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오버워치 소속의 요원과 결혼했다는 것뿐이었다. 그게 잘못이란 걸 깨닫기 전까지 그녀의 결혼 생활은 적어도 그녀에겐 아름답고 황홀했다. 그녀의 남편인 제라드 라크루아는 오버워치 내에서도 정의롭고 용감한 영웅으로 유명했다. 그녀 또한 그 점에 이끌려 제라드와 한 가정을 꾸렸다. 제라드가 전 세계를 누비느라 바빴지만, 그녀는 남편의 활약상을 지켜보고 응원해주었다.

 아멜리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주방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제라드가 오래간만에 휴가를 내서 아침부터 좋아하는 요리를 해줄 생각이었다. 제라드는 침대에서 일어나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그녀의 등 뒤로 걸어갔다. 제라드가 아멜리를 와락 끌어안았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 그런 장난은 통하지 않는다고요."

 "그거 아쉽네. 난 책 떨어지는 소리에도 놀라던 자기가 더 좋았는데 말이야."

 "당신이랑 지내다 보면 누구라도 담력이 강해질 거에요."

 아멜리가 접시에 크림소스를 곁들인 파스타를 담으면서 말했다. 식탁엔 탐스러운 오렌지가 담겨 있는 광주리와 탄산수가 있었다. 제라드는 텔레비전을 켜면서 탄산수로 입가심을 했다. 뉴스에서 테러 조직인 탈론이 갈수록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제라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

 "당신은 괜찮은 거죠?"

 아멜리가 식탁에 앉으면서 물었다.

 "난 괜찮아. 벌써 몇 달째 눈에 불을 켜고 저놈들을 찾아다니는 중인데 기껏해야 찌꺼기밖에 처리하지 못했어. 성과는 있는데 결정적이지가 않아."

 제라드가 아멜리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사실 괜찮은 상황은 아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탈론이 보낸 암살 요원이 그를 저격하려 했었다. 요원을 곧장 체포해서 심문해봤지만 이미 완전히 세뇌되어 탈론에 조종받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제라드는 탈론과의 전쟁을 지휘하면서 이런 암살 시도를 몇 번이나 겪어왔었다. 물론 아내에겐 늘 비밀이었다. 아멜리가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엔 바가지를 긁히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게 뻔했다.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당신이 영웅인 게 자랑스럽긴 하지만 다치는 건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렇게 휴가도 냈잖아. 당신이 병간호 맡을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제라드가 파스타를 먹으면서 말했다. 그가 아멜리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멜리도 웃으면서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럼 오늘은 집에 계속 있는 거죠?"

 아멜리가 물었다.

 "아마도 그럴 거야. 왜?"
 "이따가 장 보러 나가려고요."
 "같이 가줄까?"

 "아뇨. 저녁에 해먹을 찬거리만 사면 돼요. 당신은 집에서 쉬고 있어요."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게 될 행동이었다.

 아멜리는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햇볕은 따스하게 내리쬐고 서늘한 바람이 이마의 머리칼을 넘기는 포근한 날씨였다. 그녀는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이웃집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가로수를 따라 걸어갔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그녀는 느긋하게 새들을 구경하면서 제라드에게 해줄 요리를 궁리했다.

 "분위기를 잘 잡아야 할 텐데…포도주를 고급스러운 걸로 사볼까?"

 아멜리는 가로수 옆에서 검은색 밴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 그녀가 운전을 난폭하게 한다고 생각할 무렵에 밴이 그녀의 옆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면서 검은색 장갑을 낀 손들이 그녀의 손과 허리를 잡고 밴 안으로 끌어당겼다. 밴의 문이 닫히면서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서운 속도로 길에서 빠져나갔다. 아멜리는 입에 손수건이 닿은 뒤부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멜리가 깨어났을 때 그녀의 손은 케이블 타이로 묶여 있고 입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밴의 창문 밖으로 짙은 어둠이 보였다. 그녀의 곁엔 야시경이 달린 헤드기어를 쓴 군인들이 앉아 있었다. 한 군인이 그녀가 일어난 걸 보고 다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다른 군인이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면서 말했다.

