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로윈 파티


 “어머나, 준비를 많이 했군요?”
 “와우, 저 냉장고 안이 먹음직스럽다고 느낀 거 처음이에요!”
 “하하, 이거 걸작이로군!”

 냉장고를 열자마자  터져나오는 환호성. 앙겔라 치글러 박사의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번엔 제 차례니까요. 확실하게 준비했죠.”

 아닌 게 아니라 냉장고 안은 풍성한 식재료로 가득 차 있었다. 커다란 생 연어가 두 마리,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각각 한 덩이 씩. 산나물이나 버섯 같은 채소도 한가득 있었고 조개 따위의 어패류도 잔뜩 있었다. 냉장고 앞에 모여 있던 요원들이 두셋씩 뭔가를 의논하더니 각자 식재료를 가지고 음식 만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중의 백미는 단연 토르비욘과 라인하르트였다.

 “연어가 두 마리로군.” 토르비욘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역시 연어는 훈제가 제일이지!”
 “무슨 소리! 연어 스테이크를 먹지 않고 어찌 연어를 먹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연어에 손을 뻗는 토르비욘과 그걸 쳐내는 라인하르트 사이에 불꽃이 일었다. 훈제와 스테이크라는 단어를 서로를 향해 총탄처럼 퍼붓던 그들은, 결국 각각 연어 한 마리씩 들고 요리해오기로 했다. 나머지 사람들을 심사위원으로 해서 누구의 것이 더 맛있나 붙어볼 심산인 것이었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웃고 떠들며 유쾌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축제였다!

 이게 바로 오버워치식 할로윈 파티였다. 제 때 명절을 지키지 못할 일이 많은 그들을 위해 1년에 한 번, 이런 식으로 순서를 정해 돌아가며 파티를 주최하는 것이었다. 주최자가 파티 준비를 맡는 대신 나머지 참가자들은 음식과 뒷정리를 담당할 것. 이게 이 파티의 첫 주최자인 오버워치 부사령관 아나 아마리가 세운 규칙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풍성한 식재료는 그야말로 처음인지라, 아마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슬쩍 앙겔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거 괜찮아? 식재료야 충분하긴 하지만 좀 부담이 심했을 것 같은데……. 보니까 죄다 1등급 식재료뿐이잖아. 연어도 그렇고…저거 양식 연어 아니지? 대체 저런 걸 어떻게 구한 거야?”
 “우와, 아나 씨 대단하시네요. 그런 걸 한눈에 보고 알 수 있으세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 치글러 박사.” 아나가 그녀의 볼을 쿡 찌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어디 유통 쪽으로 지인이라도 있는 거야?”
 “뭐, 지인이라면 지인이죠. 하지만 소개는 못 시켜드려요. 워낙에 부끄러움이 많아야 말이죠.”
 “그런가? 뭐 어쨌든 좋아. 그 지인에게 고맙다고 전해 줘. 덕분에 이번 파티는 볼만하겠는걸. 좋은 식재료, 아깝지 않게 써 줄게. 기대하라고, 앙겔라.”

 아나는 앙겔라의 어깨를 툭툭 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고향인 이집트의 요리를 선보일 계획 같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환호성과 휘파람을 부는 사람들을 제치고, 앙겔라 치글러 박사는 밖에 내놓은 감자를 가져간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왔다. 초저녁의 쌀쌀한 바람이 그녀를 맞이했다. 겨울의 길목에 들어선 밤이었다. 부드러운 입김이 어둠 속으로 스러졌다. 

 그때였다. 두꺼운 코트가 그녀의 어깨에 툭 하고 내려앉았다.

 “그렇게 얇게 입고, 병 고치는 의사가 병에 걸리려고 작정을 하는군.”

 툴툴거리는 남성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앙겔라는 코트 옷깃을 여미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녀는 뒤도 안 보고 그대로 말했다.

 “아나 씨가 고맙다고 전해달래요, 가브리엘.”
 “굳이 한 번 더 말할 필요 없다. 나도 들었어.”
 “정말, 부끄러워 하기는. 솔직하게 당신이 준비했다고 하면 그 환호성도 전부 당신 것인데. 제가 한 거라곤 고작해야 이 아파트로 장소 제공한 것뿐이잖아요.”
 “부끄럽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쓸데없이 주목을 받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런 걸 부끄러워한다고 하는 거예요.”

