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음료
2017-10-2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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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가 뜬구름 잡고, 빈약한 이유...출저 - 시크릿 (네이버 지식인- 계급 바람신) 첫째는 역사 기록 자체에 대한 의문입니다. 우선 역사 기록 자체가 왜곡되고 편향될 가능성이 크다라는 것인데요. 이는 일제강점하 우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종 순종 실록이 그 예죠. 춘추관에서 조선인들에 의해 편찬된 것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에서 일본인 그리고 친일파들에 의해 작성되었기 때문에 매우 편향적이고 왜곡된 기록이 많다가 그 이유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도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문벌귀족, 김부식이 신라중심 사대적 보수적 입장에서 역사가 서술되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백제나 고구려 입장에선 그 정보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질문입니다. 이런 역사적 기록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판별해 낼 수 있는건가요? 지금 초중고등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 더 나아가서 대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진실에 가깝다고 확언할 수 있는건가요? 셋째는 일제 식민사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 식민사관의 영향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나요? 진지한 질문 감사드립니다. 첫째와 셋째에 대한 일부 답변입니다. 결국 해방이후에 식민지 유산을 극복했는가의 문제입니다. 식민지 유산 Colonial Legacy 식민지 정부는 전통적 사회 정치 제도를 파괴하고 그들의 제도를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정신도 또한 파괴했다. 고대사와 관련된 이상주의를 연구할 때는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중국과 일본은 역사 문서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중요 역사가들도 한국의 중국 지배와 아시아 역사에 관해 역사적 사실과 내용을 왜곡하였다. 20세기 식민지 시절에 한국사의 파괴와 왜곡은 중국과 일본 정부 및 학자들에 의해 각각의 국가적 영광과 국익을 위해 자행되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한국 역사가 중국과 일본 역사보다 오래되었음을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일본과 중국은 계속 실제 역사를 왜곡하였다. 출처 : 아시아 이상주의 (이홍범 저) 이홍범 오바마 정부 명예장관 (키친캐비넷) ,아시아이상주의 저자 Dr Hong beom Rhee speak about Korea history (10분) → https://youtu.be/6u8-trfOyrM 식민지 유산 무엇이 있을까요?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 배웠던 동요들이 있습니다. 1) 일본 동요와 일본식 동요 '학교종이 땡땡땡/어서 모이자’ 이중에 아는 노래들 많으시죠? 일본 음계 혹은 일본 노래 개사곡임을 모르고 부르는 동요들입니다. 지금도 배우고 있는 노래들도 있다고 하네요 [특강] 한국인의 음악감성과 전통세계 노동은(중앙대 국악대학 교수) https://youtu.be/Cbw7bpXbkZM 17분 ~ 5분 정도 보시면 <요나누키 음계> 나옵니다. 2) 남대문은 왜 국보 1호가 되었나? 숭례문을 조선 보물 1호로 지정한 것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4년 조선총독부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가 숭례문을 통해 한양에 출입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고 합니다. 이 주장은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 성곽 정책을 연구,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 가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제기됐습니다. 오타 히데하루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 정책〉에 의하면, 1904년 9월 이후 1908년 12월까지 조선군 사령관으로 근무한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 1850~1924]가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을 헐어 버리려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요미우리신문 주필을 거쳐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1864~1924)는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출입한 문입니다. 조선 출병(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남대문 외에 두세 개밖에 없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라며 설득했고, 하세가와 사령관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보존된 것이라고 합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 지정 번호를 그대로 답습하여 숭례문을 ‘국보 1호’로 다시 지정했습니다. 국보의 번호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1호의 의미는 남다른거 아닐까요? 우리가 얼마나 일제의 잔재를 청산했을까요? 우리나라 흑우( 현재, 일본 와규라는(검은소)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칡소를 제외하곤 여러종류의 생존했던 소들은 일제강점기 때 없어 진듯하다. 그리고 후반쯤에 일제가 조선의 소는 황색 소로 일축 한다라고 정한걸 강점기떄 그당시 체계를 우리나라 70년대 후반에 정부가 그대로 사용하는걸 볼 수 있다. 거기에 사라진 조선의 흑돼지도 있다. 지금 유전자 복원으로 살려 냈지만, 그당시의 완벽한 조선의 흑돼지는 아니다. 유전자를 선별하고 또 선별해서 그당시와 비슷한 흑돼지를 복원 하였다. 토종 개들도 마찬가지다 남대문과 동대문은 일제의 전승기념문 https://youtu.be/X76kuygQo_A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 역사 이런 것이 바로 청산해야할 식민지 유산입니다. 역사는 어떨까요? 정말 안타깝게도 해방은 되었으나 우리 역사는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1910년부터 한국 고대사를 말살하기 위해 수십만권의 사료를 수거해 폐기해버리고, 38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35책 2만4천쪽에 이르는 <조선사>를 새로 발간했습니다. 일왕의 조선사 편수회 조직 (1분) https://www.youtube.com/watch?v=GSv0gyHZmqI ‘조선사’ 의 발간 목적은 고조선부터 역사책에서 지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보다 앞서는 한국사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이병도 밑에 많은 사학자들이 배출됐는데 그중 한분이 쓰다 소키치,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 스에마쓰 야스카즈 등 일본 사학계 주류를 형성한 식민사관 창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학문적·인격적 스승으로 떠받들었고 있는 우리 학자들이 있습니다.
