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자가 잘 따를수록 종교는 더 전파되고 자기 통제와 희망을 느낌을 전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행복 추구는 현대 세계의 가치다.
행복이 ‘유행’이 된 건 과학과 기술의 시대가 도래한 후의 일이다.
인류가 삶을 개선할 수단을 발명하자마자 던진 그
다음 논리적 질문은 ‘그럼 무엇을 개선할까?’였다.
당시의 몇몇 철학자는 인류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을 증진하는 것, 즉 고통을 줄이는 것
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겉으로는 전적으로 중요하고 좋은 것처럼 보인다.
고통을 좀 없애자는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나.
어떤 개자식이 그걸 나쁜 생각이라고 주장하겠는가.
음, 내가 그 개자식이다. 그건 나쁜 생각이기 때문이다.
(블로그주인이 아닌 저자 마크맨슨의 말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간 조건의 보편 상수다.
그러므로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고 모든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는 역효과를 낳을 뿐이다. 고통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면, 고통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통에 대한 민감성이 증가할 뿐이다.
심리학자들이 항상 행복을 연구한 건 아니다.
심리학의 역사는 주로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이 사람들을 망가뜨렸는지, 무엇이 정신병과 신경 쇠약을 야기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다가 1980년대에 들어 몇몇 학자가 행복에 대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곧 실존적 위기에 시달리는 권태롭고 불안한 중산층에게 인기가 있었다.
행복 연구는 일단 설문조사로 시작한다.
설문조사 결과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종일관 행복도 1~10에서 7점을 적었다는 점이다.
비극적인 일이나 긍정적인 일이 있을 때도 일시적으로 2~5로 내려가거나 짧은 기간 치솟지만 다시 7점 언저리로 복귀했다.
항상 전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고, 항상 완전히 불행한 사람 역시 없다.
인간은 외부 상황과 무관하게 변함없이 약간 행복하지만 아주 만족스럽게 행복하지는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대부분의 삶을 상상 속의 10점을 끊임 없이 쫓으며 살아간다
“더 행복해지려면, 새 직장을 구해야해”
새 직장을 구하고, 새집을 사면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곧 익숙해진 이후 다시 7점으로 돌아간다.
날이 아무리 화창해도 언제나 하늘에서 구름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 추구는 자멸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이건 마치 등에 붙은 막대기에 묶인 줄에 매달린 당근을 잡으려 하는 것과 같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당근을 최종 목표로 삼으면 자신을 그걸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수 밖에 없 다.
행복을 추구하면 역설적이게도 행복을 달성하기 힘들어진다.
행복 추구는 오랫동안 우리 문화를 규정해 온 해로운 가치다. 자멸적인 동시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잘 산다는 건 고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이유로 고통받는 걸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순히 존재함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면,
고통을 잘 겪는 법 을 배우는 편이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진정한 형태의 자유는 삶에서 포기할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유일하게 진정한 형태의 자유, 유일하게 윤리적인 형태의 자유는 자기 제한을 거친 것이다. 이것은 삶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선택할 특권이 아니라, 오히려 삶에서 포기할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자유다.
오락은 일시적이고, 쾌락은 지속되지 않는다. 다양성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하지만 기꺼이 희생하려는 것, 기꺼이 포기하려는 것은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종류의 금욕이 삶에서 자유를 확장해 주는 유일한 것이다.
규칙적인 육체 운동의 고통은 힘과 유연성, 지구력, 제 력 같은 육체적 자유를 준다.
투철한 직업의식에 따른 희생은 더 많 은 취업 기회를 추구할 자유, 자신만의 경력을 밀고 나갈 자유, 더 많은 돈과 그로 인한 이익을 얻을 자유를 줄 것이다.
타인과의 갈등 을 피하지 않는다면, 그 고통을 선택한다면 누구와도 자유롭게 이 야기할 수 있고, 그들이 나의 가치관과 믿음을 공유하는지, 우리가 서로의 삶에 보탬이 될지 알아낼 수 있다.
지금 당장 더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단순히 자신에게 부과하고 싶은 제한을 선택하라.
매일 아침 더 일찍 일어나고, 매일 오후 2시 까지 이메일을 차단하고, 휴대 전화에서 수많은 SNS를 선택 삭제하 는 것을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이런 제한은 당신의 시간, 주의력, 선택권을 해방해서 당신에게 자유를 준다. 의식을 목적 그 자체로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자유는 헌신, 즉 삶을 살아가며 희생 하기로 선택한 것에서 나온다.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하면 그들은 당신이 권하는 빌어먹을 것을 거의 다 살 것이다.