 "바로 작업을 시작할 테니까 더 재울 필요는 없어."

 아멜리는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밴이 지하로 내려갔다. 창밖에서 환한 조명이 새어 들어왔다. 군인들이 문을 열고 소총으로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밴 밖에선 흰 가운을 입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의사들이 차트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가라."

 군인이 아멜리에게 말했다. 아멜리는 얌전히 의사들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 일정 간격으로 똑같은 복장의 군인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복장을 보고 자신이 탈론에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의사들은 그녀를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은 흰색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방 한가운데 있는 십자 모양의 수술대 주변으로 각종 전자 기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천장엔 희미한 불빛의 형광등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 의사가 그녀의 팔목에 주사를 놓았다. 주사액을 타고 그녀의 몸속에 나노 로봇들이 심어졌다. 수술대 옆의 화면이 켜지면서 그녀의 뇌와 몸 상태가 나타났다.

 군인들은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소총으로 수술대를 가리켰다. 아멜리는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수술대 위에 누웠다. 양쪽 손목과 발목이 단단히 구속되고 머리에 헤드기어가 씌워졌다. 의사가 헤드기어를 조작해 가상 현실 체험용 고글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의사들이 그녀의 곁에 앉아 주사기로 여러 가지 약물을 주입하고 가상 현실 시스템을 조작했다.

 아멜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처음엔 눈이 가려진 줄 알았지만 온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그녀의 몸은 우주 공간에 있는 것처럼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팔을 휘저어봐도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가늠할 수 없는 커다란 어둠 속에 감금되었다. 가상이란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공포가 밀려들었다.

 "누구 없어요?"

 그녀가 외쳤지만,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바짝 마르고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왜 저를 납치한 거죠? 저한테 뭘 원하시는 거예요?"

 이번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바닥을 찾기 위해 발밑을 향해 수영하듯이 팔을 내저었다.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 데도 나아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감아봐도 눈을 떴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애졌지만 의식만은 또렷했다. 매초, 매분이 흘러가는 걸 시계처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딘지도 모를 방향으로 울고 애원하고 비명을 질러봤지만, 영원할 것 같은 어둠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아멜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몸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거대한 납덩어리가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가상의 몸은 땀으로 흥건해지고 목이 타들어 가는 갈증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마저 기괴하게 갈라졌다. 그녀는 아무거나 보고 싶어서 눈을 비비고 발밑으로 침을 뱉기도 했다. 그러나 물방울이 튀는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삼천육백 초가 흐르는 매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시간을 알리는 일 초가 지나갔다.

 스물네 시간이 지났다. 아멜리가 눈을 뜨자 그녀에게 형광등 불빛이 보였다. 그녀는 곧장 입에 거품을 물고 미친 듯이 몸부림치면서 자신의 혀를 깨물려고 했다. 의사들은 무덤덤한 얼굴로 차트에 결과를 적고 나서 나노 로봇들을 작동시켰다. 로봇들이 몸에 전류를 흘려보내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녀는 눈이 뒤집힌 채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한 의사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1일차 작업 종료. 대상은 아직 멀쩡함."

 "그럼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다른 의사가 기기를 조작하면서 말했다. 아멜리는 그토록 갈망하던 빛을 눈앞에서 다시 잃었다.

 아멜리는 어둠을 보기가 두려워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한쪽 눈을 뜨자 다행히도 빛이 보였다. 그러나 이번엔 너무나 뜨거운 빛이었다. 그녀는 황량한 사막 한복판에 홀로 서 있었다. 낙타 혹처럼 솟아 있는 무수히 많은 모래 언덕과 쨍쨍하게 빛나는 태양이 전부였다. 그녀가 어둠에 있었을 때부터 줄곧 느껴오던 끔찍한 갈증은 여전했다.

