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취! 으드드드...”

 

 

메리엘은 갓난아이처럼 웅크리고 몸을 벌벌 떨었다. 통제되지 않는 턱의 진동 때문에 이가 부러질 것 같았다.

 

 

이러다 진짜 죽겠어...’

 

 

메리엘은 몸으로 최대한 바람을 막으며 열심히 부싯돌을 쇠에 부딪혔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메리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야,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 붙었다!”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모아놓은 낙엽 더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메리엘은 환호했다.

 

 

휘잉.

 

 

꺄악! 안 돼!”

 

 

그러나 바람이 조금 더 강하게 불자 불씨는 물론이고 낙엽까지 몽땅 날아가 버렸다. 메리엘은 절망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지붕까지 날아가려고 했다. 메리엘은 나뭇가지 뭉치를 애처롭게 붙잡았다.

 

 

메리엘은 비통하게 외쳤다.

 

 

어째서 이런 일이!”

 

 

여관에서 하룻밤 잔 뒤, 아침 일찍 눈을 뜬 메리엘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시장에서 외투 등의 방한용품, 식량, 포션, 지도 등을 구했다.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고 난 뒤, 메리엘은 곧장 길을 나섰다. 마침 날씨도 화창하겠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메리엘은 기세 좋게 마을을 나섰다. 설원과 설산. 둘 다 지도 하나로 길을 찾기에는 난해한 지형이지만 메리엘도 나름 잔뼈가 굵은 모험가였다.

 

 

마을 위치도 기억해 뒀겠다, 지도도 있겠다, 하늘엔 별도 보이겠다. 당연히 방심은 금물이지만, 메리엘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안내인이라도 한 명 고용할걸!”

 

 

이틀째까지는 순조로웠다. 몬스터도 거의 마주치지 않았고, 길도 잘 찾아가고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문제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예상을 벗어나는 법. 사흘째가 되자 화창하던 날씨가 급격하게 나빠지더니 급기야는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변화에 메리엘은 당황했다. 단순히 눈이 내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기 발끝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눈보라였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자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살을 에는 추위는 덤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눈보라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가면 되니까. 메리엘은 적당히 피난처를 만들고 호빵을 오물거렸다. 식어서 조금 딱딱해졌지만 은은한 단맛이 추위를 버틸 힘을 주었다.

 

 

그렇게 또다시 하루가 지났다. 눈보라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메리엘은 콧물을 훌쩍거리며 벌벌 떨었다. 이미 동사가 진행 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

 

 

성스러운 녹색 빛이 메리엘의 몸을 감쌌다. 얼어붙은 몸이 회복되며 활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메리엘은 곧바로 다시 죽어가기 시작했다.

 

 

!”

 

 

벌써 몇 시간째 이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눈보라가 언제 그칠지 모르는 이상 마나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오랜 치유사 생활로 사람이 언제 죽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던 메리엘은 슬슬 숨이 넘어가겠다 싶을 때가 되서야 힐을 시전했다.

 

 

이렇게 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3차 전직까지 하러 와서는 이대로 조난 당해서 죽는거야?

 

 

여기에서 초라하게 죽기 위해 나는 그 많은 노력들을 해 온 거야?

 

 

메리엘의 뺨으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억울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웅크린 채 어서 이 시련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등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더욱 직접적이고 확실한 통증. . 이제 정말 끝인 걸까?

 

 

메리엘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다시 한번 힐을 사용하려 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

 

“...?”

 

 

은빛의 매가 멀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어서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찾았어?”

 

 

-----

 

 

흐어엉... 죽는 줄 알았어...”

 

 

메리엘은 소년이 가져다준 담요를 덮은 채 훌쩍였다.

 

 

매와 함께 나타난 소년은 메리엘을 눈으로 지은 듯한 반구형의 구조물로 안내했다. 신기해하는 메리엘에게 소년은 엘나스 주민들이 만드는 임시 거처라고 설명했다.

 

 

죽다 살아난 메리엘은 소년을 붙잡고 엉엉 울며 연신 감사를 전했다. 쑥스러움과 당황으로 얼굴이 새빨개진 소년은 간신히 메리엘을 떼어내고 담요로 둘둘 말았다.

 

 

에취!”

 

 

물론 메리엘의 상태는 금방 좋아지지는 않았다. 메리엘이 연신 재채기를 하자 소년은 장작을 모아 불을 붙였다.

 

 

메리엘은 깜짝 놀랐다.

 

 

, 불 피워도 괜찮아? 집 녹는 거 아냐?”

 

너무 크게 피우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오히려 이러는 편이 좋아요.”

 

그렇구나. 신기하다...”

 

 

메리엘은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불의 온기를 즐기다, 또다시 재채기했다.

 

 

에취!”

 

, 이것도 드세요.”

 

훌쩍. 고마워.”

 

 

소년은 메리엘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건넸다. 메리엘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친절하다니. 신의 축복이 있기를.”

 

뭘 이 정도 가지고요. 그보다 정말 위험했어요. 벨이 발견하지 못했으면 큰일 났을지도 몰라요.”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자기 이름이 들리자 옆에 앉아 있던 매가 가슴을 쭉 펴고 턱을 치켜들고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내었다.

 

 

!”

 

벨도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메리엘은 벨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소년은 그런 메리엘을 말리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성질 나쁜 녀석이거든요. 물지도 몰라요.”

 

그래? 하지만 이렇게 착한걸.”

 

 

벨은 메리엘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소년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네요. 원래 제 말도 잘 안 듣는데...”

 

내가 마음에 들었나 봐. 그런데 네 말도 잘 안 듣는다고?”

