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게임'. 사실 난 고전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고 묻는다면, 재미가 없다. 물론 옛날에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플레이하는 고전 게임은, 절대 그 당시만큼의 재미를 주지 않았다. '추억보정'으로 치장한 게임의 이미지가 깨져나가는 것은 순간이었다.

'클래식 게임에 대한 회상 : 어드벤처 편'을 내가 듣는 것으로 결정되었을 때, 조금의 불안감이 싹튼 것도 그 이유였다. 고전 게임이라니! 게다가 어드벤처라니!... 머릿속에 그려졌다. '원숭이 섬의 비밀'이나 '그림 판당고' 정도의 게임이 생각났다. 클래식 어드벤처 게임이라면 생각나는 게 그 정도밖에 없었다.

하지만 강연장에 들어와, 강사의 소개를 들었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어드벤처 '장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드벤처'는 게임 이름 그 자체였다. 세상에... 게임 이름이 어드벤처라니, 이 정도면 클래식 정도가 아니라 고대 게임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근데 그게 또 맞았다. '어드벤쳐'라는 이름의 그 게임의 발매 연도는 1970년대 후반. 나보다 무려 10살이 많다. 플랫폼은 '아타리 2600'. 그 유명한 '아타리 쇼크'가 터지기 전, 북미 게임시장을 지배했던 전설의 레전드 콘솔이다.

▲ 워렌 로비넷


강연자인 워렌 로비넷은 당시 20대의 게임 개발자로, 아타리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였다. 지금의 개발자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말도 안되는 상황으로 인해 개발에 문제가 오던 시절, 게임업계 최고의 흑역사 중 하나인 '아타리 쇼크'가 터지기 직전의 게임 개발 환경에 대한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될 이야기는, 게임업계를 인류에 대입해 보았을 때 바벨탑의 벽돌을 쌓던 끝내주는 건축가의 이야기라 해도 될 것 같다. 남들과는 다른 벽돌을 만들기 위해 색다른 시도를 가한, 조금은 특이한 건축가 말이다.


1978년 서니베일, 켈리포니아. - 게임 디자인의 석기시대.

그의 나이 26세. 그는 막 하나의 게임을 개발한 상황이었다. '슬롯 레이스'. 점 네 개를 찍어 만든 자동차가 점 하나를 찍어 만든 미사일을 날려 상대 차를 맞추면 점수가 올라가는 게임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 게임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당시 아타리 2600의 게임들은 어떤 게임이든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고, 코딩해야 하며, 그래픽을 만들고, 효과음을 집어넣어야 한다. 그리고 나면, 애들에게 게임을 시킨다. 개발자가 만족할 때까지.

그렇기에 워렌도 스스로 아이디어를 짜낼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게도 당시 그는 오로지 글로만 이어진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을 해볼 수 있었고,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그 컨셉을 가져다가 비디오 게임으로 만들기로 말이다. 당시 텍스트 어드벤처는 글을 읽고, 커맨드를 입력해 다음 장으로 나아가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그는 방, 장애물, 물건, 몬스터 등을 포함한 아타리 2600용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텍스트 어드벤처와 비슷한 느낌으로 말이다.

문제는 당시 최신 게임기라고 나온 '아타리 2600'이 총체적 난국의 하드웨어였다는 점이다.




1. 작다 : 롬 메모리가 4096바이트, 즉 4킬로 바이트에 불과했다.

2. 그것만 작은게 아니다 : 램 메모리는 128바이트였다.

3. 약했다 : 프로세서는 8-비트였다.

4. 느렸다 : 클록 스피드가 고작 1.2MHz였다.

5. 구리다 : 2D 그래픽이다.




그런데 텍스트 어드벤처는 무려 100킬로 바이트의 용량을 요구했다. 아타리 2600은 4킬로 바이트 뿐이다. 당연히 그의 상사는 "말도 안되는 일이니 그만 둬라."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할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게 되었다.

일단 게임 제작이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프로토타입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한 달간 노력해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냈고, 게임 컨셉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작은 메모리 안에 모두 집어넣을 방법을 구상해냈다.