 아멜리는 별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언덕을 넘으면 새로운 언덕이 나오고 그녀의 목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녀는 신맛이 나는 침을 뱉을 때마다 피를 토하는 기분을 느꼈다. 작열하는 태양이 살인 광선처럼 그녀의 몸을 공격했다. 아멜리는 온몸이 불에 달군 쇳덩어리처럼 시뻘게진 뒤에야 걷는 걸 포기하고 드러누웠다. 그녀는 적어도 빛은 봤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멜리의 몸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눈을 뜨니 이번엔 바다 한복판에 빠져 있었다. 튜브가 없는데도 몸이 유리병처럼 물 위에 떠올랐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물을 들이켰다가 헛구역질을 했다. 바싹 마른 혀에 소금기가 돌았다.

 "이번엔 죽을 때까지 헤엄쳐야 하는 건가?"

 아멜리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물속에 고개를 파묻고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물속에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다시 물 위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햇빛 아래에서 날카로운 지느러미가 거센 물살을 일으키며 자기에게 달려드는 걸 보았다. 아멜리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헤엄을 쳐봤지만, 지느러미가 어느새 그녀를 앞질러버렸다. 물속에서 무시무시한 백상아리가 그녀의 머리를 향해 입을 쩍벌렸다. 톱날 같은 이빨들이 분쇄기처럼 그녀를 갈아버렸다.

 아멜리는 이제 눈을 뜨는 게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이 퍼졌을 땐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회색 벽의 고문실에 갇혀 있었다. 그녀의 발은 족쇄로 묶여 있고 모든 손가락이 밧줄로 꽁꽁 묶여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앞엔 알몸에다가 가면만 쓴 남자가 망치와 말뚝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남자는 아멜리의 손을 몇 번 쓰다듬고는 말뚝을 손가락 사이에 겨누었다.

 아멜리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도금된 물소 모양의 틀에 갇혀 있었다. 물소의 배 아래에서 불이 붙었다.

 아멜리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알몸으로 냉돌처럼 바닥이 차디찬 방에 갇혀 있었다. 벽에서 차가운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머리 위의 살수기에서 물이 쏟아졌다.

 아멜리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관처럼 생긴 상자 안에 묶여 있었다. 바깥에서 쇠못이 촘촘히 박힌 뚜껑이 닫혔다.

 아멜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눈을 몇 번이나 떴는지 세는 걸 포기했다.

 아멜리는 용광로에 빠진 뒤에야 현실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재갈은 풀려 있었다. 그녀는 이번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울기만 했다. 의사들의 전기 요법은 여전히 효과가 있었다. 의사들은 아멜리의 뇌파를 확인하면서 차트를 기록했다. 한 의사가 말했다.

 "2일차 작업 종료. 대상은 아직 멀쩡함."

 "약물 잔량 확인하고 바로 넘어가."

 아멜리의 귓속에서 의사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녀가 눈을 떴지만,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엔 수갑이나 족쇄가 아니었다. 그녀의 몸보다 몇 배는 큰 거미줄 한가운데에 사지가 실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여덟 개의 다리와 눈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아멜리가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쳐봤지만 헛수고였다. 거미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 실을 내뿜었다. 거미는 아멜리를 고치로 둘러싼 다음 그녀의 배에 독니를 꽂았다.

 아멜리는 이번에도 강제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독침이 그녀의 얼굴을 예리한 칼처럼 찔러댔다. 수많은 꿀벌이 윙윙거리면서 그녀의 몸을 감싸버렸다.

 모기떼가 그녀를 미라로 만들기도 하고 메뚜기에 의해 온몸이 종이처럼 갉아 먹히기도 했다. 아멜리는 이름을 알기는커녕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벌레들에게 깔리고 쏘이고 찢기고 삼켜졌다. 그녀는 자기 몸이 사람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걸 포기하려고 했지만, 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정신은 더할 나위 없이 피폐해졌지만, 어느 때보다 밝고 명확하기도 했다. 그녀는 위협이 들이닥칠 때마다 이전에 거쳤던 과정들을 선명하게 떠올리고 새것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이번엔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에서 전류가 흐르자 처음 몇 초간은 고통을 참으면서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입에서 가녀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발…차라리 절 죽여주세요. 제발…."

 아멜리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면서 말했다. 의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다시 감겨버렸다.

