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인 박지성은 경기장에 들어설 때마다 자기 암시를 했다고 한다. 그 암시는 '내가 최고다' 였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누구보다 빠르지도, 크고 강하지도, 드리블이 뛰어나지도, 슈팅이 강력하지도 않다고 이야기했던 선수였다. 언뜻 보기에는 모순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경기에 나서는 선수가 좋은 플레이를 펼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자신감이 결여된 선수는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없다. 근거 없는 자신감일지라도 꼭 필요하다. 이는 비단 스포츠에만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유명 힙합 가수인 '제이지' 또한 무명 시절부터 스스로 자신이 최고라고 말하고 행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그들을 최고의 자리에 있게 만들어줬다.

"저는 항상 자신감이 있어요. 제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룰러' 박재혁은 그야말로 자신감이 넘치는 선수였다. '나는 잘한다', '자신감이 있다' 라는 말을 인터뷰 동안 참 많이 사용했다. 정말 자신감이 크기도 했지만, '내가 최고다' 라는 자기 암시를 의도적으로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신인은 정말 오랜만에 봤다.

그와는 초면이었다. 당연히 조금은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가 브론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금세 분위기가 밝아졌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동질감과 친근함을 느껴서였을까.

"유치원 때부터 게임을 했어요. 문방구에 가면 오락기가 있었는데, 동물 철권을 즐겨 했어요. 온라인 게임은 8살 때부터 했던 것 같아요. 겟앰프드요(웃음). LoL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했고 처음에는 진짜 너무 못했어요. 첫 배치는 브론즈를 받았죠. 조금씩 오르다가 시즌 4 때부터 티어가 확 올랐어요. 시즌 4 때는 마스터를 찍고 시즌 5 때는 챌린저를 찍었어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룰러' 역시도 티어가 오르다보니 자연스럽게 프로게이머라는 꿈을 실현할 기회를 얻게 됐다. 그의 시작은 2부리그인 챌린저스 소속 '스타더스트' 였다. "스타더스트에서 스크림 대타를 잠깐 했어요. 스크림을 몇 번 했더니 팀에서 저를 좋게 봐줬어요. 마침 스타더스트는 숙소도 있어서 2016 스프링부터 합류했죠." 2016 최고 신인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시작부터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다. "2부에서는 절대 하지 마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어린 그가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스타더스트를 1부로 승격시키려 했다. 역시 그때도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그때 실력으로 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승격할 수 있을 줄 알았죠. 근데 플레이오프에서 승승패패패로 패배했어요. 너무 아쉬웠어요. 아버지의 말씀 때문에 승격을 못 하면 팀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서요." 그렇게 그는 스타더스트에서 나오게 됐다. 이때는 자신감도 약간 꺾였다고.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 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위기는 기회였다. 최우범 감독이 그를 찾았다. 평소, 솔로 랭크와 챌린저스 코리아를 자주 챙겨보는 최우범 감독의 눈에 '룰러'가 들어온 것이었다. 풋내기 신인의 프로게이머 인생 진정한 1막이 그렇게 시작됐다.

신기한 동료들이 많았다. 왠지 모르게 방망이가 잘 어울리는 맏형, 첫 만남부터 노래를 부르던 인상파 미드 라이너, 그냥 착하게 짜장면만 먹는 탑 라이너, 친절했던 두 서포터들까지. '룰러'의 합류는 재미있었던 삼성 조합의 마침표가 됐다. 삼성의 고민이었던 원거리 딜러 문제를 '룰러'가 확실히 해결했다. 그는 데뷔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경기 전 날에는 엄청 떨렸어요. 당일에도 조금 떨리긴 했는데, 경기장에 들어가서 게임을 시작하니까 긴장이 다 사라지더라고요. 조금의 긴장은 좋은 효과를 준다고 하던데, 정말인 것 같아요. 상대가 '프레이' 김종인과 '고릴라' 강범현이었는데, 하나도 위축되지 않았어요. 그냥 저는 제가 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게임을 해요. 그래서 그런 게 없었어요."

근거 없었던 신인의 자신감은 근거 있는 결과로 나타났다. '룰러'의 데뷔전이었던 2016 섬머 첫 경기에서 삼성 갤럭시는 우승 후보 ROX 타이거즈를 2:0으로 눌러버렸다. 오랜만에 보는 신인의 성공적인 데뷔전이었고 그의 활약은 시즌에도 계속됐다.

그러나, 데뷔전의 좋았던 경기력이 항상 나왔던 것은 아니었다. 큰 자신감이 되려 독으로 돌아왔다. 원거리 딜러가 절대 해서는 안 될 의문사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제가 엄청 공격적이에요. 롤챔스 중간에 나왔던 의문사들이 공격적이라 나온 실수였어요. 긴장이 조금은 풀렸었나 봐요. 데뷔전 때는 '죽지만 말자' 라는 생각으로 했던 게 도움이 됐어요. 실수할 때마다 감독님이 혼도 내시고, 잘 얘기해주셨어요. 고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계속 노력하고 있어요."