△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 등재된 이병도. 왼쪽은 수사관보 시절의 이병도, 오른쪽은 촉탁 시절의 이병도 식민사관 창도자들과 연줄을 통해 도제관계로 엮인 한국사학계의 태두인 서울대 인맥의 이병도와 고려대 인맥의 신석호, 동국대 인맥의 이기동, 서강대 인맥의 이기백 등 주류 사학계의 내로라하는 '사단'은 여전히 스승들에 대한 의리를 굳건히 지키며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밑에서 편수관 보좌를 하여 식민사학자가 된 이병도(李丙燾)는 광복 후 서울대학 교수가 되어, 조선사 35권을 중심으로 국사대관(國史大觀)을 편찬하여 대한민국 국민을 가르쳤습니다. 또 한명이 있습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수관으로 한국사 말살에 참여했던 신석호가 광복 후 1946~1949년까지 3년간 국사관의 초대 관장을 맡았고 1949~1965년까지는 문교부 장관 겸직으로 관장에 재직했습니다. 일본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편수관 출신이 거의 20년 동안 대한민국 국사관의 초대 관장을 맡아 한국사 연구의 초석을 놓았으니 한국사가 식민사관의 연장선상이 되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광복 70년이 되었는데도 한국사 교과서가 일제 식민사관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장으로 국정교과서 편찬을 주도하고 있는 김정배는 신석호 제자입니다. 노태돈은 이병도의 제자입니다. 조선사편수회 출신 신석호와 이병도의 인맥이 현재 국사편찬위의 위원으로 포진해 있습니다. 과연 국정교과서에도 지금과 같은 인적구성이면 바뀔 수 있을까요? 지난 70년 동안 이병도, 신석호 계열의 조선사편수회 학파가 국사편찬위의 주도권을 장악해왔습니다. 그러니 바꿀려고 해도 바꿀수가 없는 겁니다.
