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따스했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며, 구름들......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어도 낯설지 않은 친근함이었다. 멀리서 새들의 소리도 아련히 들리는 듯 하고 바람에 풀들이 흩날린 내음이 콧등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이내 손을 뻗어 태양을 가린다. 언제부턴가 자꾸 눈이 부시다. 눈을 비벼보아도 모든게 희미해져만 간다. 그러고보니 난 언제부터 여기 누워있었던거지? 어서 벨리카로 가야 하는데.

 몸을 뒤척여보려 했지만 갑자기 무거운 피로가 엄습한다.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도 그제서야 고개를 든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지금껏 겪어본 적도 없는 추위도 찾아왔다. 분명 햇살은 나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차가웠다.

 가물거리는 시선에 누군가 보이더니 무어라 소리친다.

대체 뭐라고 떠드는거야....바보같이 오물거리기나 하고......

 

그리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가이우스 마르셀은 벨리카 직속 경비대의 병사로 그가 살아온 30여년동안 벨리카를 떠나본 적 없는 토박이였다. 그의 동기들은 이곳 저곳 전출되어 벌써 하사관이 된 녀석도 있었지만, 그는 출세 운은 없었던지 배치받은 뒤부터 벨리카 외곽 벌판만 하루에 두번 순찰만 돌뿐이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는 지난 밤 한껏 닦아놓은 창을 번쩍이며 들판을 순찰했다. 그러다가 그가 순찰을 절반 가까이 돌았을 무렵, 문득 풀밭에서 뭔가가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조심스레 손에 쥔 창을 굳게 잡고 서서히 다가갔다. 종종 들짐승들이 여행자들을 습격하여 그 고기를 뜯어먹는 경우도 있었다. 여차하면 창으로 찌를 준비를 하며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뭐지 이게. 케스타닉 녀석들은 들판에서 수영을 하는 취미가 있나......"

 그가 본 것은 숨을 헐떡이며 추잡스레 풀밭에서 허우적거리는 케스타닉 여자였다. 그는 우선 험악한 들짐승이나, 참혹한 시체가 아닌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몸을 구부려 심각한 눈빛으로 출렁이는 그녀의 가슴...아니 그 아래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조심스레 그것을 들어 냄새를 킁킁 맡아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독버섯이구만! 이런 걸 함부로 주워먹으니 이 꼴이 나지. 쌤통이다. "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 가버렸....

 "크흠!....음......"

 가는 듯 싶더니 몇 발자국을 다시 되짚어 이제는 숨도 안쉬는 것 같은 그녀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몇번 헛기침을 하며 그는 지금껏 지어본 적 없는 자비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랑스런 벨리카의 경비병이자, 고결한 발키온 연합의 일원으로서 어려움에 처한 숙녀를 외면하면 안되지. 암,안되고말고....."

 그는 조용해진 여자를 들쳐업고 창을 지팡이 삼아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저만치 멀어질 즈음, 어느덧 서쪽으로 석양이 지기 시작하며 언덕 위에 서있는 거대한 흰색 성벽을 붉게 물들였다.

 

여신 벨릭에게 헌정된 도시이자, 발키온 연합의 중심지 벨리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