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정노철 감독이 ROX 타이거즈의 지휘봉을 잡았을 때,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개인적으로 있었다. 단 한 차례의 경기도 치르지 않았지만 정노철 감독이라면 뭔가 해낼 것 같았다. 선수 생활을 하던 당시에도 동료 선수들에게 지략가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고, 은퇴 이후 이따금 운영하던 개인 블로그에서 경기 요점을 정확히 집어내는 분석력을 보고 감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노철 감독이 이끄는 ROX 타이거즈가 잘할 줄 알았다. 당시엔 '프레이' 김종인과 '고릴라' 강범현을 제외하고, 실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선수들을 이끌고 있었음에도 정노철이라는 사람이 사령탑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신뢰가 생겼다. 그리고 시작된 프리 시즌부터 그들은 될성부른 떡잎임을 입증했다. 이어진 정규 시즌에서는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1위 자리에 오르더니, 준우승이라는 훌륭한 업적을 창단과 동시에 일궈냈다.

그다음 서머 시즌에서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3위로 시즌을 종료하고 월드 챔피언십 직행에 성공했다. 국내 팬 일부와 해외 전문가들이 중국과 유럽의 강세를 점쳤으나 월드 챔피언십 시즌5는 한국의 독무대였다. ROX 타이거즈의 준우승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롤드컵 준우승은 역사가 1년도 채 안 된 팀이 이룩하기엔 버거워 보였던 위업이었다.

2016 스프링 시즌,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특색있는 조합과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선수들의 경기력에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ROX 타이거즈의 우승을 고대했다. 그 바람은 거짓말처럼 부활한 SKT T1에 처참히 박살 나버렸다. 큰 무대 경험이 적었던 것도 아니고, 선수들의 기량이 부족했던 것도 아닌데 ROX 타이거즈는 SKT T1과 만날 때마다 준우승 스택을 하나씩 쌓아갔다. 3번의 준우승을 그것도 똑같은 상대를 만나 겪다니 최악의 경험이다. 선수들이 느낀 좌절감도 컸겠지만, 아마 정노철 감독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감독(監督) : 어떤 일이나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잘못이 없도록 보살펴 다잡는 것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 영화나 무대 행사 등을 종합적으로 지도하고 지휘하는 일. 스포츠팀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책임자.

사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감독은 '책임자'다. 선수는 실수해도 코치나 감독에게 기댈 수 있지만, 감독은 아니다. 선수 혹은 팀의 실수도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책임지고, 소화해야 한다. 지레 걱정을 하고 만난 정노철 감독은 지난 준우승들에 대해 한 점의 후회도, 좌절감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순간 최선의 선택을 했으니까. 오늘 인터뷰로 만나볼 이는 최고의 팀이 된 ROX 타이거즈. 그 사령탑을 맡은 정노철 감독이다.


아직은 무더운 여름. 기자 생활 2년 차에 익숙해진 일산. ROX 타이거즈의 숙소 근처에서 정노철 감독을 만났다. 선수 시절에는 날카로운 인상을 줬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유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외견.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신사이자 달변가였다.

"안녕하세요. ROX 타이거즈팀의 감독직을 맡은 정노철입니다." 우승 이후, 꽤 오래 소식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황부터 물었다. "평소처럼 숙소에서 쉬거나, 밖에 나가서 놀기도 하고, 친구들과 부모님도 만났어요. 오랜만에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본 것 같아요. 정규 시즌에 돌입하면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거든요. 지난 시즌까지 이 정돈 아니었는데, 주 6일에 일정이 불규칙해져서 숙소를 떠나기 어려웠거든요." 뭔가 특별할 것 같았던 그는 우리와 같은 소시민이었다. 평소에는 주어진 일을 하고, 여유가 나면 친구들과 가족들을 만나고 주말에는 온종일 집에서 진을 치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

