의 노력이 부각된다. 여자는 살아있든 죽어있든

완력으로 남성을 당할 수가 없다는게 귀신 업계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성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더라도 가능한 수준까지 힘을 길러두면

어떤식으로든 도움은 될수 있으리라는 것이 가야코의 생각이었다. '주온'이라는 영화에서 첫번째

희생자가 되는 가정교사는 다락방으로 끌어 올려져 살해당한다. 당시 가야코의 습격 자세로 고려

해보면, 그녀는 '엎드린 자세로 말만한 처녀를 손으로 들어올릴 정도의 완력'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자, 여기가 중요한 대목이다. 그녀는 보통의 여성 귀신들이 깜짝 놀래키는 연출로 상대의

심장을 멈추게 하거나, 사다코처럼 오컬트적인 저주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찌질스러움으로

간주했다. 그런 식으로는 도저히 자신이 세상에 품은 원한을 해소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그녀의 첫번째 살인의 정황으로 유추해보면 그녀는 분명 '엎드린 자세로 말만한

처녀를 손으로 들어올릴 완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녀가 죽을 당시 그녀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특별한 운동같을 것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즉, 그녀는 죽은뒤, 망령으로 각성하여 그런 힘을

얻게 된 것인데, 그 과정은 명확하지 않지만-다락방에서 죽어라 푸샵을 했든 근육 호르몬 주사를

맞았든-어쨌든 실제 여성이 운동으로 도달할 수 있는 꽤 높은 완력의 경지에 그녀는 충분히

도달해 있었으며, 그것을 살인에 유용하게 이용할수 있음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녀는

살인에 심리적이고 신비적인 수단이 아닌 직접적인 물리력을 이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작은

혁명이고, 동양권 여성 귀신들이 대량 학살에 취약하다는 학계(?)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아~ 짜증나 그냥 다 죽일래...)

 

아아..이런 문제들로 심각하게 고민하자니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는데, 이미 시작해버린거

도중에 멈출 수도 없다. 쩝.. 이 영화의 제목 '주온'에서 '주'는 '저주'를 의미한다. 저주는 보통

오컬트적인 신비영역에 접근해 있으며, 단적인 예로 사다코가 사용한 비디오를 보는 사람이

바이러스에 걸리게 만드는 술법도 저주를 통한 것이다. 하지만 주온에서 가야코가 사용한

저주의 개념은 신비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범위로 넘어와 있다. 즉, 그녀가 자신의

집에 들어온 사람을 보고 '너를 죽이겠다'라고 결심을 하게 되는 행위 자체가 '주온'에서

말하는 저주의 개념인 것이다. 어떤 신비적인 수단도 없이 너무도 직접적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하는 것 뿐이다. 이 부분만 비교해봐도 이미 사에키 가야코는 오컬트적인 찌질스러움의

단계를 완벽히 극복하고 살인귀신으로서 자질을 갖추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과 관련된 또하나의 골치아픈 문제점은 가야코의 아들 토시오와

관련되어 있다. 토시오는 사에키 다케오가 의처증때문에 아내 가야코와 그녀의 고양이를 무참하게

살해할 당시에, 다행히도 목숨을 건졌었다.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오의 담임 선생인

고바야시가 사에키 일가의 집에 방문했을때, 처음 창문으로 보여진 토시오의 얼굴은 창백하긴

했지만 분명 사람같은 혈색이 돌고 있었고, 나름대로 말귀도 알아듣는 정상적인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고바야시가 사에키 일가의 집으로 들어서고, 일련의 수상한 행동들을 시작했을

때부터 급속도로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하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추측해보면 '고바야시의

방문'은 최초 저주의 시작을 알리는 시발점이 된 사건이었음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즉, 사건의

모든 원흉이라고 할수있는 고바야시가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다락방에 널부러져 있던 시체상태의

가야코는 망령으로 각성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야코와 함께 죽어있던 고양이의

망령은 토시오의 몸으로 들어간다. '인간+인간이 아닌 어떤 것'의 조합은 사실 히어로물에나 나옴

직한 발상이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토시오는 고양이 소년이 되고 만다. 제작비 탓인지 그가 고양이

에서 인간으로, 또는 그 반대로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모습이 실제로 나온 적은 한번도 없지만, 그가

고양이로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 추정해낼 수 있다. '극장판 주온'

에서 여주인공의 다리를 스치는 고양이의 꼬리가 나오고, 여주인공이 테이블 밑으로 자신의 다리를

스친 것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숙였을때 토시오가 있었다는 점이 이점을 명확히 증명해

준다. 하지만 진짜 골치아픈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그가 인간의 모습일때 고양이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하는 여부가 바로 이 문제의 핵심이다. 예를들어 인간 모습을 한 채로 고양이

