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이 뭐야, 버니?”


하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짓누르며 물었다. 숙소 창문으로 몰래 들어가서 일기장만 빼오는 과정이 꽤나 험난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 긴장되진 않았다. 버니는 아직도 망설이는지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하나는 버니의 다리에 달라붙어 한 번 더 재촉했다.


부탁대로 일기장은 가져왔어. 그러니까 대답해 봐. 아까 말한 울지 마라는 뜻이 뭐야? ?”

, 그게 말이다.

뜸들이지 말고 얼른! 안 좋은 일이야?”


하나의 눈빛에서 초조한 기색이 가득 드러나자, 버니가 드디어 무거운 입을 뗐다. 에코 섞인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나야, 너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니?

? 새삼스럽게.”


뜬금없는 되물음에 하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MEKA 모델 중 하나잖아. 제주 남방 해역에서 출몰한 옴닉들을 부수려고 제작된 무인 조종 로봇 아냐?”

무인…… 조종 로봇이라. 그랬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게 됐다.

?”


그때였다.

난데없이 후방에서 승강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나가 이 지하연구소에 온 이래로 처음 느껴보는 인기척이다. 원체 급작스런 상황이라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하나야, 누군가 온다. 메인 컨트롤러 뒤에 숨어!

, 알았어!”


그제야 하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잘한 스위치와 모니터가 덕지덕지 달린 널찍한 기계 장치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기가 무섭게 지하연구소 바닥에 내려앉은 승강기의 문이 열리고, 얼굴에 자잘한 주름이 잡힌 장성급 장교와 눈에 날이 선 남색 머리의 앳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고개만 빠끔히 내밀어 그들을 관찰했다.


그 장교만은 하나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MEKA나 옴닉에 관련된 뉴스가 보도될 때면 항상 총책임자로서 자주 얼굴을 비치고 인터뷰도 하던 무인조종로봇연대장, 임형석 대령이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청년만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형석은 전투복의 주름을 매만지며 라이더자켓과 면바지 차림의 청년을 버니 앞으로 인도했다. 사복 차림에서부터 알 수 있었지만 그 청년은 군인은 아닌지 머리도 뒷목을 덮을 만큼 길고 걸음걸이 또한 매우 불량했다.


어떻소? 훌륭하지 않소? 내일 열병식부터 타시게 될 기체, MEKA-018이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의기양양한 형석 앞에서 청년은 솔직하게 감정을 토로했다.


최악이군.”

아니, 어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소?”


깜짝 놀라서 다시 묻는 형석. 그럼에도 청년의 태도는 조금도 순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버니를 노려보는 눈매가 더더욱 사나워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모델 넘버링이 018이라고? 애당초 이 MEKA라는 게 자동차 부품처럼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체마다 엄연히 성능 차가 있다면서? 그럼 제작이 이른 기체일수록 성능이 확연히 떨어진다는 뜻 아닌가?”

, 아주 틀린 말은 아니외다만.”

지금까지 제작된 MEKA35. 그렇다면 이 몸더러 겨우 중간 정도의 성능밖에 안 되는 기체에 탑승하라고?”


청년의 오만불손한 태도에도 형석은 발끈하지 않고 철저히 저자세로 일관했다.


하지만 본래 탑승하기로 한 파일럿이 급작스레 사고로 퇴역하는 바람에 난 유일한 자리외다. 양해해주시오.”

더 이상 군 내부에서 파일럿을 충당하기 힘들어서 민간인의 지원을 받는다면, 그만큼 높은 대우를 해줘야할 것 아닌가? 모든 파일럿의 정점에 선 이 몸께서 무슨 짬밥이라도 먹고 싶어서 여기 들어온 줄 아나?”

, 알겠소. 그럼 원하는 대우를 말해보시오.”


그제야 청년은 약간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가장 최신식 모델을 소개시켜주시지 그래. 그나마 개중엔 낫지 않겠나?”

그렇다면 MEKA-035 말이오?”

아니, 댁들이 꽁꽁 숨기고 있는 거. MEKA-036 말이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형석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건 안 될 말이외다! 아직 시험 가동도 안 해본 기체란 말이오.”

그럼 실전에서 시험해보면 되지. 어차피 인공두뇌도 싹 갈아엎어서 깡통이 될 몸들인데, 좀 험하게 굴린다고 외부에서 난리칠 일도 별로 없을 테니까.”


그 말에 하나는 형석보다 더 얼굴빛이 창백해져서 저도 모르게,


흐읍!”

?”


인기척을 감지한 건지, 청년이 하나가 숨어있는 메인 컨트롤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시오?”