ROX 타이거즈에게 최고의 기쁨이 되었을 것 같았던 첫 우승에 대한 질문은 오늘 빼놓을 수 없는 축사이자,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초석이라 쉴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창단 이후, 첫 스프링 시즌 준우승, 서머 시즌 3위, 롤드컵 준우승, 2016 스프링 준우승이라는 세 번의 준우승을 겪은 후, 처음으로 경험한 우승이에요. 선수들도 정말 좋아했지만, 저 역시도 간절하게 바랐던 우승이기에 정말 뜻깊었어요." 무대에서 우승컵을 들었던 때가 생각이 나는지, 정노철 감독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사실 모든 스포츠에서 패배한 팀의 감독이란 비슷한 포지션을 맡게 된다. 분노한 팬들의 질책, 비판을 책임지고 받아야 하는 책임자. 특히, 승승장구하던 강팀이 한 번 패배를 겪었을 때는 평소보다 훨씬 높은 강도의 비난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또, 감독은 성적에 따라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하는 후원사들과 2차전을 벌여야 한다. 준우승을 세 번이나 할 동안, 그가 겪었을 좌절과 고뇌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음... 처음으로 준우승할 당시에는 창단 첫 시즌이기도 하고, 생각했던 거 보다 잘했던 시즌이라 저희 처지에서는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어요. 굉장히 훌륭한 성적을 냈다고 생각했고, 다음 시즌에는 더 잘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서머 시즌에서는 스폰서 문제로 외부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선수들의 급여, 연습 환경이 갑자기 열악해지면서 저뿐만 아니라 선수들, 매니저 형 다들 고생했죠. 그때부터 롤드컵 전까지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던 것 같아요. 혹독했어요." 정말 더웠던 작년 여름, 에어콘이 나오지 않는 연습실에서 여러 대의 컴퓨터가 쏟아내는 열기를 열정 하나만으로 이겨냈던 그때가 떠오른 듯,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선수 모두가 끈끈하게 버티면서 '다들 한 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도전했죠. 다 같이 힘을 내서 롤드컵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뤄냈기 때문에 정말 하늘이 도왔다? 좋은 결과였다? 준우승이었지만 그때까지는 정말 행복했었어요. 이번 스프링 같은 경우는 반전이 된 게 그런 좋은 기억들을 가지고, 로스터를 대부분 유지하면 스프링에 도전하게 됐잖아요. 시작도 좋았고, 당시 저희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어요. 다들 우승을 기대했던 거 같아요. 거기서 준우승이란 같은 결과를 받고, 다들 좌절을 했었어요. 작년 스프링은 행복했고, 올해 스프링은 마음이 아렸어요. 확실히 타격이 있었던 준우승이었어요." 우승을 해냈기에 무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3번의 준우승. 조금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화제를 돌렸다.

▲ 기대가 컸던만큼 좌절감이 들었던 16 스프링 시즌.

ROX 타이거즈의 최상위권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히 선수들이 열심히 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노철 감독은 어떤 노하우를 가지고 있을까?"제가 선수들의 연습에 있어 제시하는 몇 가지 것 중에 가장 첫 번째가 자유에요. 제가 프로게이머 생활을 해봐서 갇혀서 게임만 하는 상황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지 알아요. 억지로 연습을 하는 건 더 스트레스가 크겠죠. 스크림은 상대와의 약속이니까 꼭 지켜야 하는 거고, 개인 연습은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쉬고 싶은 사람은 쉬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하는 이런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어요.

두 번째로는 자유라는 것은 당연히 실력이 밑바탕이 되어야만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해요. 실력이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제가 지적을 하면 그 부분을 고칠 때까지는 알아서 연습하는 걸 굉장히 중요시해요. 자기가 만족할 만큼 연습이 됐다고 하면 자유롭게 다들 쉬면서 하다 보니까 전체적으로 숙소 분위기가 밝은 것 같아요. 제 개인적인 지도 모토는 친구 같은 감독, 선수 같은 감독이에요. 애들에게 이야기하진 않았지만요(웃음).

저는 감독이라는 직책이 한국에서는 조금 특수하다고 봐요. 후원사나 프론트와 관련해서 힘써야 하는 부분도 있고,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선수들을 기본적인 환경부터 멘탈적인 부분까지 챙겨줘야 해요. 코칭과 관련해서도 요즘은 잘 안 하지만, 초창기에는 솔로 랭크를 챌린저까지 오를 정도로 많이 해서 선수들이 쓰기에 좋은 챔피언, 메타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많이 파악했어요. 선수들한테 제안도 하고, 같이 대화를 하면서 좋은 조합, 전략, 픽을 찾아가는 노력을 했어요.

