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선수들의 뛰어난 피지컬과 화려한 스킬 연계로 이뤄지는 한타 싸움이다. 그러나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잘하느냐 못하냐에 따라서 피지컬 차이와 글로벌 골드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밴픽 전략과 운영 방법이다.

핑크와드 코너는 치열함이 느껴지는 명승부 혹은 밴픽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경기를 선정해 보이진 않지만, 게임 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밴픽 전략, 전술과 운영에 대해서 다룬다.



전성기라는 말은 현역 선수에게 꽤 잔인한 단어다. 한창 잘하고 있는 선수에겐 사용되지 않는다. 선수의 폼이 내려앉고 왕년에 보여줬던 활약을 더는 보여주지 못할 때, '그 선수의 전성기는 그랬지', '걔가 왕년에는 날아다녔어'라며 전성기라는 말을 사용한다. 더는 그런 활약을 보이지 못 할거란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샤이' 박상면은 전성기가 꽤 많이 지난 선수다. 시즌2 월드 챔피언십에서 잭스로 2:1 대결을 이기고, 라바돈의 모자를 쓴 신지드로 팀을 캐리하던 시절도 벌써 5년 전 이야기다. '미키' 손영민은 데뷔 당시 보여줬던 활약이 가장 좋았고 그때가 전성기였다. 이듬해부턴 기복이 심한 탓에 잘할 때는 미키갓, 못할 때는 1미키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다.

이들이 2017년 락스 타이거즈에 한 팀으로 묶였을 때, 락스 타이거즈의 경기력을 기대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강팀의 패배는 회자가 되어도, 락스 타이거즈의 부진은 이슈가 되지 않았다. 어제 치러진 bbq 올리버스와의 대결도 락스 타이거즈가 패배할 거란 예상이 많았다.

그런데 '샤이' 박상면과 '미키' 손영민이 날아다녔다. 참 오랜만에 들어본 '디스이즈샤이', '미키갓'이었다.


# 1세트 #
사그라 들지 않았던 승부욕, 2년을 기다린 복수 '디스이즈샤이'


승부욕은 선수를 발전하게 만드는 힘이다. 왜 악착같이 노력하는가? 지기 싫어서다. 그래서 그들은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샤이' 박상면은 2015년 케스파컵 결승전이 기억에 남았나보다. 당시 박상면은 '크레이지' 김재희에게 3세트 내내 챔피언 상성에 상관없이 밀렸었다. 강현종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상면이 bbq 올리버스전 출전을 강력하게 원했다고 말했다. 박상면은 김재희와의 재대결을 원했고 1세트 레넥톤을 통해 멋지게 복수에 성공했다.

선취점이 '샤이' 박상면의 손에서 나왔다. '성환' 윤성환의 앨리스가 상대 정글에 들어가다 카직스와 마주쳤다. 윤성환은 싸우지 말았어야 했다. 상대팀에는 쉔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상면의 합류가 늦은 상황에서 윤성환과 손영민이 얼마남지 않은 체력으로 도주에 성공했다. 그렇게 전투가 소강되려던 찰나, 박상면의 레넥톤이 카직스를 향해 달려들어 선취점을 기록했다. 카직스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황망하게 쓰러졌다.

박상면의 슈퍼플레이는 계속됐다. 박상면의 레넥톤이 성환의 앨리스와 함께 쉔을 향해 다이브를 시도한다. 좀 전 교전으로 레넥톤의 궁극기가 없는 상황. 쉔의 도발에 맞으면 역으로 둘 다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상면은 쉔을 공격해 포탑 어그로를 받은 뒤, e스킬 '자르고 토막내기'로 쉔의 도발을 멋지게 피하며 추가 득점에 성공한다.

락스 타이거즈가 봇 1차 타워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박상면의 레넥톤이 조금 멀리 있는 상황에 bbq 올리버스가 이를 노리고 한타를 열었다. 락스 타이거즈는 상대의 추격을 당하며 대패하는 분위기였다.

박상면의 레넥톤이 상대 진영 뒤에서 홀로 나타난다. 이미 아군은 두 명이나 죽은 상황. 아무리 잘 성장한 레넥톤이라도 상대 5명의 집중사격을 받으면 허무하게 죽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박상면이 교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레넥톤의 궁극기 '강신'을 먼저 사용한다. 이유는 잠시 후에 드러났다. 궁극기를 통해 패시브 '분노'를 가득 채운 레넥톤은 상대 진영 한가운데로 들어가 q스킬 '양떼 도륙'으로 엄청난 광역 피해를 입혔다. 레넥톤에 대한 이해도를 잘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박상면은 승부의 쐐기를 박는 마지막 한타에서도 전세를 뒤집는 활약으로 팀 승리를 견인, 1세트 MVP를 받았다. 락스 타이거즈는 현명한 밴픽 전략으로 '샤이' 박상면에게 활약할 기회를 제공했고, 박상면은 멋지게 보답했다.