오랜시간이 지난 후에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드러났다. '조금만 더 잘 할걸' 이라는 아쉬움. 자신감으로만 가득 차 있던 이 어린 프로 선수는 처음으로 책임감도 느꼈다고 한다.

"요새들어 더 많이 느끼고 있어요. 어린 친구들이 이제는 저를 보고 배울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경기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솔로 랭크에서 채팅도 그렇고, 밖에 나가서도 사람들이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나 행동을 생각하고 해요."

프로라는 위치에서 많은 생각을 했던 섬머 시즌이 무난히 끝났지만, 그의 진정한 2016년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룰러'는 뜻하지 않게 이른 황금기를 맞이했다. 시작은 롤드컵 선발전이었다. 삼성은 무난히 선발전 토너먼트를 뚫고 최종전까지 올랐다. 그곳에서 삼성이 만난 팀은 천적 kt 롤스터였다. 세트 스코어 19:0으로 철저하게 밀렸던 삼성에 기적이 일어났지만, '룰러'를 비롯한 삼성 선수들에게는 기적이 아니었다고 한다.

"‘질 것 같지가 않은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팀원 모두가 그랬어요. "실수 없이만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상성에 대한 부담감 같은 건 사실 없었어요. 스크림도 잘 됐었고요. 실제로 첫 세트도 이겼죠. 그런데 2, 3세트를 내리 지더라고요. '이러다 큰일 나겠다' 했는데 다행히 잘 풀린 것 같아요."

그야말로 담담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사실 삼성 선수들은 선발전에서 승리하고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짐작해보건대, 그 눈물은 천적 kt 롤스터를 이겼다는 기쁨보다는, 롤드컵에 진출했다는 그리고 노력의 결실을 보았다는 기쁨의 눈물이지 않았을까. '룰러' 또한 이날 눈물을 보였다.


이 신인의 첫 장은 단순히 롤드컵 진출로 끝나지 않았다. 더 화려한 미사여구와 단어들이 그의 첫 장을 꾸몄다. 삼성은 조별 리그에서 순항하여 1위로 8강에 진출, 토너먼트에서도 모든 팀을 3:0으로 꺾고 대망의 결승에 오른다. 방점을 찍으려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LoL 최고의 끝판왕 SKT T1. 두 팀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때도 kt 롤스터전처럼 실수만 없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3:0, 3:1도 가능하리라 봤죠. (조)용인이형도 동의했었어요. 분위기가 엄청 좋았거든요."

그는 SKT T1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었다. 그래도 상대는 역시 SKT T1이었다. 세트 스코어 2:3. '룰러'는 인생에서 가장 뼈저리게 아쉬웠던 패배를 맛봤다. 게다가 자신의 실수가 어느 정도 패배의 책임이 있었다. "상대가 너무 잘했어요. 전체적으로 다 잘하시더라고요. 다전제 SKT T1은 확실히 달라요. 너무 아쉬웠어요. 당연히 제 실수도 기억에 남아요. 나름대로 각이 보여서 했는데, 스킬을 실수했어요."

팀원들에게 미안함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팀원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형들에게 미안해요. 그래도 잘했다고 저를 다독여 주더라고요. 고마워요, 많이." 우리는 일이 잘 못 됐을 때 습관처럼 남 탓을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그렇기에 그 어려운 무대에서 최고의 경기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경기가 끝나고 '룰러'는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었다고 했다. 삼성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아 졌다.... 한숨 한 번씩 쉬고, 서로 수고했다고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그렇게 꿈만 같았던, 아직 성인이 채 되지 않은 신인의 1년이 끝이 났다.


"신인으로 1년 동안 쭉 상승곡선을 이어왔어요. 돌아보면 다 기쁜 일만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안 잘리고 조금 더 잘했으면 쉽게 가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해요. 단점을 보완하고 더 발전할거에요."

저는 언제나 자신은 있어요. 속된 말로 쫄지 않고 열심히 할거에요. 지금 한국에 슈퍼 팀이 많이 생겼잖아요. 삼성이 슈퍼 팀에 비해 전력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무 자신감으로만 가득 차면 안되니까 조금은 경계를 하면서 하려고요."

그의 당찬 음성에서 이제 겨우 1막의 커튼이 내려왔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2막, 3막이 궁금한 사람은 나뿐일까? 그와 함께하는 삼성 갤럭시의 행보가 기대되는 사람이 나뿐일까? 방망이, 짜왕... 이미 그들은 한 몸에 사랑을 받고 있고,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 당찬 신인이 있을 것이다.

"2016년 좋은 성적을 거둬서 기쁩니다. 다음 시즌에도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뱅-프레이-데프트' 쟁쟁한 원거리 딜러 선수들 다 계시는데 이기지는 못해도 절대 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