감독, 코치, 선수 간의 관계에 말이 많잖아요? 선수가 못하면 감독 탓, 팀이 못하면 감독, 코치는 죄가 없고 선수가 잘못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와요. 개인적으로 잘하면 둘 다 잘하는 거고, 못하면 둘 다 못한 거예요. 선수들이 개인 실력이 뛰어나고, 챔피언 풀이 올라가면 그만큼 감독 코치들이 전략도 짜기 쉽고, 밴픽 구성을 하기 쉬워요. 만약에 선수들이 개인기나 풀에서 부족하면 감독 코치가 그걸 도와서 점차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감독, 코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상호보완이 되어야만 팀이 성장해요. 제 개인적인 모토에요."
ROX 타이거즈의 비결은 다소 이상적이었다. 책임이 따르는 자유. 말로는 쉽지만 한 명이라도 어긋나면 전체가 붕괴할 수 있는 이상이 아닌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는 ROX 타이거즈이기에 가능한 이 방침이 지금의 ROX 타이거즈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고, 경력이 쌓이면 다른 곳으로 눈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이십 대 초반은 정말 하고 싶은 게 많을 때다. 쉬는 시간에 하고 싶은 것이 점점 많아지고, 책임보다는 자유만을 누리고 싶을 때가 있을 텐데. 거기다 프로게이머의 나이는 피지컬과 반비례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 년이 지난 지금, 과거와 같은 방침을 유지했을 때 똑같은 기량이 나오는 것은 냉정하게 말해 불가능하지 않을까? "나이에 대해서는 저도 반박하지 않는 게... 저도 그랬거든요. 연습해도, 예전엔 한판 하면 되던 게 열판을 해야 될 때가 있어요. 그 차이인 것 같아요. 제가 자유를 추구하는 이유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학생들에게 억지로 공부하라고 시켜도 집중해서 하는 학생이 별로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 시험이 있는데 학생이 스스로 수 많은 수학 과목 중에 함수 문제만 다 맞혀보자는 생각으로 함수만 한 시간 정도 집중해서 하면, 그게 더 효율이 높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야 솔로 랭크도 능률이 생긴다고 봐요.

▲ 자기 주도적인 연습을 중요시하는 정노철 감독.

자유 없이 강제로 시간만 채우는 솔로 랭크는 억지로 하는 것밖에 안 될 것 같아요. 선수 스스로가 느끼기에 내가 연습이 필요하다고 해서 하는 게임은 능률이 높다고 생각해서 '자유'라는 신조를 유지하려고 했던 거에요. 물론, 어렵죠. 친구들이 어리다 보니까, 쉬는 기간에 다른 게임을 하다 보면 너무 재밌어서 빠지게 되기도 하고, 잠을 자다 보면 습관이 돼서 낮잠을 계속 잘 수도 있어요. 그때마다 제가 태클을 걸죠(웃음). 애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무서울 때 진짜 무섭게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빈말로 비속어도 섞으면서 분위기를 잡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알아서 잘해요. 초창기에는 엇나가는 일도 있었어요." 그의 추가적인 답변에 나의 모든 의문이 풀렸다. 자기 주도적인 학습, 초등학교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야기지만 실천하지는 못했던 그것. 그 전설의 학습법을 스스로가 필요로 해낸다면, ROX 타이거즈의 성적이 이해가 간다. 정노철 감독이 이따금 쏟아낸 질책도 제대로 한몫을 했을 테다.

감독님도 서투르던 시절이 있었을 것 같아요. 특히, 초창기에는 선수들 입장에서 보면 감독이지만 같은 팀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친한 형이기도 하잖아요. 그 괴리감에 선수들도 적응하지 못하고, 감독님도 포지션을 잡기 모호하진 않았었나요? "우리나라 LCK에 많은 감독님이 계시잖아요. 솔직히 2015 스프링 시즌까지 패기가 넘쳤어요. 지금 코치진 중에서 나보다 밴픽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보다 게임 많이 하는 사람 없다. 내가 가르치면 누구보다 잘 가르칠 수 있겠다는 자만심이 있었죠. 그런 마음으로 첫 결승전까지 치르게 됐어요. 준우승 이후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나 자신의 패기만으로 되는 게 아니구나, 감독님들이 괜히 오래 한 것이 아니고, 경력에서 나오는 노하우가 많다는 걸 알았어요. 처음에는 애들과 불협화음도 잦았어요. 제 성격이 독불장군이거든요.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옳다고 했는데, 애들이 아니라고 하면, 제가 이길 때까지 설득을 했어요. 아무리 봐도 이게 맞는데, 너네 무슨 소리 하냐?라고(웃음) 말했죠. 고집이 셌었어요.

첫 시즌이 끝나고 저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 알게 됐어요. 흔히 말하는 덕장 스타일의 코칭을 배우려고 했어요. 아우르는 것도 배우고, 대화하는 방법도 연습하고, 의견을 수용하는 자세도 많이 배웠어요. 다른 감독님들처럼 선수들과 교감할 수 있는 환경도 많이 만들었어요. 선수들도 초창기에는 '감독님은 이기적인 사람, 독불장군'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지금도 애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어요.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해요."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향상심이 없고, 스스로 안주하거나 아집을 부리면 발전이 없다. 정노철 감독은 한 시즌 만에 아집을 버렸다.

