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나 나루토 등으로 대표되는 21세기 소년 만화들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과 클리셰를 갖고 있다. 주인공은 그 누구도 이루기 어려운 원대한 목표만을 바라보지만, 그 출발은 더없이 초라하고 볼품없다. 그러나 목표를 함께 이룰 소중한 동료들을 찾게 되고, 그들과의 여정 속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성장하며 목표에 한 발자국씩 다가간다.

그리고 주인공은 반드시 고난과 시련을 겪는다. 목표에 근접하면 예기치 못한 문제가 터져 회생 불가능해 보이는 위기에 빠진다. 어쩌면 꿈을 함께 나눴던 소중한 동료 중 몇 명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최악의 역경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은거한 귀인을 만나 수렁을 헤쳐 나오고, 오랜 시간 곁을 지킨 영혼의 짝과 새로운 동료들의 힘으로 시련을 극복한 후 또다시 본인의 꿈을 향한 여행길에 오른다. 이 과정을 목표에 다다를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하며, 결국은 해피 엔딩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이상은 수없이 접했던 뻔한 전개와 스토리지만, 이번엔 이러한 일이 만화가 아닌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당신이 만약 LoL e스포츠 팬이라면 LCK에서 절찬리 연재 중인 소년 만화의 주인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 바로 DRX 김대호 감독이다.


미약한 시작, 연이은 성공 가도

캐릭터의 배경 스토리는 완벽하다. 대한민국 한 기업인의 아들, 하지만 편부모 가정에서의 순탄치 않았던 성장 과정. 아버지는 일찍이 게임에 눈을 뜬 김 감독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흔히 이야기하는 금수저와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아들이 야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길 원했던 아버지의 교육 방식과 철학은 김 감독을 신념을 갖고 본인의 길을 걸을 줄 아는 단단한 인물로 만들었다.


군 전역까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던 김 감독은 LoL에서 본인의 재능을 확신했다. 이에 평범한 일상을 포기하고 개인 방송인과 프로게이머로 생활했고, 중국에도 잠시 다녀왔다. 삶의 갈림길에 놓였던 2017년에는 아프리카TV의 이벤트 매치 '쏠전'에서 우승하며 LoL e스포츠에 계속 뜻을 두기로 한다. 이후 잠재력 있는 팀을 본인이 지도하면 롤드컵 우승까지 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락스 타이거즈와 진에어 그린윙스 코치직에 지원하지만, 두 팀 모두 김 감독에게 불합격을 통보한다. 하지만, 그리핀의 조규남 전 대표가 그를 찾으며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김 감독은 '소드-타잔-래더' 등과 함께 코치로서의 첫 시즌이었던 2017 챌린저스 코리아 섬머 스플릿에서 정규 시즌 3위에 오른다. 바로 전 시즌에서 그리핀의 정규 시즌 성적은 8개 팀 중 7위. 로스터 변경 없이 코치가 할 수 있었던 최대치의 역량을 뽑아낸 결과였다. 이후 그리핀의 감독으로 승격한 그는 휴식 중이던 '리헨즈' 손시우와 아마추어 '바이퍼' 박도현을 그리핀에 불러들였고, 현재진행 중인 목표 '롤드컵 우승'을 외부에 외치기 시작했다.


이후 2018년 3월에는 만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동반자 '쵸비' 정지훈을 영입한다. 기존 선수 '소드-타잔'과 새로 합류한 '쵸비-바이퍼-리헨즈', 그리고 김 감독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상상 이상이었다. 2018 챌린저스 코리아 스프링 스플릿 정규 시즌 전승에 이어 승강전까지 가볍게 통과한 그리핀은 '태풍의 핵'이라는 별명을 얻은 채 LCK 무대에 입성한다.

챌린저스와 승강전에선 압도적이었다지만, 그 경기력이 LCK 상위권 팀들에게도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김 감독과 그리핀은 2018 LCK 섬머 스플릿 정규 시즌을 6연승으로 출발하며 별명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승승장구를 이어간 김 감독은 2019 LCK 섬머 스플릿까지 그리핀에서 정규 시즌 1위 2회, 2위 1회 및 플레이오프 3연속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기록하며 감독으로서의 본인의 능력을 마음껏 뽐냈다.


