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가 왜 저러지?”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벨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벨은 똑바로 날지 못하고 절름발이처럼 비틀거리며 날았다.

 

 

공중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벨은, 얼마 가지 못해 한 나무와 부딪히고는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

 

 

두 사람은 다급히 벨이 추락한 장소로 달렸다.

 

 

피요오...”

 

 

그곳에 도착하자, 축 늘어져 낮게 울고 있는 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메리엘은 빠르게 벨의 상태를 확인했다.

 

 

무언가에 꿰뚫린 듯 왼쪽 날개에 구멍이 나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쏟아진 피가 날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제대로 날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인 듯 했다.

 

 

날아가는 속도도 빠르지 않았고, 고도도 높지 않았기에 가벼운 뇌진탕을 제외하면 다행히 추락으로 인한 부상은 심하지 않은 듯했다.

 

 

, 어떤가요...?”

 

 

안절부절못하는 하셀을 향해 메리엘은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크게 다치진 않았네.”

 

 

운이 좋았다. 위치가 조금만 잘못되어 머리나 몸통에 이런 상처가 생겼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친 곳은 날개였고,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만 당장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 정도면 클레릭이 있는 한 생채기나 다름없다. 메리엘은 벨을 단단히 붙들고 힐을 사용했다.

 

 

! 삐약!”

 

 

벨은 버둥거리며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거야.”

 

 

상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졌다. 벨도 어느 순간 통증이 가신 걸 느꼈는지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의 날개를 바라보았다.

 

 

놀란 건 하셀도 마찬가지였다.

 

 

! 대단해요! 이렇게 큰 상처가 이렇게 빨리 아물다니! 최고급 포션으로도 이렇게는 안 될 텐데!”

 

, 포션이랑 비교하면 곤란하지! 그런데 내가 힐 쓰는 거 보여준 적 없었나? 이상하다, 여기 와서 되게 자주 쓴 거 같은데...”

저는 처음 본 것 같아요.”

 

 

감탄하던 하셀은 조심스럽게 벨을 들어 올리고는 목을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이 모자란 참새 같은 녀석아! 어디서 뭘 했길래 이 지경이 된 거야! ? 안 그래도 심란한데 너까지 이럴 거야?”

 

그러다 진짜 죽겠다. 상처는 나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게 해야 해.”

 

그래도 이럴 때 단단히 혼을 내야... 어엇!”

 

삐이익!”

 

 

그 순간, 벨이 격렬히 버둥거리며 하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약이 오른 하셀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고는 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좋아. 오늘 아주 버릇을 단단히 고쳐줄게.”

하셀, 잠깐만.”

 

?”

 

 

벨의 모습은 도망가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벨은 통로를 여는 수정 근처를 맴돌며 다급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삐익! 삐익!”

 

 

하셀도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따라 좀 이상하네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요?”

 

글쎄. 저기에 자리를 잡은 걸 보면 나가자는 뜻인 것 같긴 한데.”

 

혹시 복수해달라는 건 아닐까요? 자길 다치게 한 무언가에게?”

 

 

두 사람은 벨의 의도를 짐작하려 했지만, 말 못 하는 짐승의 속마음을 알 길은 없었다. 그저 통로 옆에서 애타게 울어대니 바깥에 볼 일이 있다고만 예상할 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메리엘이 말했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가까운 느낌이지 않아? 혹시 또 누가 다친 걸까? 그런 거라면 빨리 가봐야겠는걸.”

 

 

순간 하셀은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듯했다. 하셀은 벨의 성격을 잘 알았다. 저래 보여도 벨은 자존심이 강한 편이다. 어디서 얻어맞고 왔다고 대신 때려달라고 부탁할 리가 없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다쳤다고 해서 저렇게 반응할 성격도 아니었다. 메리엘이 쓰러져 있는 것을 봤을 때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벨이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뭘까?

 

 

하셀이 아는 한 벨에게서 저런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크게 다쳐 돌아온 벨, 상처가 낫자마자 안절부절못하며 어딘가로 급히 안내하려는 듯한 모습.

 

 

어쩌면?

 

 

하셀의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

 

? 뭐라고?”

 

가야 해요.”

 

 

메리엘은 순간 흠칫했다. 하셀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셀은 애원하듯 말했다.

 

 

추측일 뿐이지만... 저희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그게 아니면...”

 

 

메리엘은 담담하게 말했다.

 

 

알겠어. 가자.”

 

 

메리엘은 대답 대신 수정에 다가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수정을 건드리자 마법진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메리엘 씨?”