의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을 사용할수 있는냐 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꽤나 중요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이문제의 해답이 주온의 비디오 판에 나온 구리야마 치아키와 턱 없는 소녀의 살인

정황을 명확히 설명할 중요한 단서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토시오에게 희생된 구리야마 치아키)

 

(주온 시리즈 최고의 카리스마 턱없는 소녀. 토시오가 고양이 이빨로 물어뜯은 듯하다)

 

'구리야마 치아키 살인'에 대해 따로 한문단을 마련하겠다. 앞서 언급했지만 가야코는 살인을

저지를때 주로 직접적인 물리력을 사용하는데, 아직 어린 토시오에게도 가야코와 같은 살인 역량이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런 꼬마가 운동을 해봤자 '엎드린채로 말만한 처녀를 손으로 들어올리는'

가야코의 완력과 필적한 힘을 가질 수는 없다. 그리고 작은 몸집은 전투에 불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학교까지 원정을 가서 용기있게 구리야마 치아키의 휴대폰에 '444444444444'라는

도발적인 문자를 전송하고 그녀를 해치울 계획을 세운다. 생각할수록 두드러지는 점인데, 구리야마

치아키는 여고생이긴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배틀로얄'에서 그녀는

자기를 범하려고 한 남학생에게 '너의 모든것을 부정해 주겠다'라는 사이토 하지메식 도발을

한뒤 나이프로 그 남학생을 순식간에 고자, 아니 망자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그 직후 시바사키

코우가 쏜 총에 맞아 비명횡사 했지만, 재대로 붙었으면 낫잡이 시바사키 코우도 결코 쉽게

그녀를 이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에서 그녀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

으로 무식한 쇠구슬을 사슬에 매달아 사용하는데, 전투에 능한 우마 서먼과의 정면 승부에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 뛰어난 전투 실력을 뽐내기까지 한다. 물론 구리야마 치아키가 '주온'에서까지

그런 재주를 고스란히 간직한채 출연하지는 않았겠지만, 단순히 '기가센 여고생'정도로만 생각해도

아직 어린 토시오에겐 벅찬 상대였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토시오는 그녀를 제압하고 거의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피떡을 만들어 버리는데, 여기서 그가 과연 어떤 재주로 이런 일을 저지를수

있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그 의문을 해결하는 열쇠는 앞서 언급한 '고양이 인간'의

능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그가 스파이더맨처럼 인간의 모습을 한채로 고양이의 능력을

사용했다면, 구리야마 치아키가 배틀로얄에서와 같은 용맹을 발휘했더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지 않았겠나하는 것이 나의 핵심적인 주장인 것이다.(물론 이 문제는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을 것 같다. 구리야카 치아키가 의외로 심장이 약해서 토시오가 고양이 변신하는 기묘한

재주 정도를 보고 단번에 심장이 터져버려 죽었을 수도 있으니까. 죽은뒤 시체를 훼손하는 일

정도야 생선뼈 정도는 쉽게 씹어 삼키는 고양이한테는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고.)

(배틀로얄에서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던 구리야마 치아키도...)

 

(토시오에게 당해 피떡이 되고 만다.)

 

자, '엎드린 자세로 말만한 처녀를 손으로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센 가야코와, 고양이 인간이라는

히어로적 능력을 갖춘 토시오. 이 콤비라면 분명 서양의 압도적인 살인 괴물 호러 캐릭터들과

나란히 서도 손색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실제로 그들은 제이슨, 프레디에 필적할 정도로 꽤많은

살인을 저질렀고, 구체적인 살인행각 역시 동양권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잔혹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저 공중을 붕붕 날아다니거나 깔깔깔 거리기나 할줄 알고 상대를 놀래켜

잘되야 심장마비, 못되면 기절시키는 수준밖에 할수없는 나약한 여성 귀신들에게 가야코의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좋은 귀감이 될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강조하지만, 스스로를 제한시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요즘은 인터넷 상의 검열없는

영상으로 왠만한 충격으로는 눈하나 깜짝않는 강심장들이 많아져서, 구시대적 놀래키기 외에는

별다른 재주도 없는 우리나라 처녀귀신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모처럼

귀신이랍시고 호러영화에 출연했으면 좀 놀랄만한 살인이라든지 그런 정도는 보여줘야 이름값

하는것 아니겠는가? 놀래켜서 죽지 않는다면 하다못해 물어뜯기라도 해보라.(요런 종류의 단순한

아이디어로도 뭔가 획기적인 공포 코드를 만들어낼수도 있을텐데..)

 

우리나라 귀신들도 가야코처럼 참신한 발상으로 꿈에 그리던 '대량학살'을 해낼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찌질거릴거면 아예 호러영화에 나오지 마.. 이 언니처럼 확실히 뭔가를 보여주라구..)

 

*출처 http://blog.naver.com/junu2314/40021289756

 

재밌어서 퍼옴. 문제 있을시 자삭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