역사에 기록될 시련과 마주하다

2019년 두 번의 준우승으로 LoL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 진출까지 확정 지은 김 감독은 롤드컵 우승이라는 본인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도전은 부딪히기도 전에 실패로 끝났다. 2019년 9월, 갑작스럽게 그리핀이 김 감독과의 계약 종료를 발표하며 소속 선수들과의 여정이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너무나 뜬금없는 소식에 많은 팬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 감독은 챌린저스 하위권 팀을 1년 만에 LCK로 승격시키고, 2019년엔 롤드컵 진출까지 성공시킨 주역이기 때문이다. 무색무취의 약팀을 단기간만에 매력적인 강팀으로 성장시킨 사람,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며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우정을 나눈 사람, 언제나 롤드컵 우승만을 바라왔던 사람. 그러한 사람을 다른 때도 아닌 롤드컵 개막 직전에, 상세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팀에서 내쫓았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팬들의 의문에 '원인은 성적 부진이었다'는 짤막한 답변만을 전했고, 롤드컵에서 경기를 치르는 그리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을 보냈다. 경기를 마친 '소드' 최성원의 한 영상 인터뷰가 공개되기 전까지 말이다. 그리핀에 대한 응원을 원하지 않는 듯한 '소드'의 발언에 김 감독은 크나큰 상실감과 절망감을 느끼고, LoL e스포츠를 뒤흔드는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김 감독이 본인에게 주어질 불이익을 모조리 감수하며 전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리핀과의 계약 해지 사유는 바로 조규남 전 대표와의 불화였으며, '카나비' 서진혁의 LPL 임대 건과 관련해 부정 행위가 있었다는 것. 이는 미성년자 불공정 계약과 관련해 국회까지 개입하는 초대형 사건으로 번졌고, 끝내 'LCK 프로게이머 표준계약서'를 제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새로 만난 귀인과 동료들


졸지에 내부고발자가 되버린 김 감독을 찾을 팀은 국내엔 없어 보였다. 또한 폭로 과정에서 김 감독은 피드백 중 과격한 언행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했고, LCK 운영위원회에서도 이를 주시하며 감독직 수행 가능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팀이 김 감독 선임을 위해 나섰고, 그는 DRX 최상인 대표가 건넨 손을 잡는다.

김 감독은 DRX 합류 전 최 대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공적 미팅 자리에서 사적 신뢰를 느꼈다고 밝힌 김 감독은 사실상 팀 관리에 전권을 받아 DRX에 입단했다. 문제는 선수진이었다. '데프트' 김혁규를 제외한 기존 1군 선수는 모두 이적을 택한 상황, 그마저도 '데프트'는 이적과 잔류의 기로에 서 있었다.

김 감독은 먼저 '데프트'를 붙잡았다. 프로게이머 생활 8년 차의 노장이지만, 김 감독은 아직 쌩쌩한 '데프트'의 피지컬을 높이 샀다. 김 감독이 그를 회유한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무작정 자신을 믿어 달라고 이야기한 것.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본인의 직감에 이끌린 '데프트'는 DRX에서 김 감독과 함께하기로 결정한다. 어쩌면 '데프트'와 뜻을 함께 하기로 한, '데프트'와 함께 LCK 데뷔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케리아' 류민석의 역할도 컸으리라.

문제는 상체였다. 본인의 손으로 키워낸 최고의 정글러는 LPL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정글은 물론 탑-미드에도 연습생 선수들을 기용해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고민 중인 김 감독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FA 신분을 획득한 '도란' 최현준과 '쵸비'가 김 감독을 따라 DRX에 입단한 것이다. 김 감독이 키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도란'의 합류는 기정사실이었지만, 전 세계 팀들의 고연봉 오퍼를 받고 있던 '쵸비'의 선택은 다소 의외였다.


그러나 '쵸비'는 본인의 결정에 오랜 고민은 필요 없었다고 한다. 프로게이머를 시작할 때부터 그의 목표는 김 감독과 롤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쵸비'는 김 감독을 은사로 여기고 있었고, 그의 앞에서 "이번엔 롤드컵 좀 같이 가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고액의 연봉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는 "돈이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필요한 양이 다른 거다. (거액의) 돈과 앞으로의 내 삶의 가치를 따져봤을 때, 해외보다 DRX에서 활동하는 게 더 가치 있는 것 같다"라며 본인의 가치관을 밝혔다.