선수 출신답게 피드백 과정도 남다를 것 같아요. 다른 감독님들 눈에 보이지 않는 선수의 실수가 눈에 들어오고, 그걸 고치는 방법도 더 잘 알 것 같은데요. 피드백은 어떤 식으로 진행하나요? "최근에 하는 피드백과 작년 피드백은 달라요. 말씀하신 대로 작년에는 하나하나 실수, 운영적인 부분, 습관, 커뮤니케이션 모두 타게팅을 해서 혼냈어요.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제가 우리 선수들보다 많이 알아서가 아니고... 어떤 느낌이냐면 제가 선수를 하다가 해설로 1년간 활동했잖아요. 그때 값진 것들을 많이 배웠어요. 선수를 하는 당시에는 단편적으로 아군 5명의 시선으로 게임을 하거든요. 해설자는 양 팀 10명의 선수를 바라보다 보니까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가르칠 것도 많이 생겼죠. 상대 팀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고, 초반에는 배우는 과정에서 저의 독불장군 기질이 나와서 많이 다퉜어요. 지난 1년 동안 점차 블록을 쌓아가면서 지금은 피드백이 거의 없어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움직이는 편이죠.

▲ 타이거즈 초창기의 정노철 감독. 매서운 피드백을 했을 것 같은 날카로운 인상이다.

이것도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건데 처음에는 스킬샷 같은 메카닉 실수를 지적했었어요. 제가 솔로 랭크도 하고, 선수 시절도 돌이켜 봤을 때, 메카닉적인 부분을 다이아1~마스터 감독이 말한다고 받아들여질까 하는 생각이 든 뒤부터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어요. 선수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것 같아서요. 그 뒤부터는 모든 면에서 서로 유해졌던 것 같아요(웃음). 이제는 실력이 쌓여서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는 데까지 도달했어요. 저는 관전하다가 밴픽적인 부분 문제 있는 거 같으면 챔피언 이야기나 좀 하고, 실수 같은 거 해도 스스로 문제를 찾아가니까 편해졌어요. 오히려 제가 노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아요. 초심을 잡아야 할 것 같기도 해요(웃음)." 비 온 뒤 땅은 더 단단히 굳는 법이다. 그의 독불장군 기질은 처음에는 독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약이 됐다. 모든 코치진이 꿈꾸는 이상향을 정노철 감독은 누리고 있다.

이제는 출중한 기량을 토대로 선수들의 매력이 널리 알려지면서 팬층이 많아졌지만, 돌이켜보면 ROX 타이거즈는 미운 오리 새끼였던 것 같아요. 후원사가 중국 자본이고, '프레이' 김종인과 '고릴라' 강범현을 제외하고는 검증되지 않았던 선수들이 뭉쳤어요. 신생팀인데도 불구하고, 기존 팀들을 차례로 꺾고 당당히 정규 시즌의 왕좌를 차지했던 것도 여러 요소 중 하나였었죠. 이 때문에 한 번의 패배에도 유독 비판 여론이 거셌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왜 우리에게만 이러나... 조금 야속하다는 마음이 들진 않았나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첫 시즌에는 자만심이 많아서 패배했을 때, 비판 여론을 보고 득달같이 화를 내는 스타일이었어요. 가만 지나고 보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가 어찌 됐건 15 스프링 시즌에서 한국의 1위 자리에 올랐잖아요. 그래서 한국 대표로 IEM 시즌9 카토비체를 나가게 됐는데, 이때가 한국 스타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한 첫 시즌이에요. 제일 민감한 시즌이잖아요? 과연 LCK는 많은 스타 선수들이 이탈했음에도 최고의 리그인지 아닌지가 궁금했던 시기에요. 그때 대회에 나가서 참패했잖아요. 저희가 잘못한 거죠. 거기서 한국 대표인 저희가 졌기 때문에 LCK 팬들의 자부심이 뭉텅 깎여 나갔을 거예요.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잘해서 차츰 극복해나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저희 모두가 받아들였어요."그런 시기가 있다.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평소에는 그냥 넘어가거나 약간의 질책만 가해질 것도 국민 정서가 좋지 않은 시기에는 큰 문제가 되는 것처럼 ROX 타이거즈의 IEM 패배는 같은 맥락이다. ROX 타이거즈는 시기를 탓하지 않고, 패배를 교훈 삼아 내실을 다졌다.

▲ 엑소더스 이후 첫 국제 대회였던 IEM 월드 챔피언십의 뼈아픈 패배.