국민세금 50억 꿀꺽... 본색 들킨 식민사학 (2015.4.17 국회) https://youtu.be/n5jKjRw3t8k 또한 그 사람들이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니 동북아역사재단도 내놓은 결과물이 모두 동북공정에 기여하고 일본 극우 침략사관에 기여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영상] 1) 글로벌 한국사 복원(이덕일 강연 2015년 5월) : 조선총독부 사관의 극복 https://www.youtube.com/watch?v=86kSHll1N6Y 2) 길거리 역사 특강 이덕일 11월 1일 : 현재 교과서와 학계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https://youtu.be/XOUclZGepU8
그럼 한국사 교과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조선총독부 사관의 프레임이 그대로 남아있는 우리 한국사 교과서 식민사관의 핵심 이론은 한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는 두 가지 관점으로 귀결됩니다. 일제는 한국사 시간을 축소하기 위해서 단군 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을 한반도 북부로 가둬 놓았습니다.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허위로 몰아서 한국사를 1500여 년의 짧은 역사로 축소시켰습니다. 일제는 한반도 북부가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한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강변함으로써 식민지는 너희 한국인의 운명이니 받아들여라는 메시지를 주입하여 독립의지를 말살시키려 했습니다. 몇가지 식민사관의 핵심 논리를 좀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단군신화 "단군조선은 학술용어가 아니니 재단은 단군조선 용어를 쓰지 말라“ 2015년 현재에도 주류사학계 교수들은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오늘 사퇴한 최몽룡 교수의 기사를 보시면 아시겟지만 이병도의 후예입니다. 그는 고조선은 나라가 아니라는 깜짝 발언을 JTBC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했습니다. 그의 최근 논문을보면 단군왕검이 아니라 위만조선부터가 실제 우리나라 첫나라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주류사학의 사관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다른 학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역사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데 우리는 왜 지키려 하지 않는가? 웅녀와 웅씨녀의 차이 초디 환웅천황이 동방 백두산으로 문명을 개창할 무렵, 백두산에서 송화강에 걸친 만주 일대에는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어렵 생활을 하며 굴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범을 토템으로 하는 호족은 남권男權 중심의 부족으로 사나우면서 약탈에 능했고, 곰을 토템으로 하는 웅족은 여권女權중심의 부족으로 어리석고 고집이 세었습니다. 당시 환족이 발달된 문물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던 웅족과 호족은 자신들도 밝은 백성[桓族]이 될 수 있기를 환웅께 간절히 청하였다. 이에 환웅은 신교의 가르침으로 두 부족을 포용하고자 그들에게 햇빛을 보지 말고 100일을 기원하면 인간답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내려주었습니다. 환웅이 내려주신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달래 스무 개를 먹으며 웅호 두 족속은 수도생활에 들어갔는데, 호족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고 웅족 여인은 굶주림과 추위를 참고 계율을 지킴으로써 '21일(三 · 七日)'만에 삼신의 광명의 도를 깨우쳐 마침내 참된 인간이 되었습니다.
상고사를 없애버린 조선사 편수회 발간 조선사의 비중.현재 교과서에서 고조선이 2쪽도 되지 않는 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
위만조선의 문제 위만은 연나라 사람입니다.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조선(정확히는 번조선)의 준왕에게 투항하였다가 1년뒤에 세력을 키워 준왕을 친 ...어떻게 보면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중국 사람인데 준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투항합니다. 이 위만이 철기를 들고와서 우리나라 철기가 발전했다는 논리가 우리 교과서에 있습니다.
위만정권에 대한 평가
종래 우리 국사학계에서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동일한 지역(한반도 북부)에서 차례로 교체된것으로 가르쳐왔으나 위만조선은 한낱 '변방침략'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만이 있어야 한사군이 있습니다. 원래 위만정권의 위치입니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을까? 대표적인 것이 점제현 신사비입니다. 낙랑군에는 25개 현이 있습니다. 이걸 입증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낙랑군 점제현이라고 적힌 신사비를 조작합니다. 갈석산아래에서 비석을 떼어다가 배에 싣고 와서 대동강유역에 비석을 세우고 지나가는 아이를 불러다가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선 거기가 점제현이라고 널리 알리는 겁니다. 70년대까지 국사교과서에 점제현 신사비가 실렸습니다. 낙랑군이 거기에 있었음을 알리는 지표가 되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요? 그게 사기라는 것이 북한학계를 통해서 밝혀지고 우리나라 연세대 손보기 교수도 우리나라에서 나는 재료가 아닌 비석에 의문을 품고 거짓임을 밝혀냅니다. 그러나 우리 학계는 위조 여부를 조사하거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냥 묻어가느 겁니다. 침묵하면서 점제현신사비를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2015년 4월 17일 국회 질의
** 신사비에 대해서 그 진위여부가 현재 연구가 진행되지는 않고 있다는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위원의 답변. 학계는 위조 여부를 조사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쓰는 겁니다.
이병도 저 국사 교과서 (일조각 1970년대) 낙랑이 420년간 이땅에 존속하였다는 글의 느낌을 보십시오. 식민지가 되어서 우리가 계몽되니 좋다는 느낌을갖게 하는 글입니다. 점제현 신사비를 통해서 낙랑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고 사진까지 실었습니다. 또한 나왔던 유물들의 조작가능성을 발표한 방송이 있습니다.
