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214/0001231016?sid=100







안중근의 둘째 동생은 안중근 처형 집행 이전에 당국을 향해 유해를 한국 원적지에 옮겨 매장할 수 있도록 간절히 요청했다. 이에 당국에서는 부득이 규정을 내세워 사형수의 유해는 감옥이 관리하고 있는 사형수 공동묘지에 매장한다고 답했다. 안중근의 둘째 동생은 곧바로 안중근과 일정한 친분관계가 있는 전옥(典獄, 감옥 관리자)에게 부탁했다. 전옥은 고심 끝에 둘째 동생에게 파격적으로 하얼빈의 소나무로 만든 관으로 유해를 안치하고 조선 풍속에 따라 백포(흰 천)를 씌우도록 허락하여 한국의 풍속을 따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일반 사형수와는 다른 규정을 적용하여 해당 영구를 감옥 내 교회당에 안치한 다음 우덕순 이하 3명의 죄수들에게 안중근의 영구에 고별식을 갖도록 했다. 우덕순 등 3명의 죄수들은 안중근의 영구 앞에서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하고 조선인의 예법에 따라 땅에 꿇어앉아 두 번 절을 했다



1909년에 하얼빈에서 나라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의사 안중근씨는 그 다음 해에 여순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친동생 등이 그의 유해로 장례를 치르고자 했으나, 일본 관리들이 그 유해를 강탈하고 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중근의 모친 조 씨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두 아들 정근과 공근 둘을 데리고 조국을 떠나 북러시아 영토로 이주하여 십 수년의 세월에 걸쳐 꾸준히 애국 사업에 노력했다. 이후 1919년에 한국에서 3.1 독립운동이 발생하자 조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상하이로 와 광복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올해 봄에 뜻밖에 병에 걸려 영국 조계지의 덕국의원(德國醫院)에 입원해 몇 개월간 치료받았으나 큰 효과가 없어 7월 15일 오후 11시에 서거하시니 향년 66세였다. 상하이의 한국 교포들도 그녀의 평생 사업을 추모하여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특별히 사회장을 거행하여 19일에 발인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중근 의사 유해, 하얼빈산 소나무관에 안치한 뒤 공동묘지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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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뜻으로 일어나
의로운 뜻을 전 세계에 알리셨으니
그대의 아름다운 이름은 독립 전쟁의 영웅이십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총칼로 위해 가할 순 있었으나
우리 배달 겨레의 굳은 의지에 한 톨의 상처도 낼 수 없었습니다

일제에 순종하여 민족의 이름을 팔아먹은 민족의 역적들이 준동하여도
안중근 의사의 의로운 뜻이 서슬 퍼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한
후손들이 빛나는 그 뜻을 이어갈 것입니다

작금의 현실이 아무리 고되다고 하여도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전쟁을 수행하신 선조분들 보다 힘들다고 하겠습니까

나라 경제는 위태롭고
정치 상황이 암울하다 하여도
일제의 심장을 저격한 안중근 의사님을 기억하며

우리 민족의 중흥을 그리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겠습니다












정진석이는
우리나라에 총기 휴대가 불법이라는 사실
감사해라
그래서 니가 아직 숨쉬고 있는거다
SHIP쉨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