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15년 전일까, 전국 PC방에 게이밍 키보드가 이제 막 보급되던 시절이 있었다. 우측 상단에 실리콘 재질의 노란 버튼이 달린 키보드였는데 버튼을 누르면 불이 들어오고, 입력 속도가 무진장 빨라지는 그런 기능을 가진 키보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여러 키를 동시에 눌러도 모든 키가 동시 입력되는 기능도 있었다. 지금이야 대부분의 키보드가 입력 속도도 빠르고 무한 동시입력이 가능하지만 그 당시에는 키보드계의 혁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키보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가. 앞서 설명한 보급형 게이밍 키보드로 시작해 체리, 레오폴드, 필코 등 수많은 기계식 키보드를 거치며 그 당시 끝판왕이라 불리던 리얼포스(심지어 10주년 한정 모델이었다)까지. 어디 가서 키보드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 키보드 '좋아한다'가 아니고 '좋아했었다'로 정정하겠다. 가방에 기계식 키보드 넣고 PC방으로 출 퇴근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업무용으로 맥을 사용하게 되면서 키보드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든 상태고 풀커스텀, 윤활, 키캡갈이 등은 이제 귀찮아서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으니까. 가끔 유튜브에서 키보드 전문 유튜버들을 볼 때마다 정말 대단하다고 느끼곤 한다.

하지만 내 간사한 손가락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고오급 기계식 키보드의 감촉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더라. 저가형 멤브레인, 펜타그래프 키보드로 돌아갈 수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취향에 맞는 스위치와 디자인 괜찮은 기성품들 중 가격대 적당한 녀석을 찾는 수밖에.



로캣 파이로(ROCCAT PYRO)는 어떨까? 튼튼하고 묵직해 보이는 알루미늄 상판이 특징인 비키 스타일의 기계식 키보드. 화려한 RGB LED까지 탑재해 벌써부터 게이밍 냄새가 물씬 풍긴다.





'파이로(Pyro)'라는 작명은 화염에서 탄생한 키보드(...)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중2병스러운 컨셉에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견고해 보이는 알루미늄 보강판과 우락부락한 하판을 보고 있자니 꽤나 그럴싸한 작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제품 구성이 상당히 훌륭하다. 앞서 설명한 든든한 알루미늄 보강판은 물론이고 DJ가 된 듯한 기분을 낼 수 있는 볼륨 조절 다이얼, 게다가 꽤 좋은 퀄리티의 팜레스트까지 기본 구성이다. 전체적인 키보드의 마감도 그렇고 구성품인 팜레스트까지 조약하다는 느낌을 찾아보기 힘들다. 8만 원대 기계식 키보드 맞아? 30만 원짜리 키보드에는 이런 거 안 들어있던데.


키보드 케이블과 다른 케이블을 쉽게 구분할 수 있게 귀여운 키보드 아이콘이 각인되어 있는 모습이다. "키보드 선이 뭐였지?" 하면서 케이블 하나하나 당겨볼 필요가 없다. 나도 이제 슬슬 나이가 먹어가는 걸까? 제품 본연의 성능보다도 이 같은 제조사의 사소한 배려에 더 높은 만족감을 느낀다. 조금 슬프다.



로캣 파이로는 개인적으로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적축 기계식 키보드다. TTC 적축 스위치를 탑재해 어떤 상황에서도 큰 무리 없이 사용이 가능하다. 기계식 스위치 중 가장 호불호가 없기도 하고. 현란한 손목 스냅으로 엔터키를 시원하게 내리치는 오디션 타법만 아니라면 사무실에서도 OK.

가벼운 타건감의 적축과 묵직한 알루미늄 상판의 조합 덕분일까? 대부분의 저가형 기계식 키보드에서 느낄 수 있는 통울림 현상이 거의 없다. 과장 없이 10만 원 초반 기계식 키보드 중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은 타건 경험이었다.




게이밍 환경에서 그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키보드 자체의 성능도 괜찮은 데다가 전용 유틸리티인 '로캣 스웜(ROCCAT SWARM)'을 활용해 15개 이상의 키를 매크로 키로 할당할 수 있기 때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처럼 많은 양의 스킬, 버프, 매크로 키 등을 활용하는 게임에서 최상의 편의성을 제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브라우저 제어(이전 페이지, 새로고침 등), 윈도우 제어(시스템 종료, 제어판 실행 등) 와 같은 기본 기능으로도 설정할 수 있다.



또한 다수의 프로필을 지원하기 때문에 각각의 게임 및 프로그램별로 매크로 키를 별도 저장할 수 있다. 처음 세팅에 약간의 공만 들인다면 완벽한 커스텀 키보드를 사용할 수 있는 셈이다. 간단한 예로 나는 포토샵의 이미지 크기 변환 기능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어서 사용 빈도가 적은 'INSERT'키를 이미지 크기 변환 키로 설정했다. 이렇게 설정한 커스텀 키는 게임 모드 활성화 상태에서만 사용이 가능하고 비활성화 상태에서는 일반 키보드와 동일하게 사용이 가능하다.



로캣 제품들의 가장 큰 특징인 AIMO 조명 역시 매력적이다.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일반적인 형태가 아닌 사용자의 조작에 따라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RGB LED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누르는 버튼의 위치, 누르는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절되는데 이거 말로 설명하기가 영 힘들다. 위 영상을 참조하도록 하자. 대부분의 로캣 게이밍 기어가 AIMO 조명 연동을 지원한다. RGB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갑 열릴 만하겠네.


'로캣 파이로(ROCCAT PYRO)'는 기계식 키보드 입문자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을만한 제품이 아닐까 싶다. 든든한 알루미늄 상판과 5천만 회 클릭을 견디는 스위치가 탑재되어 있어 내구성도 좋다. 전체적인 제품의 마감도 준수하고, 통울림은 거의 없는 수준. 구성품인 팜레스트 역시 마음에 든다. 가격은 온라인 최저가 기준 115,000원. 무엇보다 가격이 혜자롭다. 이 정도 퀄리티의 기계식 키보드를 10만 원 초반대 가격에 만나볼 수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