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인식 부족으로 복지·취업 사각지대 내몰려…국가 미래도 '흔들'
청년재단, 관계 기관과 올해 100명 모집해 노동시장 진입 지원

"그냥 분류번호 보고 옮기면 되는데, 이게 어려워?"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취업준비생 김재영씨(가명·26)는 얼마 전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또다시 좌절했다. 단순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니,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장에서 동료들의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문득 김씨는 자기 자신을 동료들처럼 나무랐다. '왜 이렇게 쉬운 일 처리도 안 되는 거야?'


IQ 71~84,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아닌 '경계선지능인'

김씨는 어릴 적부터 다소 느린 인지와 반응속도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학창 시절 해야 했던 공부도, 대학 졸업 후 준비 중인 취업도, 심지어 좋아하는 만화동호회 활동도 김씨에겐 어느 순간 오르기 힘든 산으로 군림했다. 속한 집단에서 뒤처지거나 은근히 소외되는 일은 김씨에게 익숙한 일상이었다. 가끔 어찌할 바를 몰라 타인에게 조언을 구할라치면 "너뿐 아니라 남들도 다 힘들다" "의지를 갖고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피드백이 돌아올 뿐이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에 김씨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 나섰다. 스스로 병원에 가서 자신이 장애인과 비(非)장애인의 경계선상에 놓인 '경계선지능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경계선지능인은 지능지수(IQ)가 71점 이상 84점 이하(미국 정신의학회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기준)로 지적장애인 수준(IQ 70점 이하)은 아니지만, 복잡한 임상적 특성이 있어 사회생활과 경제활동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말한다. 김씨는 의무기록지를 모조리 뽑아 들고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를 방문했다. 이후 센터에서 자신의 상황과 속도에 맞는 상담, 직업교육 등 체계적인 보살핌을 받고 있다.

경계선지능인은 장애인에도 비장애인에도 속하지 않는 탓에 복지와 취업의 사각지대에 내몰려 있다. 장애인들처럼 학업적·정서적·사회적 어려움을 겪지만 '외형이나 검사 수치로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애인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각종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사회에서 거절감과 소외감만 고스란히 받는 것이다. 누구도 걷어주지 않는 투명한 장막에 갇힌 경계선지능인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답답함 속에 우울증 등 정신건강 문제에 노출될 가능성도 크다.


지금껏 중앙정부와 정치권, 경제계, 시민사회계 등의 관심과 지원은 경계선지능인들에게 거의 미치지 않아온 게 사실이다. 김씨처럼 자구책을 모색하는 경계선지능인은 극히 드물다. 경계선지능인의 가족도 경계선지능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더 큰 문제는 경계선지능인 숫자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3.59%에 이를 만큼 많아(지적장애인 숫자의 6배 수준) 이들을 방치하면 할수록 파생되는 폐단이 일파만파 커진다는 점이다.

'54만 고립·은둔 청년' 문제와도 연결

특히 93만 명가량으로 추산되는 경계선지능 청년들이 사회에서 대거 낙오한다면 노동력, 생산성, 소비시장 등 국가의 미래 자원 확보에 치명적인 타격이 불가피해진다. 사회에서 밀려난 경계선지능 청년들이 고립·은둔 상태로 치닫는 사례도 빈발한다. 청년재단은 54만여 명으로 파악되는 고립·은둔 청년 문제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7조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말 중앙정부가 범정부 대책을 내놓을 정도로 고립·은둔 청년 문제는 전 국가적 어젠다로 떠올랐다. 그런데도 고립·은둔 청년 확대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93만 경계선지능 청년 문제는 철저히 외면받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청년재단과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이 힘을 합쳤다. 세 기관은 4월2일부터 각자의 잠재력을 지닌 경계선지능 청년들이 일상과 노동시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업무 역량 강화 및 일 경험 시범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날 서울 종로구 청년재단에 모인 경계선지능 청년 50명은 맞춤형 컨설팅을 통해 진로를 탐색하고 희망 직종을 설정했다. 이 중 30명은 향후 일 경험 준비를 위한 공통 소양 교육(4주)과 직업 공통 교육(2주), 직무별 맞춤형 교육(2주) 등에 차례로 참여하게 된다. 두 과정을 거쳐 현장 실무가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6명은 기업에서 5주 동안 사무보조와 매뉴얼 테스트 등을 체험할 기회를 얻을 예정이다. 모든 과정은 오는 7월에 마무리된다. 변민수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선임연구위원은 "통상적으로 진행되는 경계선지능 청년 대상 소규모 직업교육에서 벗어나 진로 컨설팅부터 직업훈련, 현장 실무 경험까지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맞춤형 컨설팅은 경계선지능 청년 1인당 평균 1시간씩 진행됐다. 전문가로서 맞춤형 컨설팅에 참여한 임유하 인하대 상담심리대학원 부설 심리언어치료센터 전임연구원은 "경계선지능 청년들의 구직 욕구가 (이전에 상담해본) 일반 청년들보다 더 크다고 느꼈다"며 "상대적으로 우수한 역량을 갖춘 경계선지능 청년들은 인지나 직장생활 등에 대해 자신감이 있고, 실제 적응 가능성도 엿보였다"고 전했다. 이어 임 연구원은 "경계선지능 청년들 가운데 구직 시도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짧게나마 계속해서 일하는 반면 구직 시도를 하지 않는 이들은 일 경험이 아예 없더라"면서 "다만 일 경험이 있더라도 지속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니 역량이나 경력에 관계없이 좌절감과 우울감은 경계선지능 청년들 전반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경험 넘어 실질적인 고용으로 이어져야"