 

. 벨은 제 형이 길들인 녀석이거든요. 형 말고 다른 사람은 별로 안 좋아해요.”

 

그렇구나. , 어쩌면 내가 미인이라서 그런 걸지도?”

 

…….”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은빛 매를 서운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소년의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던진 농담이었건만,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소년은 어색하게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메리엘은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으흠.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 내 이름은 메리엘이야.

 

하셀이라고 불러주세요.”

 

하셀. 멋진 이름이네.”

 

 

메리엘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할게.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 어떤 부탁이든 한 가지 들어줄게! 물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수준이어야겠지만.

 

 

메리엘의 말에 하셀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조난자를 돕는 건 당연한 거예요. 이런 걸로 보답을 받으면 저 아빠한테 혼나요.”

 

에이, 그러지 말고!”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다. 패배한 쪽은 하셀이었다. 메리엘이 물러서지 않자 하셀은 곰곰이 생각하고는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아까 동상이 순식간에 나으셨던 것 같은데...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그거? 마법의 힘이지. 나는 신성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거든. 그 정도는 별거 아냐.”

 

 

메리엘이 스태프를 휘두르자 아름다운 빛과 함께 하셀의 머리 위에 그릇을 든 두 요정이 나타났다. 요정들은 그릇을 기울여 안에 든 성수를 하셀에게 붓고는 반짝거리며 사라졌다.

 

 

으악! 깜짝이야! 뭘 하신 거예요? , 어라?”

 

후후. 어때? 가벼운 축복이야. 활력이 도는 것 같지 않아?”

 

... 그런 것 같아요.”

 

 

하셀은 신기한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거나 팔을 휙휙 돌려보기도 했다.

 

 

신성 마법... 제가 지금 배우기는 힘들겠죠?”

 

가르쳐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아무래도 힘들걸?”

 

역시 그렇겠죠...”

 

 

하셀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잠시 후 하셀이 말했다.

 

 

, 혹시 메리엘 씨는 어디로 가던 중이었어요?”

 

설원의 성지라는 곳으로 가는 중이었어.”

 

 

갑자기 하셀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성지요? 그럼 메리엘 씨도 산에 가던 중이었네요?”

 

그렇지?”

 

그러면 제가 성지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대신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뭘 도와주면 될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그럼.”

 

 

하셀은 웅크려 앉은 채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모닥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 형이 사냥을 나갔는데... 벌써 일주일째 돌아오지 않았어요.”

 

형이라면, 벨의 주인이라는?”

 

. 맞아요.”

 

 

하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멀리 나가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어요. 생각이 바뀌어서 예정보다 늦어진다고 해도, 그랬으면 벨을 시켜서 소식 정도는 보냈을 거예요. 연락도 없이 이렇게 늦는 데다, 벨을 부르지도 않는 걸 보면, 뭔가 사고가 난 것 같아요.”

 

그런...”

 

그래서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 주변을 전부 둘러봤는데... 어디에도 없었어요. 아무래도 산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하셀은 모닥불에서 시선을 거두고 메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랑 달리 산은 나무가 우거져서 벨이 날아다니면서 찾기 어려워요. 그래서... 저랑 같이 형을 찾아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지나친 부탁일지도 모르지만 혹시 형이 다쳤다면 치료까지 부탁드리고 싶어요. 저희 집은 가난해서, 만약 형이 크게 다쳤다면 제가 가진 포션만으로는 치료하기 힘들 것 같아요.“

 

 

하셀은 조심스럽게 메리엘을 바라보았다. 너무 많은 부탁을 하는 것 같아서 혹시 메리엘이 화를 내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메리엘은 어떠한 말도 없이 하셀을 바라보았다.

 

 

하셀은 불안한 표정으로 메리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메리엘은 덮고 있던 담요를 치우고는 천천히 하셀에게 다가갔다. 하셀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 저기... 역시 아무것도... 우왁!”

 

 

메리엘은 그대로 하셀을 와락 안았다. 하셀은 깜짝 놀랐다.

 

 

, 메리엘 씨?”

 

 

하셀은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지만, 메리엘은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셀은 어른스럽구나.”

 

 

하셀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거칠고 변덕스러운 엘나스의 환경을 겪으며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안내를 해주겠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생명의 은인이니 어지간한 부탁은 들어줄 생각이었지만, 이건 오히려 메리엘 쪽에서 부탁하고 싶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형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하셀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메리엘은 하셀에게서 숨길 수 없는 깊은 슬픔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당연했다. 하셀은 어린아이였다. 가족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 정도로 냉정을 유지한다는 건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셀은 어른스러웠다. 메리엘은 그 점이 더 안타까웠다. 메리엘은 하셀의 태도에서 어쩌면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걱정하지 마. 형은 분명 무사할 거야.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가 꼭 치료해 줄게. 나 믿지?”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만난 사람이 하는 말이라 그렇게 안심이 되지는 않았지만, 하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 ...! 그러니까 이제 풀어주세요. 저는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에요...”

 

 

메리엘은 그제야 하셀을 풀어주었다. 하셀은 달아오른 얼굴로 황급히 메리엘에게서 멀어졌다.

 

 

메리엘은 대견하다는 듯 하셀을 바라보았고, 하셀은 메리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또 잠깐 정적이 흐르던 와중.

 

 

꼬르륵.

 

 

기묘한 소리가 좁은 공간 속에서 울려퍼졌다. 하셀은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옮겼다.

 

 

메리엘이 뺨을 붉히며 멋쩍게 말했다.

 

 

아하하... 우선 뭔가 좀 먹을까?”

 

 

하셀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