# 3세트 #
'미키갓'의 제드, 암살자의 재림을 알리다.


LCK에서 암살자가 활약한 때가 언제였던가? 정말 오랜만에 목격했던 암살자 챔피언의 무서움이었다. 한때는 암살자 챔피언이 대회에서도 주류 챔피언의 위치를 유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리그 수준이 발전하면서 점차 암살자는 그 지위를 잃기 시작했다. 암살자 챔피언에 대한 대처가 좋아지고 암살자가 갖는 위험요소가 더 많이 부담됐기 때문이다.

밴픽 창에서 탈리야를 확인한 락스 타이거즈가 제드를 뽑아들었다. 탈리야는 원거리 견제가 강하지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챔피언에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제드를 사용할 근거가 생겼다. 락스 타이거즈는 쉔까지 가져가 제드의 스플릿 푸시에 힘을 더했다.

손영민의 제드는 무난한 라인전을 보냈다. 초반 '템트' 강명구의 압박에 고전하는 듯 보였지만 레벨이 오르면서 자연스레 위기를 넘겼다. 6레벨을 넘어서자 미드 라인 주도권이 자연스레 손영민에게 돌아갔다. 탈리야는 라인을 마음대로 밀어내고 자유롭게 움직실 수 없었다. 손영민이 아군 정글에 침투상 카직스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제드가 미드 라인 주도권을 꽉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 교전 속에서 잘 성장한 손영민의 제드가 드디어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상대 칼날부리 둥지 근처에서 교전이 열린다. 아군의 포커싱은 상대 카직스에 가 있었다. 손영민은 카직스의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카직스 근처에서 궁극기를 상대 원거리 딜러 진에게 사용한다. 이 플레이로 손영민의 제드는 빈사 상태의 카직스 옆에 그림자를 남기고, 동시에 상대 진에게 접근해 적 두 명에게 동시에 피해를 입혀 잡아냈다.

미드 1차 타워 다이브 상황, 손영민의 제드가 쉔 궁극기에 힘입어 과감한 다이브를 선보인다. 상대팀은 럼블, 탈리야, 미스포츈, 진, 카직스 등 과감한 제드의 움직임을 강제할 스킬이 하나도 있지 않았다. 손영민은 이번 다이브에서 미스포츈과 탈리야를 잡아내고 전사한다. 특히, 탈리야를 잡을 때는 순수 스킬 피해와 패시브 피해로만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후부터 손영민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도 됐다. 화력은 오를 대로 올랐고, 상대 원거리 딜러는 '한 콤보+ 약자멸시'에 그대로 사라졌다. 스플릿 푸시를 해도 막을 사람이 없었다. 상대팀이 할 수 있는 것은 제드를 못 본 척, 안 본 척, 손해 아닌 척하는 것뿐이었다. 손영민은 이 경기에서만 10킬을 기록했다.





IEM 대회를 앞두고 락스 타이거즈는 자신감이 절실했다. bbq 올리버스와의 대결에서 락스 타이거즈는 보다 치밀한 밴픽으로 블루 진영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밴픽 전략도 좋았고, 칼자루를 쥔 선수들의 활약도 눈이 부셨다. 박상면과 손영민든 이날 완벽한 경기력으로 폴란드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줄 것을 암시했다.

팬들이 '샤이' 박상면과 '미키' 손영민의 활약에 반가워했던 건 단순히 예전 모습이 떠올라서는 아닐 것이다. 전성기가 지났다고 평가받는 이들, 예전과 다르게 부진했던 그들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길 바랬고 그 노력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기에, 화면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좋은 경기력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큰 기대를 받지 않았던 락스 타이거즈는 이번 경기로 그들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22일부터 26일까지 4일간 치러지는 이번 IEM 월드 챔피언십을 봐야 하는 이유도 명확해졌다. 손영민은 경기 후 인터뷰를 통해 IEM 월드 챔피언십 결승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후회 없는 경기를 치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락스 타이거즈의 선전을 기대한다. 자신들의 전성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보여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