마케팅을 공부할 때 처음 배우는 것이 고객이 ‘불편을 느끼는 부분’을 찾아내서 교묘한 방식으로 그걸 더 심하게 느끼도록 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의 ‘수치심’, ‘불안’을 자극한 다음, 돌아서서 이 상품이 수치심을 해소해주고 불안을 없애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건 단 한가지, 바로 감정이다.
사람들은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에 돈을 쓰기 때문이다. 돈이 있는 곳에 권력이 있다.
시장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1) 하나의 고통을 훨씬 더 견딜만하고 바람직한 고통으로 바꾸는 것이다.
ex. 소아마비 백신(평생의 불편한 거동-몇초의 주사), 심장 수술(죽음-1~2주 회복기)
2) 사람들이 고통을 덜 느끼게 돕는 것
: 오락, 술, 미식
2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게 우리 삶을 지배하고 우리의 의지로부터 통제력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고통은 가라앉힐수록 더 심해지기 때문에 점점 더 강하게 가라앉혀야 한다. 결국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만다.
* 파란점 효과
: ‘빈도에 의한 개념 변화’라고 일컫는 것을 연구하는 실험. 1000개의 파란색, 자주색, 일부는 파란색~자주색 사이의 색조의 점을 보여주고 파란점을 찾는 실험이었는데,
파란점을 주로 보여주었을 때는 비교적 피험자들이 꽤 정확히 판단했지만, 자주색을 더 자주 보여주자마자 자주색을 파란색으로 오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기대에 들어맞게 지각을 왜곡하는지를 측정하기 위한 수단이다.
= ‘폭력’과 ‘트라우마’, ‘안전’, ‘학살’이라는 말이 현대에 와서 얼마나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도 예시로 나타냈다.
: 상황이 좋아질수록 위협이 없는 곳에서 위협을 더 많이 지각하고, 마음이 더 뒤숭숭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진보의 역설에서 핵심이다.
* 에밀 뒤르켐의 사고 실험
: 사회학의 창시자 뒤르켐이 시행한 사고 실험의 내용.
문제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반응이 문제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경험하리라 예상되는 스트레스 정도에 맞게 문제를 증폭하거나 축소할 뿐이다. 물질적 진보와 안전이 반드시 우리를 편하게 해주거나 미래를 기대하는 걸 더 쉽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와 반대로, 건전한 역경과 도전을 제거하면 사람들은 훨씬 힘겨워하고 이기적이고 유치해진다.
가짜 자유는 더 많은 것을 뒤쫓도록 우리를 쳇바퀴 위에 올려놓는 다. 그러나 진짜 자유는 더 적은 것으로 살아가기 위한 의식적인 결 정이다.
가짜 자유는 중독성이 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언제나 충 분하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된다. 진정한 자유는 반복적이고, 예측 할 수 있고, 때로는 따분하다.
가짜 자유는 이익을 감소시킨다. 같은 기쁨과 의미를 얻으려면 점 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진짜 자유는 이익을 증가시킨 다. 같은 기쁨과 의미를 얻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점점 더 적어진다.
가짜 자유는 세상을 자기가 이기고 있다고 느끼는 거래와 홍정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진짜 자유는 세상을 무조건 적으로 보는 것이고, 유일한 승리는 자신의 욕망을 이기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가짜 자유는 세상이 당신의 의지를 따르기를 요구한다. 진짜 자유 는 세상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진짜 자유는 오직 당신의 의 지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오락과 그로 인한 가짜 자유의 과잉은 우리에게서 진 짜 자유를 경험할 능력을 제한한다. 선택 사항이 많을수록, 우리 앞 에 다양성이 풍부할수록, 선택하고, 희생하고, 집중하기가 더 어려 워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난제가 오늘날 우리 문화 전반에 퍼져 있는 광경을 보고 있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쾌락을 선택할 수 있다. 무엇을 읽고, 무슨 게임을 하고, 무엇을 입을지 선택할 수 있 다. 현대의 오락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새 시대의 억압은 사람들 에게서 오락과 헌신을 박탈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의 억압은 너무 많은 오락, 너무 많은 엉터리 정보와 하찮은 오락거 리로 사람들을 뒤덮어서 영리한 헌신을 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이 루어진다. 이것은 버네이스의 예언이 예상보다 겨우 몇 세대 뒤에 실현된 것이다. 전 세계적인 선전, 즉 정부와 기업이 대중의 욕망과 바람을 소리 없이 조종하리라는 그의 선견지명이 현실이 되는 데는 인터넷의 폭과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우리는 고대인이 알고 있던 걸 잊은 듯싶다.
