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노동위원회, 게임단 감독에 ‘근로자성’ 첫 인정
고용노동부 소속 준사법기관인 중앙노동위원회가 지난 19일 e스포츠인 ‘롤(LoL·리그오브레전드)’ 프로게임단 감독에 대해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판정을 내렸다. 노사간의 권리 분쟁에 대한 조정과 판정을 주업무로 하는 중노위가 e스포츠 코칭스태프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스포츠 업계에선 이번 판정으로 선수나 코치가 구단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29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BEXCO)에서 열린 '리그 오브 레전드'(LoL) 상반기 최대 국제대회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MSI) 2022' 결승전에서 4000여 명이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프로게임단 감독도 부당해고 대상 될 수 있어

롤 프로게임 리그에 참여 중인 게임단 DRX는 A씨와 작년 11월 감독 선임 계약을 맺었지만,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 2월 성적 부진 등을 이유삼아 이메일로 해고 통보했다. A씨는 부당 해고라며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했고, DRX측은 ‘A씨는 단순 근로자 아니다’라며 맞섰다. 부당 해고가 성립하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신분(근로자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근로자성을 인정받기 위해선 ‘사용자와 종속적 관계에 놓여 지휘·감독에 따르고 있는지’ 여부가 핵심이다. 프로야구나 축구 등 운동 선수들이 아직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임금 협상이나 훈련 스케줄 조정 등에 있어 일반 근로자보다 큰 폭의 자율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DRX측은 “A씨는 선수단을 이끌고 경기에 참여해 좋은 성적을 내야하는 임무를 완수하는 사람”이라며 “감독 선임은 고용이 아니라 위임 계약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노위는 지난 4월 ‘A씨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고 적법한 절차 없이 부당 해고를 당했으니 복직시키라’고 판정을 내렸다. DRX 측은 이에 불복하고 재심을 신청했으나 상급 기관인 중노위 역시 지노위 원심을 그대로 유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A씨가 감독으로서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은 ‘구단이 정해놓은 부대활동 일정을 피해 훈련 일정을 정하고 선수를 배정하는 업무’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업무 재량이 매우 한정적이고 구단에 종속성이 인정된다고 본 것이다. 중노위 결정은 행정심판으로, 정부의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뒤집기 위해선 DRX가 A씨가 아닌 중노위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해야한다.

다만 이번 판정으로 선수·코칭스태프 모두의 근로자성이 인정된 것은 아니다. 중노위 판정은 개별 사건에 한해 영향을 미칠 뿐더러 이들의 근로자성에 대한 법원의 판례도 아직 확립된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 선수·코치들이 리그 측에서 마련한 표준계약서를 통해 구단과 대동소이한 계약을 하기 때문에 e스포츠 업계에서 이번 사건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추후 선수·코치의 근로자성이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을 경우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게 되고, 주52시간제·산업재해보상 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지난 2016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국내 최대 게임쇼 지스타 2016에서 수백 명의 게임 이용자가 게임을 관람하고 있다.

프로게이머, 하루 12시간 이상씩 연습…구단 지시따라 인터넷 방송도

최근 e스포츠는 MZ세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커지는 산업 규모에 비해 선수·코치의 근로 여건은 이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작성한 ‘e스포츠 실태조사’에 따르면 e스포츠 산업 규모는 2015년 722억9000만원에서 2020년 1204억1000만원으로 성장했다. 롤 뿐 아니라 배틀그라운드·오버워치·카트라이더 등 다양한 게임 리그가 운영되며, 총 86개팀에서 활동하는 선수만 414명에 달한다.

선수 대부분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다. 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선수 중 62.7%가 21세 이하이며, 25세 이상은 13.2%에 불과하다. 대다수 선수들은 숙소에서 합숙을 하며 평일에는 평균 12.3시간, 주말에는 12.2시간씩 게임 연습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직 프로게이머 박모씨는 “선수 대부분이 어리고 사회 경험이 적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자신의 권익을 보호할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다수 선수들은 구단이 지시하는 대로 각종 부대 행사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구단은 부대 수입을 얻기 위해 선수들에게 하루 2~3시간씩 인터넷 방송을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한 구단은 선수들이 숙소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CCTV로 녹화해 집단 반발을 사기도 했다. 2020년에는 한 구단의 핵심선수 4명이 구단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시에 재계약을 거부해 팀이 공중 분해될 뻔한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코칭스태프 역시 평일과 주말 모두 평균적으로 12.3시간씩 근무하는 등 근무 환경이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다. 진흥원에 따르면 코칭스태프 중 정규직으로 채용된 사람은 전체의 10.5%에 불과하며 44.7%는 ‘고용 불안정’을 애로 사항으로 꼽았다. A씨의 법률대리인 법무법인 강남 소속 이언·김지원 변호사 측은 “극히 일부 유명 선수를 제외한 대다수 선수들, 특히 코칭스태프들은 팀이 시키는대로 따를 수 밖에 없다”며 “이들의 권익을 법 테두리 안에서 보호할 방법을 모색해야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