항상 SKT T1에 약한 면모를 보였어요. 세 번의 결승전에서 모두 패배했고, 16 서머 정규 시즌에서도 2패를 했죠. 상성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감독님도 SKT T1을 만나면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느끼나요? "당연하죠. 저도 사람인데요. 세 번의 큰 무대에 올라가서 모두 졌어요. 그 압박감이나 상성에 대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그 때문에 SKT T1과 붙을 때마다 더 긴장하게 되고, 준비하는 게 까다롭죠. 이번 시즌 우승을 했는데, SKT T1에는 한 번도 못 이겼어요. 이번 롤드컵에서 맞붙을 기회가 있다면 꼭 어떻게든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해내기 전에는 상성에서 오는 압박감을 깼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승리로 상성 관계를 깨트리는 것을 모두가 바라고 있어요. 물론, 결승전에서 만나면 좋겠죠. 너무 빨리 만나면 마음이 아프니까요(웃음). 결승전에서 만나서 정말 멋진 경기를 하고 싶네요. 작년의 복수, 올해의 복수를 한 번에 하고 싶어요."


ROX 타이거즈의 밴픽은 항상 좋았지만, 큰 경기에서는 말리는 모습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15 서머 포스트 시즌에서 탑 피즈를 회심의 카드로 준비하셨는데, 말파이트에게 카운터를 당해 라인 주도권을 내주고 패배했던 경기가 있었죠. 책임감을 느끼셨을 것 같기도 하고, 힘들었을 것 같아요. "밴픽이라는 게 어려운 부분이에요.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팀마다 생각하는 방향이 다 달라요. 왜냐하면, 선수가 다르니까요. 이 선수에게 맞는 옷이 있고, 안 맞는 옷이 있는데, 맞지 않는 옷이 대세라고 해서 억지로 입히면 엉키기 마련이거든요. 외부에서 제삼자가 보기에는 밴픽 결과를 보고 어떤 쪽의 밴픽이 더욱 우세하다고 판단을 하잖아요.

그런데 팀 내부에서는 실제로 서로 자기가 우세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요. 항상 느끼는 건데, 15 스프링에는 자만심 때문에 '내가 밴픽 다 이겼다'라는 생각이 많았어요. 지나고 보니까 플레이오프 같은 경우는 서로 밴픽을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밴픽으로 유불리를 평가하는 단계가 플레이오프부터는 없어진다고 봐요. 이게 정설이라고 생각해요. 질문처럼 카운터를 당해서 지는 경기도 있었지만, 좋은 상성 픽으로도 밀리는 경우가 있었어요. 사실, 당시에는 '마린' 장경환 선수가 (송)경호를 압살했어요. 챔피언 상성으로는 경호가 유리한데 실질적으로는 장경환 선수가 이겼어요.

노련미에서 차이가 났던 건데, 그래서 피오라, 피즈 같은 자신이 잘하면 상성을 없앨 수 있는 픽을 찾는 데 주력을 했었어요. 저희로서는 그게 최선의 밴픽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예요. 밴픽 실수라고 볼 수도 있어요. 결국에는 졌으니까요. 저희와 경기를 한 팀들에 대해서 '밴픽이 잘못돼서 졌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들, 그 밴픽이 그 팀에게는 최선이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제가 생각하는 밴픽의 정의는 '팀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 정답이 없고, 무엇이 정답이라고 평가하기엔 팀들의 견해 차이가 있어서 평가할 수 없는 것'이에요."


또 항상, 메타가 발목을 붙잡았어요. 결국, 실력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ROX 타이거즈가 정규 시즌 동안 쌓아 온 금자탑과 플레이 방식이 패치 한 번에 무너진 적이 많아요. 잿불 거인의 등장으로 이호진 선수가 활약할 수 있는 범위가 확 줄었고, 스멥 선수는 탱커 메타에서 상대적으로 큰 힘을 쓰지 못했어요.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그러다 보니 정말 많은 생각이 드셨을 것 같은데요? "그런 생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인 것 같아요. 특히, 잿불 거인 메타에서는 호진이가 잘하다가 잿불 거인 패치로 무너진 건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 부분을 안타깝게 생각해요. 저희를 겨냥한 건 아니지만, 운이 안 좋았죠. 이번 스프링에서는 아지르, 마오카이가 정규 시즌 내내 죽어있다가 포스트 시즌에서 상향을 받았고, 다들 아시는 '쿠로' 이서행의 아지르, '스멥' 송경호의 마오카이 같은 약점이 드러나기도 했어요. 저희로서는 답답했죠. 이번 결승전에 앞서서 라인 스왑이 없어지기도 했어요. 그게 저희한테 손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이런 부분은 라이엇이 어느 정도 고려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 대부분의 결승전에 올라서일까? 유독 ROX 타이거즈는 급변한 메타의 희생양이 됐다.

"정규 시즌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고, 좋은 성적의 혜택으로 결승전에 진출한 건데, 포스트 시즌 즈음 이뤄지는 대규모 패치는 정규 시즌 성적 의미를 없애버리는 것 같아요. 물론, 챔피언 밸런스 패치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저희가 부족했던 건 맞아요. 운이 좋지 않아 대세 챔피언들이 저희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을 뿐이죠. 하지만 잿불 거인, 라인 스왑 같은 기존 틀을 한 번에 바꾸는 패치는 한 시즌 동안 안 해줬으면 좋겠네요."