 

 

메리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세한 건 가면서 생각하자. 급한 상황인 것 같으니까.”

 

같이 가주시는 건가요? 하지만...”

 

무슨 소리야. 애초에 그런 약속이었잖아.”

 

 

물론 그런 약속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하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하셀과 메리엘이 했던 약속은 길을 안내해 주는 대신 형이 다쳤을 경우 치료해 주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전투는 최대한 피할 계획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벨이 다쳐서 날아왔다는 건 적어도 얼마 전에 싸움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곳에 간다면 그 적과 마주치게 될 확률이 높았다.

 

 

하셀은 메리엘이 그것까지 감수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메리엘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널 혼자 보내는 것도 좀 그래.”

 

 

하셀은 감동받은 듯한 표정으로 메리엘을 바라보았다.

 

 

통로가 열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은 통로가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밖으로 날아갔다.

 

 

삐요오!”

 

 

하셀과 메리엘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늦기 전에 어서 가자!”

 

!”

 

 

 

-----

 

 

 

시간이 지나자, 벨이 두 사람을 어딘가로 안내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하셀과 메리엘이 아무리 빨라도 하늘을 나는 매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자연스레 조금씩 뒤처지게 되었고, 그때마다 벨은 제자리를 맴돌며 두 사람이 자신을 따라잡기를 기다렸다가, 가까워지면 다시 날아갔다.

 

 

그런 벨을 바라보며 달리던 하셀은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방향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하셀은 당연히 벨이 산맥 안쪽으로 향하리라 생각했다. 벨이 찾아가는 대상이 형이라면 그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정작 벨이 날아가는 쪽은 마을 방향이었다.

 

 

설원의 성지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기에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메리엘의 도움을 받아 그 지긋지긋한 절벽을 다시 한번 건넜다.

 

 

형이 아니었던 건가?’

 

 

형이 아니라면 벨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고, 맞다고 해도 마을 방향으로 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을 쪽에서 왔다면 다친 이유는 무엇일까. 마을 주변의 주니어 예티나 페페 따위가 벨을 그렇게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지금은 그저 벨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밤이 완연했다. 메리엘이 은은한 빛을 피워올려 길을 비췄다. 시험을 치르고 온 직후인데도 여전히 마나에 여유가 있는 듯했다.

 

 

한참을 달려 설원과 설산의 경계 무렵에 다다랐을 즈음, 멀리서 어떤 소음이 들려왔다. 하셀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함 소리,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두워서 어떤 상황인지 보이지는 않았다. 점점 소리가 가까워졌다. 하셀은 석궁에 화살을 걸었다.

 

 

메리엘이 하셀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류하자는 뜻이었다. 하셀도 고갯짓으로 화답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우선 저것부터 해결하고 보자. 그럼 수많은 의문 중 적어도 몇 가지는 알 수 있겠지.

 

 

이내 두 사람은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 도착했다. 달빛 아래에서 서서히 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옅은 푸른빛이 감도는 여성의 형상이었다.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 같은 여인이 쇠사슬이 감겨 있는 거대한 얼음덩어리에 속박된 채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하셀의 눈이 커졌다.

 

 

저건... 설산의 마녀?”

 

설산의 마녀?”


사냥꾼들한테 들어본 적 있어요. 아름다운 여성의 외모를 지닌, 엘나스 산맥의 주인. 허락받지 않은 자가 함부로 사냥을 하면 짙은 눈보라 속에서 나타나 벌을 내린다고 해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저 모습은...”

 

 

하셀은 그리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메리엘은 설산의 마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게 엘나스의 주인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오밤중에 갑자기 그런 엄청난 존재를 마주치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확실히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그 모습은 전설 속 존재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엘리니아 숲의 페어리들도 귀여운 외형을 지녔지만 사람을 해치는 몬스터에 불과하다.

 

 

신비를 탐구하는 마법사로서, 오래된 땅의 전설은 함부로 무시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파헤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은 저것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촤라락!

 

 

마녀가 움직이자 강력한 냉기를 머금은 사슬이 채찍처럼 뻗어져 나갔다. 사슬은 얼음을 깨부수고 땅을 갈아엎으며 누군가를 집요하게 노리고 있었다.

 

 

마녀가 노리는 대상은 활을 든 남자였다. 남자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용케 사슬을 피해내고 있었으나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몸이 꿰뚫릴 것만 같아 보였다.

 

 

삐이익!”