경계선지능 청년의 어머니인 홍세영씨는 "그동안 기관과 가정 모두 경계선지능 청년에 대한 소양 교육 같은 기본적인 부분부터 놓쳐왔다. 이번 시범사업을 기점으로 기본 교육을 충분히 진행하고 일 경험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일 경험도 그야말로 단순한 '경험'에서 끝나지 않고 진짜 고용으로 이어지면 좋겠는데, 아직은 그런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 안타깝다"며 "경계선지능 청년들이 일관성 없이 그때그때 다른 직종의 업무를 경험하는 점도 고용 연계 실패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같은 직종 내에서 '레벨 업' 하며 꾸준히 쌓아갈 수 있는 일 경험을 제공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범사업을 기획한 박기준 청년재단 선임도 경계선지능 청년 고용 지원의 개선 필요성에 공감하며 "시범사업을 통해 경계선지능 청년의 개별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컨설팅 도구와 지원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한다. 다양한 노력의 궁극적인 목표는 경계선지능 청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 증대와 인식 개선"이라고 말했다. 박 선임은 "주위를 둘러보면 경계선지능 청년을 자녀로 둔 상황을 외부에 드러내지 못하는 부모가 대다수"라면서 "경계선지능 청년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당사자와 가족의 상황을 개선하는 일에 힘쓸 때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가 정말 많이 일어날 거라고 본다"고 했다.

청년재단과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은 5월말에 똑같이 경계선지능 청년 50명을 모집해 2차 업무 역량 강화 및 일 경험 시범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박주희 청년재단 사무총장은 "사각지대에 놓인 경계선지능 청년들이 이번 사업을 통해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며, 관련 제도와 정책이 보완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전문 센터, 전국에 단 한 곳…법·제도 마련은 지지부진

공적 예산이 투입된 경계선지능인 전문 센터는 전국에서 단 한 곳,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뿐이다. 이 센터가 문을 연 시점도 불과 2년여 전인 2022년 6월이다.

센터의 별칭은 '밈(mim)센터'다. 모방을 거쳐 뇌에서 뇌로 개인의 생각과 신념을 전달한다는 뜻의 단어 '밈'에 경계선지능인의 변화를 이끈다는 의미를 더한 작명이다. 밈센터는 경계선지능인 대상 평생교육사업, 자립지원사업과 연구기획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역시 가장 인기가 높은 사업은 직무 적성 찾기부터 자기소개서 작성, 입사 지원 후 피드백까지 개별 맞춤형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자립지원사업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경계선지능 청년들에게 밈센터는 구세주이자 유일한 동아줄 같은 존재다. 이용 대상이 '서울시에 거주 또는 소재(재학·재직) 중인 시민 중 경계선지능인 및 가족'이다 보니, 단지 이 센터를 이용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의 이주를 결정한 경계선지능인과 그 가족도 있다.

이미지 대구교육대 특수통합교육과 교수는 "앞서 구립복지관이나 시립복지관 등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진행하던 조그마한 경계선지능인 관련 프로그램이 없진 않았지만, 그런 프로그램이 체계와 연속성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며 "밈센터는 서울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경계선지능 청년들의 구직뿐 아니라 이성교제, 가정을 꾸리기 위한 자립 등에 이르는 전반적인 문제를 포괄하며 체계를 갖춰나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도 밈센터와 같은 경계선지능인 지원센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관련 움직임은 미미한 실정이다. 안예지 경일대 평생교육학부 교수는 "지자체들이 경계선지능인 관련 조례를 만들고 있으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실질적으로 어떻게 지원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전국 74개 지자체에서 경계선지능인 관련 조례를 제정한 상태다. 국회에서는 2023년 4월부터 발의된 경계선지능인 지원에 관한 의안 5건 중 '느린 학습자(경계선지능인) 교육지원 종합대책 마련을 위한 촉구 결의안' 1건이 가결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4건의 법률안이 모두 계류 중이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네덜란드는 경계선지능인을 지적장애인과 동일한 집단으로 간주하고 지적장애인에게 제공되는 서비스를 같이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근로나 기초생활의 어려움을 근거로 경계선지능인을 지원하고 벨기에와 캐나다는 자폐 범주성 장애처럼 다른 장애와 경계선지능이 같이 나타날 때 지원한다. 안 교수는 "일단 우리나라는 정책 대상을 특정하는 기본부터 되어 있지 않다"며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지원 대상과 범위는 어디까지로 설정할지 등 정책적 합의를 이뤄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변민수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선임연구위원은 "이번 업무 역량 강화 및 일 경험 시범사업을 마중물 삼아 경계선지능 청년들의 노동시장 진입을 적극적으로 돕고 취업으로도 속속 이어지게 하려면 밈센터 같은 지원조직 확대는 물론 국내 전체 지원조직을 총괄하는 경계선지능인 고용지원센터(가칭) 구축 등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