정규 시즌에서 ROX 타이거즈가 보여주는 메타 적응력은 완벽함에 가까워요. 지난 시즌 보여줬던 4딜러 조합은 다른 팀들이 구사하면, 단점이 크게 보이는데 ROX 타이거즈가 사용하면 장점만 눈에 들어오던데 여기에도 비결이 있을 것 같은데요? "밴픽 이야기를 할 때 했던 '맞는 옷'을 입었던 거죠. '피넛' 한왕호와 경호의 공격성을 극대화할 수 있던 조합이 4딜러에요. 중간에 약점이 파악돼서 한동안 쓰지 않았는데, 선수들에게 잘 맞는 옷을 찾아주다 보니 장점이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저는 약점이 있는 극단적인 픽도 선수가 게임을 풀어나가는 스타일과 알맞으면 문제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밴픽 부분에서 제가 그동안 이야기하지 않았었는데, 김상수 코치가 많은 도움이 돼요. 15 서머 2라운드부터 상수가 코치하게 됐는데, 제가 못 보던 부분을 보게 됐어요. 이게 옳다고 생각해서 애들에게 설파하다가도 상수가 생각하기에 안 좋은 부분이 있으면 옆에서 태클을 걸어요. '형 이런 단점도 있고, 그 부분에서는 이게 맞는 것 같은데?'와 같은 식으로요. 처음에는 '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라고 생각을 했는데, 대화하다 보니 상수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고, 정답에 가까운 말이 많았어요.

저와 상수가 토론을 통해서 조합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애들에게 알려주니까 메타 적응이 빠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또, 부스 안에서도 경기를 보고 제가 느낀 점을 가지고 부스로 들어가는데 선수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엉켜요. 저의 의견과 선수의 의견이 좀처럼 일치가 안 될 때가 많았거든요. 예전에는 강제로 시켰는데, 상수가 들어 온 이후부터는 중간 조율이 잘 돼요. 저와 선수의 의견을 종합해서 상수가 피드백하고, 결론을 도출하거든요. 정말 장점이 많은 친구예요."
ROX 타이거즈가 강팀이 된 이유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을 위해 애쓰는 김상수 코치 같은 이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 김상수 코치의 합류로 더욱 강력해진 ROX 타이거즈.

ROX 타이거즈는 선수들을 뽑을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기에 이렇게 강력한 팀을 구성했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초창기의 ROX 타이거즈는 이곳저곳에서 실패를 겪어봤던 주류에서 벗어나 있던 선수들을 모은, 외인구단 느낌이 강했죠. "당연히 노력하는 선수는 좋은 선수가 될 수밖에 없어요. 정말 좋은 예로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있기에 반박할 수 없죠. 가치 있는 선수에 대한 기준은 많이 있지만, 제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소통할 수 있는 선수예요. 선수끼리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고, 서로 잘못된 점을 이야기 편하게 할 수 있어야 해요. 그걸 주고받으려면 당연히 소통할 줄 알아야 해요. 이렇게 소통을 할 수 있는 선수 5명이 모이면 항상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선수 경력과 함께 보낸 시간이 늘어날수록 서로 건드리지 않는 영역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건 제가 뼈저리게 느껴봤어요. 저는 선수 시절에 고집이 셌거든요. 팀원들 말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저 혼자서 팀을 이끌려는 스타일이었어요. 그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은퇴할 즈음에야 알게 됐어요. 이런 식으로 하면 될 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죠. 감독이 된 이후부터 제 선수 시절과 닮은 선수가 우리 팀에서는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선수 시절 생활이 이럴 땐 많은 도움이 돼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단점이라고 느껴졌던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정노철 감독이 선수 시절 겪었던 시행착오가 ROX 타이거즈 선수들에게는 지침이 되어 오류를 범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ROX 타이거즈는 같은 픽을 해도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강팀인 것 같아요. 교전을 열었을 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플레이하는 것 같은데요. 선수들이 게임 안에서 자신의 판단으로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것인지, 아니면, 조합마다 틀을 정해 놓고 경기에 임하는 건지 궁금하네요. "보통은 틀을 정하죠. 이 틀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이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챔피언마다 강한 타이밍이 정해져 있거든요. 정말 단순하게 예를 들어서 루시안은 초반에 강하고, 중반에 화력이 극대화되고, 후반 가면 힘이 빠지잖아요? 렉사이는 초중반 정글링이 빠르고, 소규모 교전에서 강해 맵 장악을 잘해요. 잘 성장하면 탱킹력도 좋고, 그러나 궁극기가 없어서 한타에서는 파괴력이 떨어지죠. 챔피언마다 특색이 있는 거죠.