 아멜리는 공중에 떠 있는 유리관 속에 갇혀 있었다. 유리관 밑으로 가장 처음에 보았던 사막이 펼쳐졌다. 태양은 맹렬하게 타올랐지만, 그녀에겐 그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목구멍은 여전히 갈라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홀로 사막을 걷고 있었다. 유리관이 저절로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멜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경을 헤매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이게 가상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봤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녀는 손톱이 빠지도록 유리관을 마구 긁어대고 눈물을 쏟아내면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주변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빛이 보였다. 바다에서 보았던 그 햇빛이었다. 아멜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물 위에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지느러미가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걸 보았고 백상아리가 입을 벌리는 것도 보았으며 뼈가 오도독거리며 씹히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멜리가 거쳤던 죽음의 순간들이 이제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이 대신 겪게 되었다. 그녀의 부모님, 가까운 친척, 절친했던 친구와 은사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차례차례 고통받았다.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방법으로 죽어가는 가운데 제라드만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아멜리가 눈을 떴다. 수술대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동안에 물방울이 미간에 떨어졌다. 그녀는 혓바닥을 내밀고 고개를 비틀면서 물을 받아먹으려 해보았다. 그러나 물방울은 오직 한 곳만을 노렸다. 아멜리는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이마가 바위처럼 깎여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만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처음엔 간지러운 수준이던 물방울이 나중엔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멜리는 물방울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그 느낌은 각각 어땠는지를 전부 기억했으며 마지막 몇 시간은 머리에 총알을 맞는 고통 속에서 견뎌냈다.

 아멜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목이 탔지만 당장은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눈물을 흘리거나 누군가에게 호소할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눈이 강제로 떠졌다. 의사들이 그녀의 눈에 빛을 비추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작업 종료."

  한 의사가 말했다. 의사들은 서로 차트를 돌려본 다음에 아멜리를 홀로 방 안에 남겨놓고 나가버렸다. 아멜리의 팔목으로 약물이 주입되면서 닷새 만에 현실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아멜리는 꿈속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었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발한 울타리 안에서 서늘한 바람을 타고 진한 꿀 냄새가 퍼져 나갔다. 샛노란 민들레로 뒤덮인 평원에서 나비들이 날아올라 그녀의 몸을 옷처럼 감싸주었다. 그녀는 백조들이 떠다니는 호수에서 원 없이 물을 들이켰다. 그녀의 기억에 잠재되어 있던 상처들이 고쳐지고 몸에서 새 생명이 돋아나는 듯했다. 아멜리는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해준 탈론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 고통을 준 것도 그들이었다는 사실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아멜리가 평온 속에서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허공에서 한 줄기의 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 빛이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할 것만 같았다. 빛에서 위엄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멜리 라크루아, 들리는가?"
 "들립니다."

 아멜리가 빛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우리가 널 원죄의 고통 속에서 구해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가?"

 "탈론입니다."

 "우리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네 죄와 고통을 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뇨,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제 목숨을 당신들에게 바쳐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다."

 아멜리는 무릎을 꿇고 빛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리는 그 어떠한 지시도 따를 수 있겠나? 탈론의 밑에서 사람을 죽이는 명령도 받아들이겠나?"

 "물론입니다."

 "그 대상이 네 남편인 제라드 라크루아라고 해도 괜찮겠나?"

 아멜리는 남편의 이름을 듣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탈론의 은혜에 고마운 마음은 없어지고 혼란과 공포만이 남았다.

 "그이는 죽일 수 없습니다."
 그녀가 몸을 떨면서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가엾은 아멜리, 넌 아직 진실을 모르고 있다. 네 남편은 학살자에 인간말종이다. 우리가 지금부터 네게 진실을 보여주겠다."

 환한 빛이 아멜리의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지독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사방에서 연기가 솟구치는 거리 한복판에 총을 든 채로 서 있었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려고 했지만,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뜻에 상관없이 몸이 움직였다. 아멜리는 그 몸이 제라드의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남편의 마음속에서 피에 굶주린 야수가 미쳐 날뛰는 걸 느꼈다.