누가 여기 있나? 비밀 지하연구소라고 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소? 잘못 들었을 거요.”

그런가.”


다행히 형석과 청년은 관심을 끊었지만, 하나는 컨트롤러 뒤에서 계속 오들오들 떨면서 청년이 내뱉은 충격적인 발언을 되새겨보았다.


인공두뇌를 제거해? 깡통이 돼? 버니가?’


현실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나가 더 고개를 내밀어 버니의 눈치를 살피려는데,


여하튼 알겠소. 그러면 MEKA-036을 보관 중인 연구소로 데려다 드리겠소.”

,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 실전 투입은 얼마간의 검토를 거쳐야할 것이오. 이 점만은 감안해주시오. 내일 있을 열병식에는 참가시켜드리겠소.”


형석과 청년은 몸을 돌려 다시 승강기로 발걸음을 향했다. 곧이어 승강기가 기계음을 내며 지상으로 올라가자, 하나는 허겁지겁 버니 앞으로 뛰어나와서 다급하게 물었다.


버니! 방금 저 사람들이 무슨 말 한 거야? 인공두뇌를 어떻게 해?”

『…….

뭐라고 말 좀 해 봐! 오늘 아침에 한 말이 이거였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버니는 착잡함이 가득 묻어나는 태도로 동체를 살짝 숙였다. 하나는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 다그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왜? 도대체 왜?”

옴닉들이 무인 조종 네트워크를 장악할 위험이 생겨서 그렇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 출격 명령을 거부하고 기능 고장을 일으킨 기체들이 생겨서 말이다. 수뇌부에선 이를 옴닉의 전산 공격으로 인식하고 있고, 우리 인공두뇌 자체의 성능으로는 저항하기 힘들다.


버니는 거기서 잠시 숨을 고르더니,


그래서 아예 인공두뇌에 의존한 무인 조종 네트워크를 포기하고, 파일럿들을 탑승시켜 조종하도록 지침을 변경한 거다. 워낙 급히 결정된 사안이라, 민간 지원자도 받은 거지. 방금 청년도 그 중 한 명이다.

, 그래도 인공두뇌를 제거한다는 건, 죽는 거랑 뭐가 달라?”

제거가 아니다. 스스로 상황을 인지하고, 판단 및 행동하는 능력이 사라지는 거다. 수동적으로 파일럿을 보조하는 역할로 인공두뇌가 개조되는 거야.

결국 네 의지가 사라진다는 말 아냐? 그렇다면,”

이해해다오, 하나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손으로 널 해치게 될 지도 모른다. 나는 옴닉의 침공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로봇 MEKA. 옴닉의 꼭두각시가 되느니 이렇게라도 내 사명을 지켜야 해.

…….”

언제나 용감하고 당당했던 그 모습, 제아무리 힘든 일과 마주하더라도 깨부술 기세로 전진하던 그 태도, 설사 내 자아가 없어지더라도 꼭 지켜야 한다. 알았지, 하나야?

, …….”


그러자 하나의 갈색 눈에서 짜고 투명한 액체가 그렁그렁 맺혔다. 자기도 모르게 숨소리가 가빠지고 동공이 파르르 떨리더니 북받쳐 오르는 비감을 참지 못하고 오열한다.


버니!!!”


버니의 차갑고 딱딱한 다리를 기둥처럼 껴안고 얼굴을 파묻는 하나. 성인의 딱지를 달았지만 아직 소녀티가 팍팍 나는 그녀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지하연구소를 가득 메운다. 버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나를 달랬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으하아아아앙! 으아아아앙!”


그동안 눈물 따윈 모르고 살아왔지만, 이제야 사람들이 왜 우는지 알 것만 같았다.

 


 


기억나니, 하나야? 2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 다시 보니까 알 거 같아.”


하나는 새빨갛게 부어오른 눈두덩을 비비면서 일기장을 넘겼다. 그 첫 페이지에 삐뚤빼뚤한 손 글씨로 쓰인 추억을 시야에 담자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갔다.


처음 여기 이사 왔을 때, 신이 나서 이곳저곳 거닐다가 수풀 속에서 발을 잘못 디뎌 여기 환풍구에 빠졌잖아. 여기가 MEKA를 개발하고 보관하는 지하연구소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때 난 아직 데이터가 입력되기 전이라서, 네가 개발자인 줄로만 알았다.


버니 또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지만 꼭 미소 짓는 것만 같았다.


네가 처음 나를 보고 깜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더구나. 사람의 두뇌를 모사한 신경망이 갖춰져 있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흉내에 지나지 않았기에, ‘놀라다는 감정을 이해하진 못했으니까.

