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이냐 '혁명'이냐를 찾아봤는데 제가 볼 수 있는 인터넷에서는 답이 안나오는군요.


논문에서도 3.1운동에 대해 많이 다루긴 하는데 그 이름에 대한 고찰은 찾기가 힘드네요.


아물론 구글,블로그,나무위키 등등 사이트는 아예 검색대상에서 제외했음.


아무튼 그걸 알아보려면 책이나 잡지를 찾아봐야할 느낌이군요. 귀차니즘으로 패스



근데 그렇게  찾다가 논문을 하나 보았습니다. 그 논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드림.


논문은 저작권을 비롯한 여러 골치아픈 문제가 있어서 그 자체는 못 퍼옴.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3.1운동은 민족사상 최대의 항일 운동중 하나입니다.(사실 원탑이라 봐도 무방하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3.1운동의 참여한 인물들 이름을 몇이나 아시나요?


왠만한 역덕이 아니면 딱 한분만 알겁니다.

 

유관순 열사지요.

 

그러나 유관순 열사는 3.1운동 전체를 주도한 분이 아니에요.


이화학당과 그 도시의 수천명의 대표자라고 할 수는 있지만 서울,평양을 비롯한


전국에서의 모든 3.1운동을 주도한건 아니죠.


그런데 왜 우리는 3.1운동하면 유관순 열사의 이름만을 기억할까요?


그걸 이 논문에서 완전한 정답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가설'을 소개합니다.





논문의 이름은


                      정상우, 3.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      


입니다.(양식 이렇게 쓰는거 아닌데 귀차니즘 2)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음.



1. 3.1운동에 참여했단건 해방이후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2. 유관순 열사는 일제 강점기에는 그 자료를 찾기가 힘들다.


3. 해방 이후 친일파들은 자신의 친일행위를 감출필요를 느꼈다. 


4. 그걸 위해 유관순 열사와 같은 '이화'에 다닌 것과 같은 옥중에 갇힌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친일 이미지를 지우려했다.(예시  : 영화에서 자신에게 민족정신을 배운 유관순 열사의 모습을 비춤)


5. 감옥에서 고문당해 죽은 어린 소녀라는 이미지는 '애국심'을 당시 청년들에게 심어줄 좋은 도구라,

  

    당시 정권의 뜻과도 통했다.


6. 유관순을 중심인물로한 영화와 소설등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여기에는 그 친일파들과 이승만이 등장해

   

   '스승'과 '선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암시하며 보여준다.


7. 시간이 흐르자 교과서에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8. 이는 박정희 정권에서도 마찬가지로 활용된다.(사실 박정희 정권은 세종과 이순신을 부각시킨 때이기도함.)


9. 즉 유관순이란 이름이 해방이후 갑자기 부각된건 친일파들과 당시 정권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해보면 유관이란  이름은 1945년까지는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독립운동가라 그렇냐구요?


같은 여성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는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정도 근거로 해방이후 친일파들이 유관순을 이용했다는 증거를 삼기에는 아직 터무니 없이 부족한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게 어느 정도 맞다면 우리는 '역사'라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봐야겠지요. ㅎㅎ





ps. 그리고 혹시 오해를 하실까봐 덧붙이면


유관순 열사는 분명히 존재 했고, 우리가 아는 내용으로 만세를 외치고 돌아가신건 사실입니다.


따라서 위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 해도, 유관순 열사의 업적은 절대 그 빛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ps2 혹시 문제가 되는부분이 잇으면 자삭할테니 지적좀 부탁 능력자 오이갤러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