 

 

벨이 길게 포효하며 마녀를 향해 돌진했다. 곡예나 다름없는 비행을 선보이며 쇠사슬 사이를 뚫고 나아간 벨은 마녀를 크게 할퀸 다음 다시 날아올랐다. 메리엘 또한 마법을 준비하며 말했다.

 

 

우선 저 사람부터 구하자.”

 

!”

 

하셀과 메리엘의 머리 위로 반짝이는 물이 부어졌다. 하셀은 곧바로 석궁을 겨누었다.

 

 

사슬과는 다르게 마녀 본체의 움직임은 느린 편이었다. 하셀은 정신을 집중한 다음, 숨을 천천히 내쉬고, 방아쇠를 당겼다.

 

 

피어싱!”

 

 

화살에 마나가 모여들면서 강력한 힘이 응축되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석궁을 떠난 화살은 바람을 찢으며 날아가 마녀의 몸통에 정확히 명중했다.

 

 

까앙!

 

 

치잇...”

 

 

화살은 겨우 작은 흠집 정도를 내고는 힘없이 떨어졌다. 마녀의 몸 또한 단단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한 발 만으로는 별다른 피해를 줄 수 없었다. 하셀은 혀를 차며 다음 화살을 장전했다.

 

 

피해는 미미했으나, 그로 인한 효과는 확실했다. 불의의 일격을 받은 마녀는 새로운 적에게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틈은 피하기에 급급했던 남자에게 반격할 기회를 부여했다.

 

 

스트레이프!”

 

 

시위에 걸린 네 발의 화살이 한 번에 쇄도했다. 이번에는 좀 더 반응이 있었다. 마녀는 주춤거리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이봐! 누군지는 몰라도 고마워!”

 

 

한숨 돌린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하셀은 흠칫 놀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먼 거리와 어둠 탓에 하셀의 뛰어난 시력으로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셀은 남자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했으나, 곧 포기해야 했다.

 

 

피해!”

 

 

남자의 외침에 하셀은 급히 뒤로 뛰었다. 그러자 하셀이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얼음 기둥이 솟아났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헥터 한 마리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하셀을 향해 덤벼들었다. 하셀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뭐야?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마녀를 향해 움직이던 메리엘은 하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하셀!”

 

메리엘 씨! 저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보다는 저쪽을!”

 

 

하셀이 말한 대로, 예상치 못한 헥터의 등장에 놀랐을 뿐 하셀은 그다지 위협을 느끼지는 않는 듯했다. 잠깐 지켜보던 메리엘은 하셀 혼자서도 충분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뒤, 마녀를 향해 달렸다.

 

 

마녀는 또다시 맹렬한 기세로 남자를 몰아치고 있었다. 말도, 표정도 없었지만 메리엘은 마녀에게서 숨이 막힐 것처럼 거세게 타오르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강하다.’

 

 

메리엘은 마녀에게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마력에 몸을 떨었다. 그냥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메리엘은 마녀를 자세히 관찰했다.

 

 

하셀이 분명 설산의 마녀는 허가받지 않은 사냥꾼에게 벌을 내린다고 했지. 그럼 저 사람은 함부로 사냥해서 보복당하는 걸까?’

 

 

그렇다면 마녀의 분노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기는 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메리엘은 마녀를 옭아매고 있던 쇠사슬을 바라보았다.

 

 

사슬은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녀는 그런 사슬을 수족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사슬이 마녀의 무기라도 되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마법사인 메리엘은 느낄 수 있었다.

 

 

메리엘이 보기에 사슬의 기운은 본질적으로 마녀의 기운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마녀에게는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이 틀림없다.

 

 

게다가 점점 그 마력이 강해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이지만 마녀의 움직임도 느려지고 있었다.

 

 

봉인의 일종일 가능성이 높아. 마녀는 저 사슬에 저항하기 위해 무리해서 힘을 쓰고 있어. 얼마 가지 않아서 봉인의 힘이 마녀의 힘을 넘어설 거야.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저 사슬은 마녀에게 정확히 어떤 작용을 하는 거지?’

 

 

그때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봐! 보고만 있을 거야? 좀 도와줘!”

 

흐익!”

 

 

화들짝 놀란 메리엘은 새된 소리를 내었다.

 

 

마녀가 느려지고 있다고는 하나, 남자도 체력이 많이 떨어진 듯했다. 이대로면 얼마 가지 못해 당하고 말 것이다.

 

 

!”

 

 

메리엘은 남자에게 힐을 한 번 사용하고는 말했다.

 

 

,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지금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요!”

