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오징어 게임이 끝났다. 1편의 열광에 비하면 3편은 다소간의 혹평으로 마무리되는 듯하다.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물음의 전제는 인간은 대부분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쓰는 것을 넘어서 살인까지 정당화 하는 쓰레기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전부가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다는 점.

물음은 하나다.  쓰레기들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감독은 대답을 욕망의 쓰레기인 인간이 쓰레기가 아닐 수 있을 가능성에서 찾는 듯하다. 그것을 위해 현주와 할머니를 죽이고 최후에는 성기훈도 죽인다.

그런데, 이 점이 공감을 못 받는 듯 보인다.  현주는 그렇다 해도 타인의 자식을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란 것이다.  할머니가 예수를 희생시킨 성모 마리아냐? 그런 신화적 설정에 리얼리티를 주는 게 가당키나 하냐?  최후에 쓰레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성기훈은 그런 허무맹랑함의 절정일 것이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예수 정도의 인격이나 희생이 아니면 쓰레기들 속에서 산다는 게 불가능하구나.  감독의 해답은 정말 비현실적이구나.

그런데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지난 겨울이 떠오른다.  내란 쓰레기에 대한 수많은 저항들.  응원봉 시위야 그렇다치지만, 총부리를 잡은 여자,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은 청년들은 비현실적인가 아닌가?
내란이 성공했다면, 자신의 직업 생계를 잃어버리는 것을 넘어 붙잡혀가 받아야 하는 수많은 고문과 처형의 가능성에도 소극적 업무수행을 한 군인들과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저항한 소수의 지휘관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비현실성이 단지 일회적인가?  한강의 소설적 보고를 읽지 않더라도 동학부터 빛의 저항까지 사실 우리는 수많은 비현실의 희생들을 역사적 상식으로 배워왔지 않은가?

평범한 쓰레기를 위해 희생한다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이냐는 생각은 이런 역사적 현실 속에서 비현실적 지적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순간 소름이 돋는다.

황감독은 아무리 생각해도 123내란이라는 비현실적 사태를 겪은 후 쓰레기와 희생에 대한 서사를 구성했다면  더 현실적인 오징어게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적 픽션을 능가하는 내란이란 참으로 스펙타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