 제라드는 충혈된 눈으로 건물의 잔해들을 이 잡듯이 헤집고 있었다. 이미 숯덩어리가 된 시체를 거리낌 없이 짓밟고 유골을 축구공처럼 걷어차기도 했다. 그는 거의 다 허물어진 단독 주택의 문을 열려고 했다. 문이 잠긴 걸 확인한 뒤엔 개머리판으로 문고리를 부숴버렸다. 방구석에서 겁에 질린 여인이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떠는 게 보였다.

 "돈이라면 다 드릴 테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여인이 제라드에게 돈다발을 내밀면서 말했다. 제라드는 코웃음을 치면서 여인의 미간에 탄환을 박아넣었다. 아멜리는 벽에 여인의 피와 뇌수가 튀는 걸 보았다. 그리고 남편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도 느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제라드가 여러 전장에서 여러 사람을 의미 없이 죽이고 기뻐하는 걸 지켜보았다. 고문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모든 게 진짜처럼 여겨졌다.

 "이래도 네 남편이 사람 같나?"

 다시 빛이 들어오면서 남자가 말했다.

 "네 남편은 네게 정의를 구현한다고 말하면서 뒤로는 온갖 추악한 짓을 벌여온 쓰레기다. 그런 놈은 하루빨리 세상에서 사라져야 해. 우리가 네게 그 신성한 의무를 맡기겠다. 네가 의무를 완수하는 순간 넌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다."

 "저는…저는…."

 아멜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저는…그래도…그이를…차마…."

 남자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커졌다.

 "그만! 그런 악인조차 처리하지 못하면서 우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거냐? 네 남편은 네게도 똑같은 짓을 할 인물이다. 네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언젠가 벌어질 일을 보여주겠다. 그리고 이번엔 너 스스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

 빛이 사라졌다. 아멜리는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수술대가 있던 자리엔 침대가 있고 그 옆의 간이서랍장 위에 스탠드와 단검이 놓여 있었다. 아멜리는 침대에 주저앉아 문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제라드가 들어왔다. 제라드의 손엔 서랍장에 있는 것과 똑같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제라드!"

 아멜리가 외치면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제라드는 벌레를 본 듯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한 손으로 아멜리를 밀쳐냈다. 그녀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 제라드를 올려다보았다.

 "여보…?"

 "누가 네 여보야?"

 제라드가 그녀에게 침을 뱉으면서 말했다.

 "이 추잡하고 더러운 년. 내가 그동안 참으면서 사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내가 어쩌다 결혼 같은 멍청한 짓을 했을까.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해지겠군."

 제라드는 단검을 꽉 쥐고 아멜리에게 다가갔다. 아멜리는 침대 밑으로 기어가려다가 제라드에게 발목을 붙잡혔다. 칼날이 발목을 후벼 파면서 제라드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아멜리가 비명을 지르면서 손을 내저었다.

 "여보…이러지 말아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예요?"
 "넌 살아있는 게 잘못이야."

 제라드가 아멜리를 끌어냈다. 아멜리는 광기에 물든 그의 눈빛을 마주 보았다.

 "빨리 끝내주진 않을 거야, 자기.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제라드가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면서 말했다. 단검이 연달아 내리꽂혔다.

 제라드는 두 번째에 전기톱을 들고 들어왔다.

 제라드는 일곱 번째에 쇠지레를 들고 들어왔다.

 제라드는 열여섯 번째에 손도끼를 들고 들어왔다.

 제라드는 스물두 번째에 전기충격기를 들고 들어왔다.

 제라드는 스물여섯 번째에 커다란 망치를 어깨에 짊어지고 들어왔다. 아멜리는 숨을 몰아쉬면서 서랍장 위에 있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제라드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런 장난감 같은 걸로 뭘 하겠다는 거야, 자기?"