 앙겔라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았다. 늘 찌푸려 주름진 미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입가는 뭔가 맘에 안 든다는 듯 여느 때처럼 쭉 비틀려 있었다. 하지만 앙겔라는 알았다, 그 인상 뒤로 상냥한 그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의 모습을 위아래로 쭉 훑던 앙겔라의 눈매가 갑자기 찌푸려졌다.

 “내가 그 모자 쓰고 오지 말랬잖아요. 이렇게 잘 차려입고선 무슨 그런 모자를…….”
 “모자 하나 내 맘대로 못 쓰나? 신경 꺼.”

 레예스의 모습은 꽤나 멋졌다. 본디 균형이 잘 잡힌 몸이라 양복의 멋을 몇 배로 내고 있었다. 마치 중세의 귀족 같았다. 딱 하나, 머리에 쓴 검은색 비니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앙겔라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이리 줘요. 두 번 다시 못 쓰게 가위로 잘라버릴 거야.”
 “멀쩡한 모자를 왜? 이 손 치워!”

 하지만 그런 앙겔라의 속도는 레예스에게 장난감 기차만큼이나 느린 속도였다. 그녀의 손은 반도 못가서 그의 손에 덥석 잡혔다.

 “당신이야말로…이익, 치사하게 연약한 여자를 힘으로 제압할 생각이에요?”
 “연약은 무슨, 고작 바퀴벌레 따위에게 총질이나 하는 주제에…….”
 “내가 그때 얘기 꺼내지 말랬죠!”

 앙겔라가 으르렁거리며 버둥거리자 그녀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코트가 휙 하고 떨어졌다. 레예스는 순간 움찔했다. 코트가 벗겨지자 그 밑에 있던 앙겔라의 이브닝 드레스 차림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볼 땐 몰랐는데, 앞에서 보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긴 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려 새 모양의 머리장식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드러난 어깨와 쇄골은 희고 고와서, 꼭 상아로 깎아 만든 조각 같았다. 목덜미에는 멋진 목걸이가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을 고려하면 진짜 보석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가짜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곳 들어간 그녀의 몸을 얇은 은회색 드레스가 감싸고 있었다. 

 ‘코트가 없으면 추울 텐데…….’ 
 “에잇!”

 갈등하던 레예스는, 결국에 눈물을 머금고 허리를 숙여 코트를 주웠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모자를 낚아 챈 앙겔라는 있는 힘을 다해 모자를 멀리 던져버렸다. 모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망연한 표정의 레예스와 개운한 표정의 앙겔라의 얼굴이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속이 시원한가?”
 “네, 너무 시원해요. 코트 주워줘서 고마워요, 가브리엘.”
 “…흥.”

 앙겔라의 눈은 천진하게 반짝였다. 레예스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서,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에서, 유려한 턱선으로 내려갔다. 주책이었다. 가슴이 불쾌하게 두근거렸다. 그게 멋쩍고 부끄러움 때문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춥다, 들어가지.”
 “아직 음식 되려면 좀 시간이 걸려요, 레예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의 손을 잡아 끌더니, 아파트를 내려가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가며 그들을 흘깃 봤다. 

 “넌 음식 준비도 안 하나?”
 “어머, 이 장소랑 식재료 제가 제공했거든요…표면상으로는요. 이 정도 땡땡이는 묵인되겠죠. 게다가…….” 앙겔라가 조금 난처한 듯 머리를 꼬며 말했다. “저 요리 못해요. 정말로요.”
 “못하는 것 없을 것처럼 하더니 의외로군.”
 “맘대로 생각해요.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대체 저 식재료 어디서 구한 거예요? 당신에게 카드 맡기면서 부탁하긴 했지만, 돈은 별로 안 빠져나갔고……. 혹시 당신 돈으로 채운 건 아니죠?”

 앙겔라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새 그들은 인적 드문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리고 앙겔라의 두 손은 주머니에 찔러넣은 그의 왼쪽 팔뚝을 가만히 잡고 있었다. 그런 앙겔라의 걱정 따윈 뭣도 아니라는 것처럼 레예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
 “그럼 얘기 좀 들려줘요, 가브리엘. 나 정말 궁금해요.”

 앙겔라가 조르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그녀의 눈을 다시 봤다. 반짝이고,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저 눈빛. 그는 앙겔라의 눈을 볼 때마다 무언가 마음속에서 녹는 기분이 들었다. 거절이란 선택지는 없었다. 

 “…좀 길어질 수도 있어.”
 “괜찮아요.”

 앙겔라의 즉답에 레예스는 피식 웃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음식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대충 계산하며 입을 열었다.


 하늘이 별들로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