2011년 SBS 스페셜 '역사전쟁-금지된 장난, 일제 낙랑군 유물조작' https://www.youtube.com/watch?v=1L1QYO1g27Y ** 다시 올린 주소네요. 어디선가 SBS채널의 내용을 블라인드 쳐버렸네요. 낙랑군의 25개현이 있는데 그 지명은 단 하나의 지명도 한반도에 위치하게 나타난 문헌이 없습니다. 오히려 중국 요동지방 요서지방 낙하 북경 등으로 나타나는 지명이 수두룩 합니다.
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사서 하나도 없어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한다면 위와 같은 지도가 성립합니다. 현재 한나라(han dynasty)를 검색하면 이런 지도들이 수두룩 나옵니다. 이 지도로 동북공정은 성공한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것을 우리가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8개의 검인정 교과서가 있지만 대부분 비슷한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태조왕(재위 53∼146년), 백제는 고이왕(〃 234∼286년), 신라는 내물왕(〃 356∼402년) 때 고대국가가 형성된 것을 내용으로 하는 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교과서가 거의 비슷합니다. 국정교과서일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국조는 나오지 않고 100년에서 300년이 지난후의 왕들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고구려는 1세기쯤 태조왕 때 이르러 한 단계 높은 국가 발전을 이루었다”, 삼국에 대한 설명은 건국의 시기(고구려, 백제, 신라 각 기원전 37년, 18년, 57년)와 시조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고대국가의 본격적인 발전 시점을 늦춰 잡음으로써 고구려는 건국 후 약 90년, 백제는 약 250년, 신라는 약 400년 정도가 ‘암흑기’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입니다. 여기에는 학계의 정설처럼 되어 있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불신론은 쓰다 소키치 등 일본의 학자들이 일제강점기에 정립한 이론입니다. 한마디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 삼국의 기록은 허구이며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불신론은 4세기 중·후반 한반도 남부를 고대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한 일제학자들의 ‘창작물’입니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는 강력한 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고 우겨야 임나일본부의 존재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해방이후라 임나일본부설을 우리 교과서에 넣지는 못하지만 임나일본부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장치인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불신론은 여전히 우리 교과서 속에 남아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그리고 낙랑국을 물리친 대무신왕도 배워야 합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정복군주였으면 무신왕도 아니고 대무신왕이라고 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왕들은 태조왕 (6대)이전이기 때문에 다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를 다시한번 정리해보겟습니다. - 고조선 역사는 인정못한다. ->일본역사보다 한국사가 짧다. 고대로부터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의 연속이었다. 최근 몇년새에 발간된 식민사관 관련 책들입니다. 얼마나 식민사관이 청산이 안되었으면 이런 책들이 나와야 하는 것일까요? 이 중에 먼저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면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덕일) - 엉터리사학자 가짜고대사(김상태) -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황순종) 정도를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그 많은 한민족 고유 사서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둘째는 역사 기록의 존재성에 대한 의문입니다. 제가 가장 궁금한 점은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고려왕조실록이나 신라 역사서 <국사> 백제 역사서 <서기> 등 고대 중대에 관한 책들의 보관 위치가 명시된 자료가 하나도 없는건가요? 왜 현존하지 않다고 단정짓고 지금 발견된 역사서만 가지고 나머지 퍼즐조각을 유추하는 건가요? 세간에 떠도는 말을 보면 중국, 일본이 자국에 불리한 진술이 담긴 역사서는 감춰두고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클까요 거짓일 가능성이 클까요?
일본의 우리 역사 조작
광개토태왕릉비문입니다. 2면과 3면은 다 긁어버렸죠? 저기에 사실 광개토태왕이 일본 본토까지 정벌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저기는 한두글자로 조작할 수 없어서 완전히 긁어버린 것입니다. 현재 2015년 일본의 교과서에는 광개토태왕비문을 집어넣서 임나일본부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는것처럼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마니시류라는 일본의 식민사학자가 석유환국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석류환인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조작한흔적이 완연하니다. 삼국유사는 석유환국이라고 쓰여 있는 판본과 석유환인으로 쓰여진 판본이 공존했는데 환국이라고 쓰여지면 국가가 있었다는 것이 됨으로 그런 본을 아예 싹을 없애버릴려고 한것입니다. 일본의 조작은 이렇듯 비열하기 짝이 었습니다.