 제라드가 망치를 휘두르면서 물었다. 아멜리가 고개를 숙이자 벽이 부서지면서 방안이 흔들렸다. 그녀는 제라드의 배 밑으로 파고들면서 단검으로 찌르려 했다. 제라드가 곧장 망치를 빼내 바닥을 내리쳤다. 아멜리는 아슬아슬하게 망치를 피해내면서 제라드의 왼쪽 무릎을 찔렀다. 제라드가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망치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아멜리는 오른팔이 부러졌지만 이를 악물고 제라드의 배를 있는 힘껏 찌른 다음 갈라버렸다. 제라드는 배를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손 사이로 내장이 비적비적 흘러나왔다. 제라드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아멜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기, 내가 잘못했어. 제발 용서해줘."

 "으아아아아!"

 아멜리는 맹수처럼 포효하면서 뒤틀린 오른팔로 제라드의 정수리에 단검을 쑤셔박았다. 그녀는 제라드의 눈을 몇 번이나 더 찌르고 나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제라드는 단검을 들고 들어왔다.

 아멜리는 망설임없이 단검을 집어들었다.

 아멜리가 제라드를 스물여섯 번째 처치하고 나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손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제라드는 침대에 누워있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그는 아멜리를 보고 싱긋 웃었다가 권총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 총은 왜 들고 있어?"

 아멜리는 제라드의 머리를 조준하고 권총에서 빈 소리가 날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스물다섯 명을 더 죽인 뒤에야 다시 빛이 들어왔다.

 "이제 네 의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었나?"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언제든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아멜리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가서 우리의 지시를 기다려라. 네 적이 방심하는 최적의 순간을 노려라. 제라드가 자상한 남편의 가면을 쓰고 널 대했듯이 너 또한 상냥한 아내의 가면을 쓰고 있거라. 증오를 억누르고 인내할수록 더 보람찬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널 다시 부를 것이다."

 아멜리가 고개를 숙여 응답했다. 그녀의 눈이 감겼다.

 아멜리는 집 근처의 병원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병실에서 검사를 받으면서 제라드를 기다렸다. 당연히 외상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의사들의 정신감정에도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제라드는 그녀의 소식을 듣고 모든 일을 팽개치고 달려와 주었다. 제라드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아멜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멜리, 무사해서 다행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멜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제라드의 뒷덜미를 매만졌다.

 "이제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으니 금방 집에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녀가 가면을 썼다.

 아멜리는 며칠 만에 퇴원했다. 그녀는 경찰에게 자신이 테러 조직에 납치됐었으나 자기를 가둬놓기만 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고 다양한 수단으로 그녀를 검사해봤지만, 약물 반응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제라드는 아멜리의 말을 믿어주었다. 그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보금자리에 돌아온 것에 만족했다. 아멜리 또한 제라드의 애정에 보답해주었다. 함께 좋아하는 요리를 먹고 한 침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고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남편과 이웃들은 이전보다 더 밝아진 그녀의 미소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엔 사악한 증오가 숨겨져 있었다.

 아멜리가 탈론에서 빠져나온지 이 주일이 지났다. 그녀는 식탁에 앉아 달빛을 감상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흐린 하늘인데도 달빛만은 어두운 방 안을 노랗게 물들였다. 아멜리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멜리, 때가 되었다."

 아멜리는 탈론이 철저한 건지 경찰이 허술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들린 목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겐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상관은 없었다. 아멜리는 부엌에서 식칼을 빼 들었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고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제라드는 스탠드의 불빛 아래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아멜리는 제라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감긴 눈 속에서 피로 얼룩진 광기가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제라드의 몸 위에 올라탄 다음 양손으로 식칼을 꽉 붙잡고 그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제라드가 눈을 부릅떴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눈이 풀리면서 눈자위가 뒤집어졌다. 입 모양으로 아멜리를 부르는 듯했지만,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멜리는 피 묻은 단검을 내팽개치고 침대보로 제라드의 얼굴을 덮었다.

 아멜리는 옷을 차려입고 제라드의 승용차에 탑승했다. 그녀는 달빛을 받으면서 도로를 질주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탈론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가 떠올랐다.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너라, 아멜리. 거짓된 장막이 들춰지고 새로운 삶이 널 기다리고 있다."

 "탈론의 적에게…죽음을…."

 아멜리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