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0월 중국이 핵개발에 성공하자 대만은 난리가 남


당시 샤먼 바로 코앞에 있는 진먼섬에서 포격전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던 준 전시상황이었고

대륙의 공산당을 주적으로 삼고 있던 장제스와 국민당은 생존의 위협을 다시 느끼게 되었음


인도-파키스탄의 예시에서 알수있듯 한쪽이 핵무기를 가지면 나머지 한쪽도 기를쓰고 핵을 개발하려고 시도하는데

대만역시 예외가 아니었음


장제스는 이에 5년이네 핵개발을 목표로 신주계획(新竹計劃)이라는 핵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이스라엘 핵무장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이비드 버그만 박사를 초빙하는등 핵무장 시도를 했지만


저때까지 대만의 산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핵실험을 하기엔 국토가 협소하다는 반대가 있어서

신주계획은 타오위엔계획으로 바뀌고 핵무장은 극비계획으로 점진적으로 진행됨

반도체, 전자, 핵물리학등 부분을 성장시키기 위해 해외유학을 추진했고 후술할 장셴이도 이런 혜택으로 미국으로 유학을감


장제스가 1975년 사망하고 장징궈가 집권해도 핵무장 계획은 전진되어

1987년쯤에는 최장 1~2년 희망적으로는 3~6개월안에 핵무기를 생샌해낼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고 대만국방부는 판단함



그런데 1988년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대만으로 전해짐

핵무기 개발을 담당하던 중산과학원 핵무기 연구센터 부소장이던 장셴이 대령이 핵무기 관련 자료를 들고 미국으로 튄것


신동아에 따르면 장셴이는 사실 CIA에 1960년대 대학생 시절에 이미 포섭된 스파이였고

핵개발 주요내용, 중산과학원과 정부기관 사이에 오간 보고서, 부품 수급 및 핵무기 소형화 관련 자료등

각종 극비자료를 미국에게 계속 넘기고 있었음



국민당의 실세 - 하오보춘 참모총장


1988년에 들어와 장징궈 총통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자 대만 내부에서는 헌법상으론 리덩후이가 후임이지만

실세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하오보춘이었고, 미국은 하오보춘이 핵무기를 실제 생산해서 중국과 전쟁을 일으킬까 우려함

그래서 장셴이를 망명시켜 대만의 핵무장을 저지하려고듬


장셴이의 망명소식을 들은 장징궈는 보고를 받은 3일후인 1988년 1월 13일 피를 토하면서 사망했고

장셴이는 미국 의회에 나가서 장제스 장징궈의 핵개발을 고발함

그리고 2일뒤인 1월 15일 IAEA는 대만의 핵사찰에 들어가서 핵개발 관련 모든 설비를 폐기하라고 요구함


후임인 리덩후이는 미국의 요구에 수긍할수밖에 없었음

본성인 출신이라 외성인인 하오보춘도 견재해야하는 상황에서

핵무장이 완료된 상황도 아닌데 미국의 보호 없이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


장셴이는 훗날 2016년 회고하길

"나는 장공(장제스)도 장총통(장징궈)도 배신하지 않았다, 배신한건 오직 하오보춘 한명뿐"이라고 말하면서


대만의 핵무장은 양안 전쟁을 불러왓을것이고, 대만의 생존은 미국과의 관계에 달려있는데 핵무장은 대만 미국관계를 파탄시킬것이다

결과적으로 내 망명 덕분에 핵무장이 좌절되어 대만 미국 쌍방에 상호이익이 되었고

그리고 자신은 평화주의자라 핵의 무기화는 절대 안된다고 주장함


하지만 장셴이의 매국으로 인해 대만은 마지막 카드까지 잃어버렸고

1990년대 이후 중국의 견제로 제대로된 무기 도입을 못해서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낙후된 상태로 전락하고

지금까지 허구한날 중국의 공갈협박에 시달리는 신세가됨




출처: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179816/1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5510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