일본의 우리 사서 수거
20만권을 가져갔습니다. 불태우기도 하구요 이등박문이 조선총독부를 은퇴하고 일본으로 올 때, 조선왕실의 기증이라며 규장각 사서를 몇 수레나 일본으로 가져왔다. 일본 전역에 5만여권의 한국 고대사서가… 최근 다큐입니다. 일본학자가 얘기하길 약 3천종이 일본에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왕실도서관에 우리 사서들이 보관되어있다는 얘기가 있지요. 그리고 일본 고서점에도 어느정도 있다고 합니다. 조선사 편수회 차입 사료 약 5천종 대마도 섬 하나에서만 고문서류 6만 6천 매 3천 오백권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 탐방하여 섬하나에서만 이정도입니다. 일제가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서 얼마나 많은 책을 가지고 갔을까요?
테라우치 총독도 지혼자 이렇게 많은 책을 약탈해 갔습니다. 한민족 고유사서들의 소실 과정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시대판 국정교과서 사건 ?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릴 수 있는 사서들을 수거하라 유학,유교와는 다른 사서들을 수거라라 유학자들은 역사교육이 다양한 관점으로 시행될 경우에는 자신들이 사회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담은 획일적 역사교육이 시행되어야만 자신들이 사회를 통제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 정부를 압박했고 유교주의 역사교육을 획일적으로 시행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이 점은 세조 3년 5월 26일자(양력 1457년 6월 17일자) <세조실록>과 예종 1년 9월 18일자(1469년 10월 22일자) <예종실록> 등에서 확인됩니다. 이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고조선비사><삼성기><삼성밀기>를 포함한 다수의 서적을 금서로 지정하고 이 책들을 몰수했습니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금서를 숨긴 자는 참수형에까지 처했습니다. 금서를 불태우고 지식인들을 구덩이에 매장한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유사한 일이 조선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금서가 된 책들은 거의 다 고조선과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바룬 사서들과 신선교(도교,선교,신교)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책들이 사라지게 된 것일까요?
좀전에 수서령을 말씀드렸습니다. 세조부터 성종까지 우리민족의 뿌리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서들을 모두 거두어들입니다. 숨기는 자는 참형에 처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들이 왕실 도서관에 모여있었겟지요. 그런데 이 책들이 모인 곳을 볼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분이 있습니다. 일십당 이맥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이 이 책을 보고서 한권의 책으로 모으게 됩니다. 요즘 말로 데이타베이스화한 것입니다. 그책이 바로 태백일사라는 책이고 .. 이 태백일사는 1911년에 발간된 환단고기라는 책의 60퍼센트를 차지하게 됩니다.
일제 관변사학자 이마니시류(금서룡今西龍)도 자신의 저서인 <朝鮮古史の硏究>의 <단군고檀君考>에서 <이조李朝 태종太宗 왕조실록王朝實錄 12년 條에 열기列記된 신비집 神秘集*고조선비사 古朝鮮秘詞*대변설 大辯說*조대기 朝代記*주남일사기 周南逸士記*지공기 誌公記*표훈천사 表訓天詞*삼성밀기 三聖密記*안함로 원동중 삼성기 安含老 元董仲 三聖記*도증기 道證記*지이성모 智異聖母*하사량훈 河沙良訓*문태산 왕거인 설업 등 삼인기록 文泰山 王居仁 薛業 등 三人記錄*수찬기소 일백여권 修撰企所 一百餘卷*동천록 動天錄*마슬록 磨虱錄*통천록 通天錄*호중록 壺中錄*지화록 地華錄*도선한도참기 道詵漢都讖記 등의 서적들이 왕씨고려시대王氏高麗時代에 서운관書雲觀을 중심으로 하여 많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서적들이 고려시대로부터 이조李朝 初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연유하여 도가(道家-선가仙家)에 의하여 저술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스스로 피력하고 있다(동서同書 53p) 이 책들에 관해서는 이마니시류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 책들을 어떻게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일본왕실도서관으로 실어날랐을 가능성이 높고 어느정도는 불태웠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통해서 <일본인을 위한 조선사>를 만들어서 조선을 영원히 통치하려 했는데 일본보다 오래된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드러내는 사서들을 가만둘 리가 없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책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일제강점기가 된 바로 다음에 1911년 운초 계연수 선생이 다섯권의 책을 모아서 한권의 책 환단고기로 30권을 발간합니다. 환단고기를 편찬한 운초 계연수 선생 운초 계연수 선생은 1864년에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만큼 기억력이 뛰어났습니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습니다. 1897년 (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천부경요해』등을 간행하였습니다. 이 중 『단군세기』와 『참전계경』,『태백일사』는 1911년에 간행한 『환단고기』에 다시 수록되었습니다.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해 5월 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심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그 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두 달 후에 이기 선생이 돌아가시자, 계연수 선생이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은 이기 선생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 에 범례凡例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습니다. 서문(凡例)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진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1943)와 오동진(1865~1930)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 에서 『환단고기』30부를 간행 하였습니다. 환단고기 저자와 전수과정(2분) → https://youtu.be/Osv4qvdBifA 1911년 환단고기의 간행
