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른 다르모어님은 검은 마법사와 만난 적이 있어."

추격 끝에 붙잡힌 멜랑은 연합의 지하감옥 깊숙한 곳에서 육중한 수갑이 채워진채였다.

"그 분께서도 오버시어의 존재를 깨닫고 있었지만 창조주의 이름도, 운명을 벗어날 방법도 모르고 있었지. 검은 마법사를 만나고난 후, 해야할 일을 깨달으신거야."

지그하르트는 구부정하게 의자에 앉아 멜랑을 노려보며 심문을 계속했다.

"그란디스를 만든건 오버시어가 아니야. 오버시어와는 별개의 존재지. 메이플 월드를 만들기 위해 제 몸 희생한 녀석과는 달리 더 강한 존재야. 그란디스를 만들고, 제 멋대로 조종까지 하고 있지."

"조종을 한다고?"

"창조주의 정확한 목적은 몰라. 제른 다르모어님 조차도 명령을 거부할 수 없을 뿐더러 목소리를 들을 뿐, 말을 걸어 본 적은 없으니까. 다만, 그냥 재미로 조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

"그란디스의 창조주는 아직도 녀석을 조종중인가?"

"지금은 아니야. 통제 불가능이 된 건지, 통제를 안하고 무언가 다른 일을 하는 중인지, 방관중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완전히 그 분 스스로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어. 이건 얼마 안된 일이지."

"그래서 네가 메이플 월드에 온 이유가 뭐냐."

이번엔 나인하트가 말을 건냈다.

"운명을 벗어나는 데에 거의 성공한 검은 마법사의 전례를 참고하기 위해서야.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모두 그분에게 보고했어."

"넌 왜 이리 협조적이지?"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던 카이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카이저, 그란디스의 영혼이여.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이미 세상은 모두 그 분 발 아래 있다는 것을. 내가 말을 아낀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이 끝났음이야. 세상의 생명의 처음이 누구의 것이였던, 알파가 누구였던, 오메가는 제른 다르모어님이다! 기뻐하고 경배하며 기꺼이 생명을 바쳐라, 카이저!"

멜랑은 환희의 찬 표정으로 섬뜩한 안광을 뿜으며 카이저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이만 죽어라."

카이저가 커다란 붉은 칼을 높이 쳐들었다.

"카이저. 진정하세요."

카오가 그의 손을 가볍게 쥐자 검을 거두었다.

멜랑은 질끈 감은 눈을 간신히 떳다.

"뭔가 더 있는 거지? 멜랑."

카오가 멜랑의 손에 있는 수갑을 풀어주었다.

지그하르트가 무슨 짓이냐며 나서자 시그너스는 그녀를 막으며 지켜보자는 듯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멜랑은 카오를 보더니 한 숨을 내쉬었다.

"말했듯이 그란디스의 창조주는 오버시어보다 더 강한 존재야. 너희들이 약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란디스의 종족들은 기본적으로 메이플 월드의 생명체보다 더 강한 마력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미 제른 다르모어님은 검은 마법사 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됐다는 거야. 그리고 그 힘은 그란디스를 넘어 디멘션 게이트로 연결된 이곳까지 위협할 수준이야."

"그자의 목표는?"

"더 강해지는 것. 그래서 창조주를 죽여 운명을 벗어나려는 것."

"방법은?"

"그란디스의 모든 생명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것. 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라. 그래서 눈에 들어온 것이 메이플 월드야. 마침 디멘션 게이트로 연결도 돼있겠다. 반발할 초월자도 없겠다. 손쉽지."

감옥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끔찍했던 전쟁을 되풀이 해야하는 것인가?

검은 마법사와는 달리 생명 자체를 빼앗는게 목표라면 더 위험한 싸움이 될 것이 아닌가?

보상도 없는 전쟁을 다시 치뤄야 하는 것인가?

"멜랑. 그 분께서 찾으신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잠재우는 그의 목소리에 카이저는 곧 바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검을 꺼내며 완전한 카이저의 모습으로 변했다.

"매그너스!"

감옥 안의 모든 이들은 꺼낼 수 있는 모든 무기와 강화 마법을 시전해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어떠한 소음이나 징조도 없이 그저 처음부터 이 곳에 있었다는 듯 갑자기 나타난 그는 멜랑의 손목을 잡았다.

"허둥대지 마라. 또 보게 되겠지. 그때 상대해주마."

그리고는 다시 왔을 때 처럼 사라졌다.

"저런 능력은 없었습니다."

카이저가 가장 먼저 침묵을 깼다.

"무언가 새로운 힘을 얻은 거겠죠. 원래 제른 다르모어의 수하였다면서요?"

시그너스는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가올 미래에 망연자실해 하는 이가 대부분이였다.

여제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란디스로 갑시다. 이미 한번 했으니 다시 할 수 있어요. 아니, 전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도와줄거죠? 카이저."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