게임은 최대한 간편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단색의 벽을 만들어 방의 용량을 줄였고, 이동이 가능한 물체들, 즉 오브젝트는 하드웨어 스프라이트를 뿌려 그럭저럭 모양을 잡아 주었다. 나를 나타내는 아바타는 더 작았다. 이번엔 그냥 하나의 점을 박아버렸다. 모양은 시원치 않았지만, 알아보기는 쉬웠다.

작업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조작은 아타리 2600의 컨트롤러인 버튼 하나 달린 조이스틱으로 이뤄졌고, 방과 방 사이는 그냥 경계로 넘어가면 알아서 넘어가게 만들었다. 미로와 같은 장애물을 통해 게임에 제한을 걸었고, 텍스트 어드벤처에서 존재하는 '인벤토리'의 개념은 과감히 삭제했다. 물건은 그냥 가까이면 가면 잡힌다. 내려놓으려면 조이스틱에 존재하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해결된다.



탄력이 붙고 나자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는 점점 가지를 치듯 늘어났다. 미로와 같은 벽, 잠긴 문, 그리고 플레이어를 잡아먹는 용도 집어넣었고, 이 장애물을 통과하기 위한 열쇠와 칼 등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해서 '성배'를 얻게 되면 마무리되는 아타리 최초의 '어드벤쳐' 게임이 짜였다. 아니, 아타리 최초가 아닌, 세계 최초였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당시 아타리는 법률상으로 게임에 개발자의 이름을 포함하지 못하게 했다. 아타리 소속의 개발자가 만든 모든 게임은, 아타리의 이름을 달고 출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워렌은, 정말 도달하기 힘든 '숨겨진 방'을 만들고 그 방 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두었다. 그리고는 수십만 장의 카트리지가 제작되어 확실히 실려 나갈 때까지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또 하나의 세계 최초가 만들어졌다. 바로 '이스터 에그'다.



4k의 한계, 데이터를 완벽히 계획하라.

디자인은 끝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숙제는 있었다. 바로 4,096바이트라는 좁디좁은 롬 카트리지 안에, 어떻게 저 모든 정보를 집어넣는가였다. 워렌은 침착하게 처음부터 생각했다. 최대한 저장 용량에 대한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데이터의 구조'를 짜고, 이를 통해 최대한 효율적인 코딩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외엔 다른 방법도 없었다.)

그는 먼저, 게임의 주 무대가 되는 '방'의 정보를 정의했다. 방의 위상, 그래픽, 벽의 색깔 등 각각의 방은 21바이트의 용량을 사용했고, 방을 연결하는데 9바이트의 용량을 배분했다. 이어 '오브젝트'에 대해서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방의 번호와 x, y좌표, 물건의 상태, 그리고 오브젝트의 모습까지 모든 면에서 쓸모없는 데이터 사용을 배제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네 종류의 '크리쳐'의 행동 양식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욕심과 공포의 개념을 도입했다. 가령 노란 용을 예로 들면, 칼과 노란 열쇠를 볼 때 이 용은 공포감을 느끼고, 플레이어의 아바타와 성배를 보면 욕심을 가진다. 각각의 크리쳐는 방에 어떤 물건이 들어오는가에 따라 그것을 추적하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게 되고 이것을 추적-도주 표로 만들어 정리했다.

또한, 상태도 설정해야 했다. 용이라고 그저 도주하고 쫓아오는 것은 아니다. 용은 물기도 하고, 사람을 삼키기도 하며, 칼에 맞으면 죽는다. 그 각각의 상태를 설정하고, 알맞은 그래픽을 부여하며 동시에 그 상태에 이르게 되는 트리거. 즉 열쇠까지 만들어내며 워렌의 작업은 슬슬 종장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그는 게임이 예측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재미가 뚝 떨어진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래서 '박쥐'라는 새로운 크리쳐를 도입했고 이 박쥐는 사람의 손에 들린 아이템을 뺏거나, 자기 마음대로 아이템을 옮기는 등 게임 내에서 중요한 변수(Chaos Factor)로 작용했다. 그렇게 그의 게임은 실질적으로 완성의 단계를 밟았다.