한편, 두 선수가 합류하기 전 김 감독은 '카나비'에 이어 또 다른 정글러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그를 불러들였다. 피지컬과 공격성은 확실하지만, 게임 이해도가 부족한 사람. 김 감독이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을 가진 해당 인물은 킨드레드 장인으로 이름을 알린 개인 방송인 홍창현이었다. 그리고, 김 감독의 지도 아래 '표식'이란 닉네임을 달게 된 홍창현은 연습생 생활 약 한 달 만에 DRX의 1군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다.


또다시, 한 걸음 가까이

마침내 주인공은 시련을 넘어 본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귀인과 의리를 지킨 옛 동료들, 앞으로 꿈을 함께 할 새로운 동료들을 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은 예전보다 멀게만 느껴졌다. '롤드컵 우승'이라는 최종 목표에 다가가려면, 가장 먼저 LCK의 쟁쟁한 팀들을 넘어 롤드컵 무대를 밟아야 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신인과 한 명의 신인급 선수가 포함된 DRX의 선발 로스터로는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버거워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또다시 소년 만화의 클리셰가 나온다. 고생을 마치고 새 출발을 나선 주인공에게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김 감독의 짧은 지도 기간에도 불구하고 DRX의 선수들은 극강의 경기력을 뽐내며 2020 LCK 스프링 스플릿 정규 시즌서 14승 4패를 달성한다. 승점 차이로 3위에 머물긴 했지만, 다수의 베테랑이 속한 젠지-T1과 같은 승패를 기록한 것이다. 이어진 플레이오프에선 담원게이밍을 꺾고 T1에게 패하며 새 동료들과의 첫 시즌을 3위로 마무리했다.

이후 최근까지의 스토리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스프링보다 한층 두터워진 호흡과 경기력으로 2020 LCK 섬머 스플릿 정규 시즌 2위 달성. 이후 플레이오프에서 T1이 5위에 머물며 절호의 기회가 주어지고, 젠지와의 롤드컵 진출을 건 한 판 승부를 벌였다. 세트스코어 1:2 열세에서 경기가 중단된 가운데, 약 3시간 만에 재개된 4세트에선 '쵸비'가 맹활약하며 동점을 만들었다.

롤드컵을 건 마지막 한 판이었던 5세트는 가장 치열하게 펼쳐졌다. DRX가 먼저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 젠지가 바다의 드래곤 영혼을 챙기고 한타 대승을 거두며 승부의 행방이 묘연해진 상황. 승패의 기로였던 32분경 바론 한타에서 DRX의 정수가 터져 나왔다. 신인 3인방은 적군의 메인 딜러 '룰러' 박재혁의 칼리스타를 집중 견제했고, '데프트'는 9인 궁극기를 비롯한 완벽한 후방 지원으로 팀원들을 도왔다. '쵸비'는 본인의 손으로 직접 '룰러'의 칼리스타를 쓰러뜨리며 DRX의 극적 승리를 이끌었다.

팀을 롤드컵에 진출시키고도 선수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김 감독은 이제 없다. 지금의 그는 도전조차 못했던 작년의 아쉬움을 넘어 소중한 인연들과 공동의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롤드컵 우승이란 목표를 대중들에게 외친 지 어느덧 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김 감독의 첫 번째 롤드컵 이야기는 과연 어떤 스토리로 진행될까.


어떤 엔딩이든 상관 없다


지금까지의 줄거리를 쭉 나열한 소년 만화의 제목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김 감독의 도전이 완전히 끝나는 날에야 결정될 제목이니까. 물론 결정된 엔딩도 없다. 롤드컵 우승이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면 2회 연속, 3회 연속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길 것이며, 반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만화가 끝나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엔딩으로 끝나든 만화의 가치는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 본 만화는 우리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고, 스토리를 집필하는 작가 없이 김대호라는 인간이 스스로 써 내려가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지도자로서의 그가 보여준 능력과 선수들이 모든 힘을 쏟아내 만든 명승부, 포기하지 않는 도전 정신, 목표를 향한 의지와 신념은 이미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줬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만화가 앞으로의 스토리에 상관없이 향후 몇 년 동안은 계속해서 연재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