이런 부분들을 합쳐 놓고 보면 조합마다 강한 타이밍이 정해지게 되있어요. 라인전 중심의 조합, 첫 용 한타 주도권을 쥐는 조합, 국지전에서 강한 스플릿 조합, 좋은 타이밍에 뭉치면 막기 힘든 포킹 조합 등등 강한 타이밍에 적극적으로 움직이라고 주문을 하죠. 제가 항상 강조를 하다 보니 조합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게 멘탈적인 부분인데, '지금 내가 강한 타이밍인데, 감독님이 그러던데?'라고 생각을 하면 보편적으로 이기지 못할 것 같은 한타도 자신감 있게 들어가니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안좋은 점도 있죠. 초중반에 강한 조합인데, 후반 가면 힘이 빠지는 조합을 했을 때 원하는 만큼 스노우 볼을 굴리지 못했을 때 조급해지는 거 같아요. 이번 서머 결승전 kt 롤스터와 2세트에서의 조합이 그렇게 말렸죠. 그걸 보고 틀을 잡고 들어가는 게 장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 부분은 선수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거라 어려운 것 같아요. 그걸 극복해내면 더 대단한 선수가 되는 거죠. kt 롤스터와의 2세트는 밴픽에 따른 전략 수행이 잘 안 된 경기죠. 후반에 약하다는 조합의 한계는 고칠 수가 없거든요." ROX 타이거즈의 밴픽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지 대략 알 수 있었던 좋은 답변이었다. 선수와 감독이 신뢰를 가지는 것이 경기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밴픽과 그에 맞춘 전략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 수 있었다.

다시 주제를 바꿔서, 이번엔 롤드컵과 해외 팀들에 대한 질문을 이어나갔다. 혹시 해외 팀 중 경계 되는 팀들이 있나요? "솔직히 말해서 시간이 없어서 해외 모든 대회를 챙겨보진 못했어요. 정규 시즌은 볼 수가 없어요(웃음). 보통 플레이오프와 결승전을 챙겨보는데, 다들 아시는 것처럼 북미가 발전을 많이 했어요. 운영, 피지컬, 한타 모든 부문에서 실력이 향상돼 기대되는 지역이에요. 중국도 이번 시즌 내부적으로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역대 롤드컵 중 가장 힘들 것 같아요. 앞으로 더 힘들어지겠지만요(웃음). 경계 되는 팀은 TSM과 EDG에요. 우승을 한 팀들이고,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잖아요? 잘할 것 같아요. 작년의 해외 팀과는 포스부터가 달라요. 시즌 중 폼이 좋아서 붙으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TSM과 스크림을 해볼 예정인데, 아직은 붙어보지 못해서 궁금해요. TSM에겐 적응기도 필요하고, 스크림이 다가 아니잖아요? 연습 경기에서 이겼다고 방심하지도 않을 거고, 졌다고 해서 걱정하지도 않을 거지만 재밌는 스크림이 될 것 같아서 기대하고 있어요." (이 인터뷰는 9월 7일 진행됐습니다)

▲ 달라진 TSM은 ROX 타이거즈에게도 경계 대상.

TSM의 경기를 보면, 한국과 타이밍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수적으로 불리한데도 과감하게 교전을 열기도 하고, 라인전에서도 굉장히 공격적인 스탠스를 취해요.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어느 정도 구상이 됐나요? "생각은 열심히 하고 있고, 계속 분석을 하고 있지만, 롤드컵 메타는 특히 어떻게 바뀔지 모르잖아요. 픽뿐만 아니라 팀 색깔도 대회 중에 확 바뀌는 경우도 많아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TSM은 '비역슨'이라는 훌륭한 미드 라이너를 보유했어요. 정말 아우라가 굉장하더라고요. '더블리프트'는 정신적으로 무너지면 약점이 많이 드러나는 선수인 건 너무 뻔하기 때문에 그런 외적인 요소도 저희가 준비하는 범위 안에 다 들어가 있어요. 확실한 건 TSM은 강팀이에요.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 같아요."

