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같은 깡패들이 설치고, 먹고 살기 위해

자전거를 훔쳐야 할만큼 그런 것에 대해 옳고 그름조차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교육이랄 게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분들이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광복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까지 터져버렸으니

그시대에 태어난 분들 중에 한글이라도 배운 분들이 있다면

정말 운이 좋은 분들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물며 요즘 세상에도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있는데

그게 먹고 살기 힘든 전쟁직후라면

자식을 버리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요즘 세상에 놀이방에서 보육교사에게 학대를 받아

그런 놀이방에 맡겨진 아이들이

멍이 든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듯이

제 몸에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시절에 생긴 흉터가 몇 개 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학대인지

아니면 할머니가 재혼을 해서 나은 딸이 어린 저를 돌보면서

그딸이라는 사람도 배운 게 없어 그냥 미워서 저를 괴롭힌 것인지

어머니도 돌아가신 마당에 제가 물어볼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제가 굶어죽지 않고 또 누군가의 고의든 아니든

사고로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뿐입니다.

쌍둥이인 제가 태어나자 먹고 살기도 힘든데

쌍둥이를 낳았다며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구박을 받았다더군요.

무엇보다, 먹고 살기 힘들어 이미, 갓난아이였던 저의 쌍둥이동생은

양자로 친척집에 보내진 후였고 몇 년 뒤 저 역시도 외가댁에 양자로 보냈다가

제가 그분들을 엄마나 아빠가 아닌 외숙모와 외삼촌으로 부른다며

남들 보기가 창피해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진 상황에서

뇌성마비장애를 가지고 있던 형과 저를 초가집에 재워놓고

그런 초가집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놓고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

촛불이 쓰러져 집에 불이 났는데 다행히 잠에서 깨어 

제가 형의 팔을 잡아끌며 형을 구하려다가

문턱이 높아서 힘에 부쳐 형을 구하지 못하고

저만 불길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어머니에게 듣게 되었으며 저 역시도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제가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는데 

장애가 있는 자식과 어린 저를 집에 남겨 두고

어떻게 부모님이 모두 집을 비울 수가 있는 것인지

게다가 촛불을 왜 켜놓고 나갔을까요?

이것이 고의로 화재를 의도한 것은 아닐까요?

장애가 있는 자식을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또 한 번 양자로 팔려갔다가 약속을 깨고

깽판을 치듯 부모님이 억지로 되찾아온 상황이었습니다.

못 배운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범죄를 충분히 저지를 수 있다고 봅니다.

이상한 일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심해서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저는 아버지와 여기저기 떠돌며 생활을 했는데

아버지가 술에 취해 경운기를 몰다가 전복사고가 일어났고

경운기에 깔린 아버지는 일을 못할 정도로 아마 심하게 다쳤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도 술을 자주 드시던 상황에서 일을 못하게 되었으니

하는 일이라고는 술을 마시는 것 밖에 없었을테고

그렇게 어머니를 찾아가라며 저를 쫓아낼 만큼

제가 아버지에게는 짐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 번은 산골에서 살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도시에 사는 할머니댁에 다녀온다며

겨울에 난방도 안되는 외딴 집에 저를 홀로 남겨둔 채 집을 나가셨습니다.

무서우리 만큼 고요한 곳에서 스산하게 부는 바람소리와

한밤중에 산짐승이 눈 쌓인 집주변을 오가는 듯한 발자욱소리를 들으며

밤새도록 추위는 물론 배고품과 두려움을 견디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떻게 잠이 든 것 같은데

아침에 잠에서 깨니 며칠을 굶었는지

배가 고파 기운이 없어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며칠을 굶다가 반찬도 없이 맨밥에 물을 말아먹다가 토하기도 하고

아버지는 남의 닭을 훔쳐다가 아궁이에 집어넣고 구워먹기도 할 만큼

오죽하면 남의 닭을 훔쳐다가 아궁이 안에, 털도 뽑지 않고

살아있는 닭을 집어넣어 구워먹었겠습니까마는

그렇게 굶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었겠지만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굶어죽을 수도 있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집 앞에 있는 개울에 가서

얼음을 깨고 쌀을 씻어 처음으로 낡은 전기밥솥에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한글이 익숙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였고

밥을 지을 때 물높이를 손등에 맞추면 된다는 것을

아버지가 밥을 지을 때 제가 어깨너머로 보았던 것인지

제가 거기서 굶어죽을 팔자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인지

다음날 돌아온 아버지와 그후로 머리에 이가 생길 만큼

신문지와 박스를 덮고 자며 노숙자처럼

거리를 떠돌게 되었고 그러던 어느 날 고모집에 갔더니

고모가 참빗으로 이를 잡아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고모들도 어렵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런 조카를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방치할만큼

조카에 대한 애정이랄 게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할머니라는 분이 따듯하게 저의 손을 잡아준다거나

할머니품에 안겨본 적이 있는지 

제 기억에는 그런 추억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면 그것이 부모님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제가 지금처럼 저에게 많은 마음의 상처가 생기지는 않았을텐데,

그리고 이렇듯 오랜 시간을 방황하다가

아직도 그방황 속에서 이런 원망 섞인 글을 적지는 않았을텐데

저의 삶은 비참했고 참담했으며 그저, 그런 시간들을 견딜 수 밖에 없었고

마치 겨울에 개구리가 차가운 땅 속에서 따듯한 봄을 기다리듯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견뎌내야 할지 모릅니다, 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

저는 이재명대통령이 대한민국에 그런 봄을 가져다줄 것이며

우리나라를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