 

방법은 무슨 방법! 그냥 같이 싸워달라고! 하여간 마법사들이란... 으악!”

 

 

마녀가 일으킨 얼음 폭풍이 남자의 화살을 날려버리고는 남자까지 덮치려 했다. 남자는 불평을 멈추고 회피에 집중했다.

 

 

치료해 드렸으니 조금 더 버티실 수 있겠지.’

 

 

아무래도 핵심은 저 사슬인 것 같았다. 메리엘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사슬의 마력을 분석했고,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간신히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예상한 대로, 저 사슬은 봉인이야. 마녀의 힘을 억제하고, 한 장소에 속박하는 역할. 그리고 그 장소는 이곳이 아니야. 마녀의 마력이 더 떨어지면 분명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될 거야. 그때를 틈타 도망치면 돼.’

 

 

결론을 내린 메리엘은 지체하지 않고 남자에게 합류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드디어 왔구나, 이런 망할!”

 

남자는 메리엘을 격하게 반겼다. 메리엘은 짧게 말하고는 그대로 마녀를 향해 달렸다.

 

 

지금부터 멈추지 말고 계속 공격해 주세요!”

 

뭐라고? 어어, 뭐 하는 거야?!”

 

 

남자는 당황하며 메리엘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메리엘은 마녀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다. 메리엘은 곧 날아올 마녀의 공격에 대비하려 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마녀는 메리엘을 건드리지 않았다. 마녀는 메리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녀의 분노는 오로지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뭐야! 왜 나만!”

 

 

퍼억!

 

 

결국, 사슬이 남자의 몸통에 명중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튕겨 나간 남자는 빙판을 나뒹굴었다. 메리엘은 비명을 질렀다.

 

 

괜찮으세요?”

 

으윽... 그걸 말이라고...”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마녀가 계속 공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쓰러져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남자는 혀를 차며 다시 회피에 집중했다.

 

 

젠장!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빨리 좀 부탁한다!”

 

 

뼈 따위는 손쉽게 부숴버릴 위력의 일격을 맞고도 남자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메리엘은 남자의 맷집에 놀랐다. 남자는 갑옷조차 입지 않고 있었다. 페리온의 전사라면 모를까, 궁수가 저렇게 튼튼하다니.

 

 

신기하긴 했지만, 메리엘은 곧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메리엘은 마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직접적으로 메리엘을 향하지 않더라도, 넓은 범위로 휘몰아치는 사슬과 각종 마법을 근접한 거리에서 피하며 마녀에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메리엘은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사슬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멀리서 관찰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도저히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그때, 남자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로 인해 마녀의 움직임이 늦춰지며 조금씩 틈이 생겼고, 메리엘은 텔레포트를 사용하며 조금씩 마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간 메리엘은 마녀의 지척까지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거기서 메리엘은 한 번 더 텔레포트를 시전하여 마녀의 뒤를 잡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절반은 성공이나 다름없다. 메리엘은 싱긋 웃고는 손을 뻗으며 외쳤다.

 

 

마나 이터!”

 

……!”

 

 

마녀의 마나가 메리엘에게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녀는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쳤다.

 

 

마나 이터는 어디까지나 보조용 마법이기에, 빼앗을 수 있는 마나는 그리 많지 않다. 타인의 마나를 단기간에 지나치게 많이 빼앗으면 시전자에게도 큰 부담이 가기 떄문이다.

 

 

하지만 그 적은 마나를 빼앗기는 것조차 설산의 마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단순히 마나를 잃는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마나를 통제하는 것에 지장이 생긴 것이 문제였다.

 

 

사슬의 마력에 저항하느라 큰 힘을 쏟는 동시에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그 균형이 메리엘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하자 마녀는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

 

 

마녀는 메리엘을 떼어놓으려 발악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많은 마법진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좋아! 뭘 한 건진 모르겠지만 효과 죽이는데!”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살을 퍼부었다. 타이밍 좋게 헥터를 처리한 하셀, 거기에 더해 벨까지 가세했다.

 

 

세 사람과 한 짐승의 온 힘을 다한 공격이 이어졌다. 이윽고 고고하게 허공을 부유하던 마녀가 얼음덩어리째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으로 치면 무릎을 꿇었다고 할 수 있을 모습이었다.

 

 

메리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마녀는 이미 저항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졌다. 곧 사슬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본래 봉인되었던 장소로 강제로 이동될 것이다.

 

 

좋아, 이제 조금만 더 하면...!’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왜지?”