한국 팀을 잘 잡기로는 플래쉬 울브즈가 유명하잖아요. '메이플'의 기량도 '비역슨'처럼 한국 미드 라이너에게 견줘도 될 정도로 뛰어난데요. 플래쉬 울브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잊고 있었는데, 강력한 팀이에요. 플래쉬 울브즈는 미드와 정글이 강한 팀이에요. 팀 전체 색깔이 공격적이고, 미드-정글이 잘 풀렸을 때, 한타 파괴력도 굉장해요. 봇 듀오도 한국 솔로 랭크 최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기량이 뛰어나죠. 개개인 능력이 워낙 뛰어난 팀이기에 플래쉬 울브즈의 폭발력을 억제하지 못할 경우가 많아요. 저희도 SKT T1도 그 폭발력에 휩쓸렸죠. 가장 경계해야 할 팀인 것 같아요. 하지만 대만 팀 특유의 공격성이 화를 부르기도 해서, 저희가 크게 실수만 안 한다면 꺾을 수 있는 상대에요. 잊고 있었는데, 플래쉬 울브즈는 복병인 것 같아요. 정규 시즌에서는 항상 애매하다가도 플레이오프와 같은 큰 경기에서 잘하는 팀이니까 더 의식해야 할 것 같아요."

▲ 한국 팀을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이는 플래쉬 울브즈도 경계 대상

이번 시즌 전체적인 기량에서 퇴보했다고 평가받는 유럽 지역은요? "운영적인 실수도 잦고, 밴픽도 특이한 편이에요. 그게 무섭죠. 새로운 메타가 발생할 때, 그 시작점은 대개 유럽인 경우가 많아요. 처음에는 '저게 좋은가?'라고 생각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북미, 중국, 한국, 대만 모두 쓰고 있어요(웃음). 이번 롤드컵에서도 새로운 메타를 선도한다면 경쟁력 있는 지역이 될 수 있으나, 그게 발휘가 안 되면 무난하게 탈락할 것 같아요. 사고방식이 열려 있는 게 유럽의 장기라서 그 점을 잘 이용하면 저희도 이득을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전체적인 수준이 매년 발전하고 있는 월드 챔피언십.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함이 예상된다고 정노철 감독은 말했지만, 표정에서 자신감이 물씬 느껴졌다.

혹시 경계 되는 선수가 있나요? "앞서 말했던 TSM의 미드 라이너 '비역슨' 선수요. 계속 두각을 드러냈던 선수인데, '페이커' 이상혁 선수와 붙어도 밀리지 않는 저력을 보여줬어요. 굉장히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서행이가 안정적으로 경기를 풀어나가고, 네 명과의 융화력이 뛰어나서 운영적으로 찍어 누를 수 있어요. 질 것 같진 않아요. 개인만 놓고 봤을 때는 확실히 위협적이죠. '비역슨'을 제외하고는 원래는 '스코어' 고동빈 선수였어요. 아쉽게 됐죠. 추가로 한 명을 더 뽑자면 G2의 서포터 '미티' 선수요. 통통 튀는 스타일이라, 작년 롤드컵에서 만났을 때도 재밌는 친구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특유의 활발함이 경기에서 드러났을 때 위력이 장난 아니에요. '미티' 선수의 변칙성을 높게 평가해요." 예상대로 한 명은 모든 전문가가 높게 평가하고 있는 TSM의 '비역슨'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예상 범위 안에 없었던, 최근 메타에서 큰 변수나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서포터 '미티'였다. 정노철 감독은 확실히 남다른 시각을 가졌다.


마지막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닌, 정노철 감독님이 평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네요. "3년 간의 선수 시절을 끝마치고, 해설도 1년 정도 하고 이제는 감독 2년 차를 마무리 짓고 있어요. 이 5년간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명예, 금전, 커리어 모두 발전을 했고 사람 정노철로서도 성장했어요. 저에게 이렇게 큰 가르침을 준 e스포츠가 진심으로 고마워요. 앞으로도 쭉 함께해서 저도 더 성장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e스포츠 판이 사라지면 슬플 것 같아요.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준 곳이에요. 앞으로 생길 선수, 코치진, 해설들이 자신의 꿈과 희망을 펼칠 수 있는 곳으로 계속 남아줬으면 좋겠어요." 희망과 꿈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듯 멋쩍은 미소를 띤 채 말한 정노철 감독의 바람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작년에는 논란과 탈도 많았어요. 그랬음에도 저희를 믿고 꽉 잡아준 회사 대표님, YY TV와 HUYA.com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이번 롤드컵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고, 많은 후원사가 붙어서 내년에도 지금 선수들과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선수들을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팬분들이 있기에 큰 의지가 돼요. 좋은 성적으로 보답해드리고 싶네요. 곁에서 항상 고생하는 김상수 코치, 이세진 매니저 같은 숨은 조력자들이 많아요. 저희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단이 그렇죠. 다들 고생하는 걸 잘 알아서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비난이 가슴 아파요.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잘 안되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다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건데, 팬들이라면 끝까지 믿고 격려를 아끼지 않아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커뮤니티 많이 보거든요(웃음). 재밌게 봐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나올 때도 있고, 비판은 좋은 거니까 많이들 해주시고, 비난만 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ROX 타이거즈가 다시 롤드컵 정상에 서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