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문고판이 나온 이후 꾸준히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리고 남한에서도 유명한 소설 '불모지대'의 실제 주인공이 세지마 류조이다

세지마 신화라는 말이 생길만큼 세지마 류조는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존경받았다





세지마 류조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30살의 나이에 작전참모로 400만 일본군의 생사를 좌우하는 중책을 맡아 수행했다





잘 나가던 세지마 류조는 세계 2차 대전 패전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1946년 12월 소련측 증인으로 출두

자신은 문서담당이었을 뿐, 대소련 침략작전과는 관계가 없다고 거짓 증언하고 위기를 모면한다





그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전범으로 복역한 후,

유엔의 전쟁포로 송환 결의에 따라 세지마 류조는 11년간의 유형생활을 끝내고 일본으로 귀국한다





당시 고도 성장을 구가하던 일본 국내 분위기 속에서

이토츠 상사(Itochu) 에 입사한다

평사원으로 출발한 류조는 10년만에 전무로, 20년만에 회장으로 승진했다





류조의 이런 놀라운 성공에는 한일 커넥션이 있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 미국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하고, 남한의 지도층으로 부상한 친일 인맥을 통해서

사업 우선권을 따냈기 때문이다





남한의 친일 매국세력과 일본 수구와의 인맥은 김종필과 고다마에서 시작되었다

 

 

고다마는 일본 수구의 최대 거물로 '밤의 수상'이라고 불리던 인물이다.




일본 참전의 비밀





한일협정의 청구권 문제에도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고다마의 활약이 돋보인 것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다마는 맥아더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일본 참전의 비밀





이러한 일본의 한국전 참전 요청은 일본 수구 주도로 미국의 가려운 곳을 자진셀프 긁어주며, 일본 수구가 미국으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계기로 이용되었다. 이 사이에서 재물로 바쳐진 것이 바로 남한이었으니, 한반도를 여전히 잃어버린 자신들의 식민지라 여기고 있는 일본 수구와 미국의 밀약 덕분에 남한은 주권도 없는 미국의 속국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다. 남한은 전범 국가 일본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는 샌프란시스크 조약의 서명 당사자 자격도 얻지 못했다. 





- 김종필 -

 

김종필은 '반공'을 앞세운 5.16 군사쿠테타 세력의 소위 '혁명공약'을 만든 브레인이었고, 5.16군사쿠테타 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위장회사를 차려놓고 물 밑에서 정당 창당작업을 했던 주인공이다. 또한 쿠테타가 성공하자 마자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일본의 대표적인 수구 오히라와 한일협정 비밀회담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던 김종필의 끈질긴 생명력과 성공가도는 박정희가 제거된 이후에도 시들어들지 않았다. 9선 국회의원이라는 간판에서 그치지 않고, 김대중 정부에서 국무총리까지 꽤차고 앉은 것이다.





김종필과 고다마에서 시작된 한일 인맥 즉, 남한의 친일 세력과 일본 기업, 정치인과의 검은 커넥션은  한일협정을 통해서 본격화되었다.   한일협정 추진과 일본 기업들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댓가로 남한의 공화당은 일본 기업들로부터 돈을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 백년전쟁, 프레이저 보고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일협정 3억불의 비밀 





그리고 한일협정 프로젝트 혹은 남한 대선 프로젝트에 관여함에 있어서, 사업우선권 부여라는 형태로 특정 일본 기업과 일본 정치인들은 큰 이익을 챙겼다. 이것은 경제적으로는 미국이 남한에 당근과 채찍을 구사하며 강제이식한 '수출주도형 경제'라는 간판을 내건 일본에 대한 남한의 경제종속 이라는 경제제도 안착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었다. 





일본과 남한의 검은 커넥션은 정경유착에 다름 아니었고,


일본과 남한의 검은 커넥션이 이토츠 상사에서  세지마 류조가 놀라운 성공신화를 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일 커넥션은 군사정권 내내 계속되었다.


문민정부에 들어서서는 한일 커넥션이 사라졌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세지마 류조의 활약도 멈추지 않았다. 세지마 류조는 일본 역대 수상의 자문역으로 활동하며


히로히토 왕의 연호인 "쇼와의 참모"라는 별칭을 얻었다.





세지마 류조는


일본이 영국과 미국에 대항해 싸운 전쟁은 자존.자위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대동아 전쟁이 침략전쟁이었다는 말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세지마 류조의 인식이


 전쟁 전후에도 전혀 바뀌지 않고 있는 일본 수구의 인식을 보여주는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 피해자라는 인식은 일본 수구에게만 한정된 것인지는 의문이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책, 영화, 드라마 만화 등 광범위한 미디어를 통해서


여전히 자신들을 전쟁 피해자로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만화로 제작되었다가 후에 실사, 영화로도 제작되면서 일본에서 히트를 친 만화 '반딧불의 묘'는 미야쟈키 하야오의 친구인 다카하타 이사오라는 거장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일본인 남매가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서서히 죽어간다는 내용으로 일본을 오로지 전쟁의 피해자로만 그리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역사드라마 '불모지대' 

http://bestakas.tistory.com/163





즉, 일본 수구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것은 미국 때문이고, 매우 억울하게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의 전범세력은 2차 대전 후 일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미국에 빌어붙었고, 다행히 미국표 나치가 미국의 권력을 장악한 덕분에 서로 서로 이용해 먹으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여태 미일동맹을 화려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 수구야 말로 기회만 되면 이전에 자신들이 당한 설욕을 갚아주리라 벼르고 있는 미국의 가장 위험한 잠재적 '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극단 수니무슬림 전사를 양성하고 지원하며 자신들에게 가장 위험한 '적'을 키우고 있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게다가 남한 대통령으로 일본 수구의 부하였던 박정희가 대통령이라니, 환상적이다.


그러므로 미국에게 남한이 일본의 속국이 되는 건 전혀 부담이 없었다.





프레이저 보고서, 민족연구소




 출처 http://dancingwithwaves.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