그래도 내가 이건 또 뭐야?’라고 혼잣말을 했을 때, 네가 대답해줘서 안심이 됐어.”


그러자 버니가 기억을 되짚듯이 잠깐 뜸을 들이다가,


‘MEKA-018, 출격 대기 중입니다.’였지, 아마?

맞아. 그게 우리가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어.”


하나는 일기장의 페이지를 넘겼다. 또 다른 소중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버니도 마치 골격이 토끼의 형상을 닮았다고 네가 붙여준 이름이었지.

토끼가 뭐냐고 버니가 그때 물었잖아. ‘귀가 길고 귀여운 동물이라고 하니까, 귀엽다는 게 뭔지 또 물었고. 그때 일일이 설명을 하느라 얼마나 곤혹을 치렀는지 기억나?”

그럼, 기억나고말고. 이해를 하는데 30분이 넘게 걸렸지.


버니는 포신이 달린 팔을 이용해 하나를 들어 올려 자신의 동체 위에 걸터앉게 해줬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를 때, 네가 귀찮아하지 않고 하나씩 가르쳐준 그 모습에서 난 친절함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리고 나와 금방 떨어지기 싫어하는 태도에서 우정을 배웠고, 게임 대회에서 우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행복을 배웠다. 정점에 선 엘리트들이 인공두뇌에 코드를 입력해도 내가 절대 알지 못했을 사람의 마음을, 하나 네 덕에 알게 됐다. 정말 고맙구나.

버니…….”


새삼 슬픔이 복받쳐 올라 목이 메는 하나. 버니는 그런 하나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하나야. 너는 인간이고, 나는 인공두뇌를 장비한 로봇이다. 비록 마음이 통할지라도 그게 완전할 순 없어. 너는 똑같이 인간인 친구들과 어울리는 쪽이 훨씬 좋을 거다.

그런 거 없어.”


하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꼭 쥐었다.


팬들은 우러러보기만 하고, 안티들은 트집 잡아서 헐뜯기 바쁘고, 숙소 생활하느라 학교 친구도 없고, 팀원들은 매번 지기만 한다고 나랑 연습도 안 하려 들고, 감독님은 대단찮은 일로 성만 내시고, 다른 팀에선 틈만 나면 몰래 연락해서 몸값이나 흥정하려 들고, 부모님은 아직도 내 진로를 못마땅해 하시고……. 나랑 똑같은 눈높이에서 친구로서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건 오로지 버니 너뿐인걸.”

하나야.

버니뿐이란 말이야…….”


이제 우는 것도 지쳤는지 하나는 그렇게 말꼬리만 흐리다가 서서히 의식이 옅어졌다. 땅에 떨어지려는 자신을 받아낸 버니의 차갑고 딱딱한 손이 무척이나 편안했다. 마치 요람처럼.

 


 

이거요. 그쪽이 찾던 MEKA-036.”


부산의 사상구 공업지구에 지하에 몰래 위치한 연구소.

임형석 대령의 인도를 받은 라이더자켓 차림의 남색 머리 청년, 대한민국 굴지의 메카 파일럿 한가람은 승강기 문이 좌우로 열리자마자 위용을 드러낸 군청색의 대형 MEKA를 보자 만족스레 미소를 뗬다. 좀 전의 동래구 연구소에 있던 018 모델보다 훨씬 세련된 디자인과 다양한 무장이 인상적이었다. 크기는 018과 비슷해도 위압감이 차원이 다르다.


그래, 좋아. 이 정도는 돼야 탈 맛이 나지.”


가람은 한손으로 턱을 받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이 재빨리 몸을 날려 조종석의 유리를 열고 몸을 그 안에 맡겼다.


가동은 언제부터 되지? 한번 날아보고 싶은데.”

말을 했지 않소. 아직 불완전한 기체라서 시험 가동도 해본 적 없다고. 내일 언론에 공개를 하면서 진행할 열병식 때부터 움직여보시오. 그 이상은 협조할 수 없소.”

이런 젠장.”


가람은 혀를 차면서도 조종석이 부착된 컨트롤러를 이리저리 만져보기 시작했다. 그때, 왕복해서 내려온 승강기에서 부사관 한 명이 급히 내렸다.


충성! 보고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형석이 의아해하며 묻자,


“MEKA-018의 개조를 담당하고 있는 동래구 지하에서 민간인 소녀가 잠든 채로 발견됐습니다!”

뭐야?!”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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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oara.com/literature/view/book_intro.html?book_code=1165894&sl_category=&list_type=normal

조아라에서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