개발자들이 천대받던 시절, 아타리의 정책적 문제

숨 가쁘게 개발 과정을 이야기한 워렌은 잠시 목을 축인 후, 당시 '아타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퐁'을 이용해 아케이드 비즈니스의 기반을 다진 '놀런 부슈널'이 아타리를 만든 이후, 아타리는 급속도로 게임 시장을 장악했다. 당시 아타리에 입사하거나 협력 관계를 맺은 젊은 인재들의 수는 굉장히 많았고, 그중에는 '애플'을 만든 스티브 잡스도 있었다.

하지만 '워너 브라더스'에게 매각된 아타리는 점점 이상한 길로 걸어가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경영진이 게임을 모른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두 번째 문제는 개발자들에 대한 처우가 굉장히 형편없었다는 것이었다. 그간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개발하던 개발자들은 빡빡해진 회사의 분위기에 적응을 못 했고, 게임을 전혀 모르는 경영진과 개발진의 마찰은 심화되었다. 결국, 당시 수많은 개발자가 아타리에서 나오게 되었고, 그 중에는 '액티비전'을 설립한 '엘런 밀러'도 있었다.

워렌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일단 제 상사는 저에게 이 게임을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는 저에게 '슈퍼맨'을 소재로 한 게임을 만들라고 말했죠. 하지만 어차피 그 일은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해버릴 일에 불과했어요. 그래서 전 몰래 어드벤처를 작업하는 데 열중했죠. 게다가 아타리는 게임에 개발자가 이름을 넣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게임 속 깊숙한 곳에 제 이름을 숨겨두었고, 이것은 최초의 이스터 에그가 되었습니다."

워렌의 게임은 성공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액션 어드벤처 게임을 만들어냈고, 훗날 젤다의 전설과 같은 게임들이 채택한 탑뷰 방식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더불어 그의 '아타리 2000 어드벤처'는 약 1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물론 그와 별도로, 그에게 로열티는 단 한푼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가 기획하고, 코딩하고, 그래픽을 짜 만든 게임이 100만 장이나 팔려나갈 동안, 그는 2만 2천 달러의 연봉만 받을 뿐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타리는 '아타리 쇼크'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게 워렌 로비넷의 강연은 마무리되었다.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랄까? 게임계 최고의 흑역사 중 하나를 남기기는 했지만, '아타리 시대'는 게임업계가 첫 번째로 맞이한 일종의 '황금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게임시장의 규모는 굉장히 거대한 수준이었고, 구매하는 데만 1주일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다양한 게임 콘솔들이 시장을 장식했다.

단지 그 당시의 프로그래머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조차 신기했다. 그리고 이어진 강연. '하드웨어의 한계', 지금 생각하면 진짜 '참혹하다'싶을 정도의 콘솔에서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그의 경험과 과정. 마지막으로 '아타리'라는 바벨탑이 흔들리게 된 과정까지, 1시간 동안 진행된 그의 강연은 마치 1선에서 직접 전투를 겪은 군인에게 듣는 생생한 전쟁 수기와도 같았다.

뜨겁게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뒤로하고,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개발자와 개발사, 그리고 퍼블리셔. 현재의 게임시장은 당시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지금도, 외적 압박에 의해 진짜 만들고 싶은 게임, 열정을 바칠 수 있는 게임을 제작하지 못하고 미완성의 제품을 내놓는 경우를 나는 자주 보아왔다. 언제나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게임산업이 그때보다 성숙한 것은 그래도 개발자들이 게임에 이름을 넣을 수 있고, 더 다양한 방향에서 그들의 처우가 개선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산업의 발달은 따로 생각할 주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게임 산업의 진짜 발전은, 더욱 큰 자금 규모와 시장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개발자들이 그들의 무한한 창의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을 때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강연장을 벗어나 다음 장소로 향하는 길, 센터 한 켠에 설치된 클래식 게임 시연대에서 '아타리 2600 어드벤처'를 발견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저런 것도 있구나'하고 지나쳤을 시연대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방금 보았던 워렌 로비넷의 젊은 사진이 환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