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未生)은 바둑에서 집이나 대마 등이 살아있지 않은 상태 혹은 그 돌을 이르는 말이다. 완전히 죽은 돌을 뜻하는 사석(死石)과는 달리 미생은 완생할 여지를 남기고 있는 돌을 의미한다. 섬머 시즌 포스트 시즌 진출 여부조차 불투명했던 상황에서 아프리카 프릭스는 기적을 만들며 와일드카드전, 플레이오프 1라운드, 그리고 결승 직행 문턱까지 다가섰다.

그러나 2:2 상황에서 마지막 5세트, 그리핀에게 패배했다. 그리핀을 잡았더라면 본인들의 힘으로 간절하게 바라던 롤드컵 직행 티켓을 손에 넣었겠지만, 결승에서 kt 롤스터가 우승을 차지해도 2시드로 직행할 수 있으며, 만약 그리핀이 우승을 차지해도 선발전 최종전에서 한 번만 승리하면 되는 꽤 유리한 위치에 있다.

현시점에서 아프리카의 여름 이야기는 끝났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완전히 종료된 사석이 아니라 롤드컵 진출 가능성이 꽤 높은, 완생의 여지가 다분한 미생이다.



이번 시즌의 주인공, 우승팀을 가리기 위한 결승전이 남아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포스트 시즌이 재밌던 이유는 아프리카 프릭스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아프리카 프릭스의 정규 시즌, 특히 2라운드는 매우 불안했다. 1라운드처럼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리프트 라이벌즈를 다녀온 뒤로는 컨디션의 문제인지 상황이 더 악화됐다.

리그 막바지에는 한화생명e스포츠와 마지막 5위 자리를 놓고 경쟁했는데, 맞대결에서 패배하며 더욱 불리한 입장에 놓이기도 했다. 자력 진출은 힘들어졌고, 5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제조건들이 아프리카 입맛에 맞아떨어져야만 5위로 포스트 시즌 합류가 가능했다.

결국, 아프리카는 10승 8패라는 성적으로 5위를 차지해 포스트 시즌에 올랐다. 하지만 초미의 관심사는 따로있었다. 1위부터 4위까지 모두 13승 5패 동률로 승점에 따라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가 화두였다. 그만큼 상위권 경쟁이 역대급으로 치열했다. 사실상 아프리카는 가장 밑바닥인 와일드카드전부터 결승 직행인 1위 자리를 두고 경쟁했던 팀을 만나게 된다.

▲ 출처 : OGN 방송 화면


그런데 포스트 시즌에 들어선 아프리카는 완전히 다른 팀이었다. 스프링 시즌 보여줬던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하는 깔끔한 경기 운영을 통해 단단함, 정석의 대명사인 젠지 e스포츠를 상대로 완승했고, 객관적인 전력에서 밀릴 거라는 많은 전문가의 예상과 달리 킹존 드래곤X까지 압도했다.

'기인' 김기인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국가대표 탑인 이유를 증명했고, '스피릿' 이다윤 역시 베테랑 정글러로 '피넛' 한왕호, '타잔' 이승용과 견주어 전혀 밀리지 않았다. '쿠로' 이서행은 주장답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줬다. '투신' 박종익은 서포터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선보였으며, '크레이머' 하종훈은 정규 시즌 '에이밍' 김하람에게 출전 기회를 많이 내줬으나 가장 기량이 상승하며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선수들의 경기력에도 놀랐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웠던 점은 이번 포스트 시즌에 임하는 아프리카 프릭스 선수들, 코칭스태프들의 자세였다. 아프리카 프릭스의 주장 '쿠로' 이서행 방송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10승 8패, 턱걸이로 포스트 시즌에 합류한 팀이다. 잃을 게 별로 없다. 오히려 조급한 쪽은 13승 5패를 기록했음에도 우리와 만나게 되는 팀들이다"라며 부담 없이 자신들의 상황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최연성 감독 역시 "롤드컵을 직행할 가능성이 있더라. 가능성이 있는 것 자체가 기회라고 생각한다. 3전 2선승제뿐만 아니라 5전 3선승제를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잡겠다. 선수단이 이기는 경기는 '당연하다' 생각하고 패배할 때는 상실감이 엄습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는 롤드컵에 대한 기대감과 부담감이 컸다면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있다. 기대감 자체가 선수단을 병들게 하더라.

매 경기가 소중한 기회인 것은 맞지만, 때로는 경기 전의 부담감과 패배에서 오는 상실감이 오히려 선수단의 발목을 잡는 경우도 있더라. 그래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즐거운 경기 한 번 해보자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고 있다"며 "선수들이 나태하고 안일한 모습을 보이면 채찍질을 해야겠지만, 현재는 선수들의 의지가 강하고 많이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전한 바 있다.

아프리카 프릭스 선수들을 봤을 때, 실제로 이번 포스트 시즌을 '꼭 롤드컵에 진출해야만 해'라는 부담감을 느낀다기 보다 매 경기 즐기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만약 아프리카 프릭스가 와일드카드부터 결승까지 올라 우승을 차지하며 1시드로 롤드컵 진출에 성공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시나리오 '도장 깨기'의 주인공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현실은 결승 진출을 앞두고 그리핀과 풀세트까지 이어진 접전 끝에 2:3으로 패배하며,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이번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주인공 못지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멋진 조연. 아프리카 프릭스는 섬머 시즌에서 가장 아름다운 패자이자 멋진 조연이었으며, 섬머 시즌 동안 수고한 선수단의 노고에 박수를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