그는 북한에서 내려올 때 『환단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때 사용했던 교재가 『환단고기』였던 것입니다. 이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종현梁宗鉉 씨가 필자에게 직접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물론 원본이 사라진 때문만은 아닙니다. 위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지금 학계는 해방이전의 조선총독부 사관을 고수하고 있기때문에 ....그와는 완전히 다른 역사서가 나오게 되니 위서로 몰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환단고기를 공부해보면 환단고기가 진서이고 사료가치가 대단히 높은 역사서임을 단번에 알수있습니다.
환단고기』가 분실되기 전 이유립 선생의 제자 가운데 오형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형기는 이유립 선생보다 10년 정도 연배가 젊은 사람이었는데 이유립 선생이 오형기의 형과 친한 터라 그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양종현 씨가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오형기가 이유립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를 빌려가 필사를 하게 됩니다. 오형기 말로는 이유립 선생이 자신에게 『환단고기』 정서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양종현 씨 증언으로는 오형기가 그 책을 필사하기를 이렇듯 환단고기가 출간되게 된 과정은 아주 명확합니다. 왜 우리 역사 교과서에 언급조차 없나. 삼국사기의 사대주의 -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불손하여, 임금께서 장차 토벌하려고 했다. 『환단고기』는 기존의 사서와는 다른 파격적인 내용과 상세한 기술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내용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고조선의 성립 기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라든가 47대에 이른 단군의 명칭과 재위년도 등은 고조선을 지금으로부터 겨우 2,700년 전에 건국된 청동기 시대 부족국가로 보는 식민사학의 논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역사학계에서 볼 때 『환단고기』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 가치를 폄하하고, 『환단고기』의 허점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고 침소봉대하여 『환단고기』 전체를 근세에 지어낸 책이거나 조작된 책으로 낙인찍으려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위서로 판명났다는 등으로 치부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위서론의 주장들
둘째,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환단고기』에 근대 술어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국가·문화·평등·자유·헌법·인류·세계만방·산업 같은 근대용어가 쓰였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는 최근세에 쓰인 책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서에 현대에서만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면 당연히 그 저술 연대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근대술어라는 것이 고대에도 사용된 전거들이 무수히 발견됩니다. ‘문화’나 ‘인류’는 최소한 1,600년 전부터 고전에서 사용되었으며, 구마라습鳩摩羅什의『금강경』에는 ‘평등’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주역』에서는 ‘국가’, 전국시대 역사서인 『국어』에서는 ‘헌법’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을 돌이켜보면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와 다소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진서론이란 말이 어폐가 있는데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정통 역사서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체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 뿐입니다.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굳이 증명하라고 한다면 중국, 일본, 중동 등지의 고대사 역사 현장을 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곳을 답
“우리가 어디서 왔고, 누구였으며, 무엇이었는지, 지금의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이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 알렉스 헤일리, <뿌리>
“고향산천을 어찌 잊어요.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어찌 잊어요. 내가 고향산천에 할말은 없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자존심이 있어요.” - 극진가라데 명인 최배달 ( 이름을 배달민족의 배달로 바꾼 최영의 씨)
아무튼, 조선시대 강탈해간 수백 만권의(?) 고서들 가져가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사죄해도 모자를 만행인데... 삼국사 편찬한 고려시대의 김부식...이 인물사 읽어보면 왜 조선이 사대주의로 일방통행 했는지 이해가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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