세상이 얼마나 부유해지든 우리 삶의 질은 인격의 질에 의해 결정되고, 인격의 질은 고통과 우리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행복을 추구하면 허무주의와 경솔함을 향해 곤두박질치게 된다.
유치해지고, 쉴 새 없이 뭔가를 더 갈망하게 되며, 절대 채울 수 없는 구멍에 빠져들고, 절대 풀 수 없는 갈증을 느끼게 된다.
행복 추구는 타락과 중독, 자기 연민과 자기 파괴의 근원이다.
고통을 추구하면 어떤 고통을 삶 속으로 끌어들일지 선택할 수 있다.
이 선택은 고통을 의미 있게 해 주고, 따라서 삶을 의미 있게 해 준다.
고통은 삶의 보편 상수이므로 고통을 통해 성장할 기회는 삶 속에 늘 있다.
고통을 마비시키지만 않으면, 고통으로부터 눈길을 돌리지 만 않으면 된다.
고통을 맞이하고 그 안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 기만 하면 된다.
고통은 모든 가치의 근원이다.
고통에 무감각해지면 세상에 존재 하는 중요한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다.
고통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장 확고히 지키는 가치관과 믿음이 되는 도덕적 간국을 얻어 준다. 어떤 목적을 위해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부정하면 삶 속에서 목적을 느끼는 능력을 완전히 부정하게 된다.
당신의 삶이 아무리 ‘좋아’지건 또는 아무리 ‘나빠’지건 고통은 존재한다. 그리고 결국엔 감당할 수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걸 받아들일 것인가? 고통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피할 것인가? 프래질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안티프래질을 택할 것인가?
당신이 하는 모든 행동, 당신이라는 존재 전체, 당신이 신경 쓰는 모든 것이 이 선택을 반영한다. 당신의 관계, 건강, 업무 성과, 정서 적 안정, 진실성, 공동체 참여, 인생 경험의 폭, 자신감과 용기의 깊이, 존중하고 신뢰하고 용서하고 인정하고 귀 기울이고 배우고 동정하는 능력 등등이 말이다.
당신의 삶 속에서 이것 중 하나라도 프래질하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고통 회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쾌락과 욕구, 자기만 족을 추구하는 어린애 같은 가치관을 택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문화 차원에서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더 큰 행복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엄청나게 취약해지고, 이로 인해 모든 것이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보이게 된다.
자유는 불편함을 요구한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서양 철학은 전부 '플라톤에 관한 일련의 각주'에 불과하다." 낭만적 사랑부터 '진리'라는 것의 존재 여부, 미덕의 의미에 이르기 까지 어떤 주제를 생각하든, 플라톤은 그것을 상세히 설명한 최초의 위대한 사상가일 가능성이 크다. 플라톤은 생각 뇌와 감정 뇌 사이에 내재적인 구분이 있음을 최초로 시사했다. 방종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금욕을 통해 인격을 쌓아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했다.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서양 문명의 대부임에도 민주주의가 가장 바람직한 정부 형태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민주주의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우리 본성의 가장 나쁜 측면을 필연적으로 해방해서 사회를 폭정으로 몰아간다고 믿었다. 그는 이 렇게 말했다.
"극단적인 자유는 극단적인 노예제로 변화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 도 기대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고안됐다. 사람들은 제 멋대로 행동할 수 있으면 본능적으로 고통을 회피하고 행복으로 향 한다고 한다.
문제가 발생하는 건 사람들이 행복을 성취할 때이다.
왜냐하면 절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란 점 효과 때문에 사람 들은 절대 전적으로 안전하거나 만족스럽게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욕망은 상황에 발맞춰 자라난다.
결국 제도는 국민의 욕망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제도 가 사람들의 행복을 따라가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추측해 보라.
사람들은 제도 자체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타락을 낳는다고 말했 다. 사람들이 가짜 자유에 더욱 탐닉하는 동안, 가치관은 더 유치하 고 이기적인 방향으로 악화되고 시민들은 민주주의 체제 그 자체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어린애 같은 가치관이 자리를 잡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권력 을 위해 교섭하지 않고, 다른 집단이나 종교와 흥정하려 들지 않으 며, 더 큰 자유나 번영을 위해 고통을 견디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즉석에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줄 강렬한 지도자다. 그 들은 독재자를 원한다.