 

 

메리엘은 하마터면 집중력을 잃고 마나 이터를 꺼트릴 뻔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은 메리엘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려 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환청... 인가? 너무 강력한 마나를 받아들인 탓에 한계가 온 걸지도 몰라. 그래도 조금만 더 힘내야...’

 

 

이곳에 여자는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으니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 메리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메리엘의 생각은 곧바로 부정당했다.

 

 

도대체... ?”

 

 

또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리엘은 흠칫 놀라며 두리번거렸다.

 

 

누구... 세요? 저한테 한 말인가요?”

 

 

메리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짙은 감정을 띠고 있었다. 분노, 공포, 증오, 허망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여자의 목소리에서 담겨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네.”

 

 

심지어 이번에는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척 듣기에도 경건함이 느껴지는 기품 있는 목소리였다.

 

 

메리엘은 미칠 노릇이었다.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도 분명 이 자리에 없던 새로운 목소리였다. 어디서 자꾸 사람들이 나타나는 건지 알 수 없었고,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대화도 너무 뜬금없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 메리엘은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눈앞에 있던 설산의 마녀, 그것의 모습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온몸이 얼음으로 이루어져 마치 정령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설산의 마녀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달라지지 않은 점은, 거대한 얼음에 쇠사슬로 묶여 있다는 것뿐이었다. 메리엘이 마녀의 모습이 바뀐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도 메리엘이 마녀의 뒤, 즉 얼음덩어리의 뒤편에 있었기에 마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설산의 마녀는 저주를 받아 그런 모습이 되었고, 마나 이터가 모종의 작용을 하며 그것이 풀려 원래 모습을 되찾은 건가 하는 황당한 상상이 들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지, 내 목적을 이루기에 자네가 제일 적합했을 뿐이네.”

 

 

메리엘은 고개를 내밀고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프리스트 정복을 입고 있는 노년의 남성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메리엘은 또 한 번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문의 여자와 프리스트,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하셀, , 남자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장소도 바뀌었다. 이곳은 자신이 있던 곳이 아니었다. 설산의 마녀와 전투를 벌이던 곳과는 주변 풍경이 완전히 달랐다.

 

 

어떡하지? , 마나 이터의 부작용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거 아냐?’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크흐흐... 이것이 존경받던 프리스트의 실체인가. 추악하기 그지없구나.”

 

 

나지막이 웃은 여자는 핏발이 선 눈으로 프리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기다리고 있어라. 언젠가, 반드시, 내가 너를 찾아가 복수할 테니.”

 

 

그 원한 서린 저주에, 프리스트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기대하지.”

 

 

프리스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녀를 묶은 사슬이 검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여자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메리엘은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흑마법!’

 

 

의심할 여지 없는 흑마법이다. 그 기이함과 사악함은 도저히 다른 것으로 착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굉장히 복잡하고 정교한 마법이었다. 흑마법인 것을 알면서도 메리엘은 순간 감탄할 뻔했다.

 

 

여자의 절규가 이어졌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메리엘은 소리치며 뛰쳐나갔다.

 

 

그만하세요! 프리스트가 흑마법이라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누구보다 앞장서 사악한 것을 없애야 할 프리스트가 사람을 대상으로 흑마법을 사용했다. 이는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다. 파문은 물론, 처형을 당해도 부족했다.

 

 

그러나 메리엘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프리스트는 메리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런...!’

 

 

메리엘은 분노했으나, 우선은 여자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메리엘은 사슬을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사슬에 손이 닿은 순간, 메리엘의 손은 안개를 통과하는 것처럼 사슬을 지나쳤다.

 

 

이건 또 무슨...?”

 

 

몇 번을 시도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사슬뿐만 아니라, 여자나 얼음, 심지어 프리스트에게도 닿을 수 없었다. 지팡이를 휘둘러 보거나, 마법을 사용해 봐도 변화는 없었다.

 

 

마치 유령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메리엘은 혼란에 빠져 멍하니 눈앞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프리스트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자가 고통스러워할수록, 여자의 비명이 커질수록 그 미소는 짙어졌다. 여자를 내려다보던 프리스트는 이내 짧게 말했다.

 

 

계약하겠다.”

 

 

프리스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압도적인 마력이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메리엘이 감히 어찌하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이었다.

 

 

공포.

 

 

오직 공포 이외에 다른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던 여자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여자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반대로 프리스트는 광인과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검붉은 마력이 메리엘을 덮쳤다. 깊은 바다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압력이 메리엘을 짓눌렀다.

 

 

메리엘은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느꼈고, 곧 세상이 뒤집히는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