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음악: https://youtu.be/aTi9czvLa-4


젠야타 이야기 - 1화


눈보라가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가루들이 땅, 하늘 가릴 것 없이 매섭게 내리쳤다.
사람이라면 피부가 구멍나고 뼈가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옴닉이라면
달랐다. 동력원이 얼지 않도록 더 많은 에너지가 사용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추위와 더위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한 옴닉이 머리에 희미한 빛을 발하며 어두운
하얀 바다를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온몸에는 이미 하얀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고
이마의 9개의 불빛만이 열을 내며 밝게 빛났다.

아직 해가 저물 시간도 아니었지만 구름과 안개와 눈에 막혀 사방은 눈의 흰색이
흰색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거리의 가로등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사방을 제대로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젠야타는 자신이 어디를 향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젠야타가 발자국 없이 한참을 이동했을 때쯤, 회색이던 하늘은 완전히 우주의 색과
같아졌다. 젠야타는 자신의 목을 둘러싼 9개의 철제 구슬에서 같은 구슬 모양의 노란
불빛을 뽑아냈다. 불빛은 작은 태양처럼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고 그를 뒤덮은 눈을
털어내주었다. 꽁꽁 언 바다와 금간 도로, 이전에 어떤 건물이었는지 알 수 없는
폐허들 외에도 다른 것들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광선에 녹은 옴닉 시체.
구멍난 인간의 두개골과 그 옆에 놓인 부서진 방탄모. 그것들은 모두 그의 마음
한구석을 쿡쿡 찔렀다.

그는 옴닉 시체로 다가갔다. 그의 머리 옆에서 천천히 공명하던 노란 불빛이
그의 손을 따라 옴닉의 시체로 이동했다. 불빛은 노란 빛줄기를 뿜어내어 시체에
덮인 눈을 치워냈고 주황색의 외갑에 새겨진 깊은 골을 드러냈다. 그의 손은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다 이내 시체의 머리를 향했다. 그는 시체의 회로에 대해
알아내길 원했다. 그가 머리의 판짝을 한 면 때어내자 시체의 눈에 붉은 빛이
들어오면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는 깜짝 놀라며 판짝을 다시 붙여주었다.
다시 깨어난 옴닉 병사는 왼쪽으로 구부정하게 휜 자세로 일어나더니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병사가 어슷한 원을 그리며 고개를 다 돌릴 때쯤 그의 오른팔에 달린 기관단총이
장전하는 소리를 내었다. 젠야타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의 기관단총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어린 인간 소녀가 있었다. 젠야타는 즉시 병사의 온 몸에
새로운 에너지를 흐르게 한 노란 불빛을 거둬들이고 자신의 철제 구슬에서
푸른색 힘을 발사했다. 병사는 머리가 부서지고 배 부근의 깊은 골이 뚫리며
완전한 시체로 돌아갔다.

큰 원으로 벌어진 구슬들을 다시 목에 모으며 젠야타는 병사가 사격하려 했던
인간 소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소녀는 새총을 두손으로 욺켜쥔 채 매우 놀란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소녀의 새총을 보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위를 둘러봤다.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일전의 발포 소리에 놀라 도망가고 있었다.
그때 한 중년의 여자가 소녀를 급하게 도망가듯 데려갔다. 젠야타는 마음을
고르며 다시 야밤의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젠야타가 목적지를 향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옴닉 시체들이 즐비했다. 모두
전투형으로 설계된 기종이었고 손으로 눈을 쓸어보면 주황색의 외갑을 두르고
있었다. 시체들의 위로는 점점 어느정도 형태를 유지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마치 이전에 살아있는 기계였던 양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일전의 옴닉
시체처럼 새로운 연료가 들어오면 다시 작동할 것만 같았다.

젠야타가 안쓰럽고도 두려운 마음을 가지며 그것들을 지나치자 그의 앞에 마침내
그가 향하던 곳이 나타났다. 새까맣게 어두운 거대한 철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의 입구에는 온통 하얀 눈이 덮여 있었지만 그 속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이
있었다. 젠야타는 그것이 흡사 거대한 입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떠오르는 두려움을
없애려 노력하며 그는 거대한 입 안으로 발을 들였다.

노란 빛이 비추는 동굴의 모습은 멀리서 보았을 때처럼 새까맸다. 거대한 폭발에
휩쓸린 흔적이 동굴 전체에 뒤덮인 재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동굴의 모든 부분은
강철이었다. 이전의 온전한 형태를 갖춘 사물이라곤 몇몇의 벽과 문, 전등을
제외하면 남아있지 않았지만, 사방팔방에 늘어진 각종 잔해들은 이곳이 이전에 철로
이루어진 존재를 생산해내던 공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젠야타는 허물어진 벽과
기계 장치들을 지나며 동굴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찌그러진 형태의 수많은 직사각형들을 지나가자 아득히 높은 천장 위에 동굴의 핵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의 작은 행성 같은 거대한 핵은 이곳을 지나간 폭발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젠야타는 거대한 핵 아래로 이동했다.
핵 아래에는 동굴 전체를 조종하는 중심 컴퓨터가 바닥에 내장돼 있었다. 젠야타가
바닥에 있는 작은 버튼을 눌렀다. 컴퓨터가 위로 올라오지 않자 그는 컴퓨터의
테두리에 있는 좁은 틈에 손을 넣어 컴퓨터를 끌어올렸다.

혹시나 이전처럼 노란 빛구슬에서 나오는 힘이 컴퓨터를 깨우지 않을까 조심하며
그는 컴퓨터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외각에는 근엄한 표정을 한
자칼의 머리가 달려 있었다. 아누비스. 젠야타가 생각했다. 그는 다음으로 컴퓨터의
회로를 뜯었다. 이전의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에 잠식당한 뒤 회로가 새롭게
개조된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회로는 전체적으로 아주 희미하게 어떠한 형상을 띄고
있었다. 눈. 위아래로 각각 세 개의 점이 있는 타원형 눈동자였다. 젠야타는 자신의
어렴풋한 추측에 조각이 맞춰졌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