민주주의는 내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 를 기꺼이 용인할 때, 안전하고 건전한 공동체를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때, 때로는 일이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대단히 성숙하고 인격적인 시민을 필요로 한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사람들은 기본적인 인권을 아무런 불편을 겪 지 않는 것이라고 혼동한 듯싶다.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할 자유를 원하지만, 자신을 불쾌하게 할 수 있는 견해는 상대하지 않으려 한 다. 사업의 자유를 원하지만, 그 자유를 가능하게 해 주는 사법 조직 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는 세금은 원치 않는다. 평등을 원하지만, 모 두 같은 쾌락이 아니라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에서 평등이 온다 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자유는 그 자체로 불편함을 요구한다. 불만을 요구한다. 사회가 자유로워질수록 개인은 자신과 상충하는 견해와 생활 방식과 생각을 더 많이 고려하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덜 용인 하고 가짜 자유에 탐닉할수록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 필수인 미덕을 유지하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이건 무서운 일이다. 민주주의가 없다면 우리는 정말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이다. 경험상, 민주적인 대의 제도가 없으면 거의 모든 면 에서 삶은 훨씬 더 나빠질 뿐이다." 그리고 그건 민주주의가 엄청나 게 위대해서가 아니다.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다른 어떤 형태의 정부보다 일을 덜 심각하게 망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처칠 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는 가장 나쁜 형태의 정치 체제다. 다른 모든 정치 체제 를 제외하면 말이다."
모든 사람의 감정을 보호할 게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안티프레질 과 스스로 부여하는 한계를 장려해야 한다.
생각 뇌가 감정 뇌와 더 잘 소통하고 감정 뇌를 더 잘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를 창조하고, 양쪽 뇌를 연합하게 해서, 더 강한 자기 통제라는 환상을 낳아야 한다.
당신이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어떤 희망, 즉 상황이 나아지리라 는 확신을 찾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것, 저것, 그리고 다른 걸 하면, 모든 게 나아질 것이다, 따위 말이다.
미안하다. 나는 당신에게 그런 종류의 해답을 전해 줄 수 없다. 아무도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의 모든 문제가 마술처럼 해결된 다 해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내일의 피할 수 없는 문제를 지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희망을 찾지 말고 이렇게 해보라.
희망하지 말라.
절망하지도 말라.
뭔가를 안다는 듯이 굴지 말라.
애초에 우리를 이런 곤경에 처하게 하는 건 뭔가를 안다는 가정을
이처럼 맹목적이고 강렬하게 감정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더 나은 것을 희망하지 말라. 그냥 더 나아져라.
더 나은 무언가가 되라. 더 인정 많고, 더 회복력 있고, 더 겸손하고 더 절제된 사람이 되라
많은 사람이 '인간 이상이 되라'라는 말을 덧붙이지만, 아니다.
더 나은 인간이 되라.
운이 따른다면, 어느 날 인간 이상이 될 것이다.
(책의 결론)
외부 상황이 달라져도 고통은 언제나 보편적 상수로 존재한다.
평균적인 나의 감정을 우회한 완벽한 행복은 허상이다.
그러니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아질거라는 희망은 버려라.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말고, 고통을 받아들이고, 내가 누릴 수 있는 진짜 자유를 누려라.
진짜 자유는 삶에서 포기, 희생할 것을 선택할 자유다.
그 외의 자유들은 모두 허상이다.
그러다보면 더 나은 내가 되어있을 수도 있지.
(나의 고찰)
언제나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고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 상황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의 인격을 성장시키는 것만이라고
강조하는 책의 내용에 반박하기 어려웠다.
항상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함에도 내 삶이 절대적으로 더 만족스러워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극복할 수 없을거라 믿었던 힘든 일들에도 내 삶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1)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다양한 것을 누리더라도 그것이 전반적이고 장기적인 나의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게임이나 애니의 미소녀 케릭터는 모니터속에 있는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게임이나 애니를 접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기에, 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그 설정을 변경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우리를 좋아한다는 설정, 혹은 우리가 이상형이라는 설정을 넣을수가 있다. -짐레이너w-
병법의 모든 이치는, 이익을 모아서 적보다 유리해지고 강해져서, 적을 제압하는 기술이다. 어떠한 병법의 이치도 이것을 비껴나가지 않는다. -짐레이너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