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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락인 사건전문기자] 지난 1994년 8월 14일 서울 성북구 월곡동 ‘황금장 여관’ 주인의 딸 이향정 양(14 ·중3)이 행방불명됐다.

 

얼마 후 주인 전옥수 씨(여‧49)는 집안에서 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메모지를 발견했다. 자필이 아닌 타자기로 작성된 메모에는 “엄마 나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서 그 남자를 따라가기로 했어요. 그러니 나 찾지 마세요. 그 아저씨 참 좋은 분이예요. 엄마도 나 잊고 아저씨랑 행복하게 사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전 씨는 딸이 가출한 것으로 믿고 경찰에 가출신고를 했다.

 

그런데 6일 후인 21일 전 씨마저 행방불명된다. 여관에는 전 씨의 동거남인 성낙주(43) 혼자 남게 됐다. 성 씨는 마치 자신이 여관 주인처럼 행세했다. 어느 날 전 씨의 친구가 “옥수 어디 갔느냐?”고 전화하자 성 씨는 “가출한 딸을 위해 절에 불공 드리러갔다”고 둘러댔다.

 

전 씨의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몇 십 년 지기이자 사소한 일까지도 자신과 상의하는 친구가 아무 말도 없이 갔을 리가 없었다. 모녀가 연이어 사라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그녀는  “친구 딸이 가출하고, 친구마저 사라졌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몇몇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당시 몇몇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사진출처=자료사진, '한겨레' 1994년 8월 25일자 지면 합성)

 

행방불명된 모녀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여관에서 가까운 곳에 모녀가 살던 집을 찾아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그러다 전 여인의 딸 이 양이 가출할 때 타자로 쓴 메모지를 발견했다. 경찰은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제 중학교 3학년 밖에 되지 않은 이양이 남자친구와 가출한 것 자체가 미심쩍었다.

 

이 양은 집에서는 착한 딸, 학교에서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엄마와의 사이도 좋았고,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 이 양이 메모 한 장 달랑 남겨놓고 가출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자필이 아닌 타자기로 남긴 것도 의아했다.

 

경찰은 22일 오후 8시쯤 성낙주를 경찰서로 임의 동행해 조사를 벌였다. 이 양과 전 씨의 행적을 캐묻기 시작했다. 성 씨는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했다. 모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받거나 말문이 막힐 때면 염불을 외워대며 피해가려고 했다.

 

이 양이 남겼다는 메모를 유심히 살펴보던 수사팀은 이상한 것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맞춤법이 틀린 글자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옆’으로 써야 할 것을 ‘엽’으로 쓴 것인데, 단순 오타가 아니라 잘못 익힌 습관으로 보였다. 수사팀은 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성 씨에게 자필 진술서를 작성하게 한 다음 일부러 ‘옆’자가 들어가는 문장을 유도한 것이다. 경찰의 예상은 적중했다. 성 씨는 ‘옆’으로 써야할 글자를 ‘엽’으로 적은 것이다. 이로써 이 양의 메모는 조작된 것이며, 성 씨가 만든 가짜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번에는 전 씨의 실종 당일 성 씨의 알리바이를 캐물었다. “전 씨가 불공드리러 간 날 당신은 뭘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성 씨는 “경동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이 그의 소지품을 검사해보니 당일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의 영수증의 나왔다. 그의 거짓말이 들통 나는 순간이다.

 

경찰은 모녀의 실종에 성 씨가 깊이 개입돼 있다고 확신했다. 이제 그의 자백을 받아야만 했다. 경찰은 성 씨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모르쇠로 버티거나 염불로 일관하던 성 씨는 더는 안 되겠던지 얼굴을 감싼 채 범행일체를 자백했다. 모녀는 가출하거나 불공드리러 간 것이 아니라 성 씨에게 살해당한 후 암매장 당한 것이었다.

 

참혹하게 살해 후 암매장

 

그는 왜 모녀를 죽인 것일까. 성낙주는 1977년 출가해 태고종 종적으로 한동안 승려로 활동했다. 1984년 승적이 박탈된 후에는 떠돌아다니며 생계를 해결하는 처지가 됐다. 그 후 승려 생활할 때의 가락으로 미아리에 철학관을 열었다. 성 씨는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 셋을 두고 있었지만,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아내가 가출하자 아이들은 고향 부모에게 맡겨 놓은 채 자신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혼인 상태였다.

 

1993년 중순쯤 전옥수 씨가 성 씨의 철학관을 찾아 인생 상담을 하면서 두 사람은 처음 알게 된다. 전 씨가 남편 없이 자신명의로 된 여관을 운영한다는 것을 알게 된 성 씨는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점과 사주를 봐준다는 핑계로 전 씨의 집에 자주 들락거렸다. 전 씨가 “허리가 안 좋다”고 하자 침과 뜸을 놔주고 지압시술을 해주다가 내연관계로 발전하고 동거까지 하게 된다. 성 씨는 철학관을 정리하고 전 씨의 집으로 들어왔다.  

 

전 씨는 성 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 한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그러다보니 무일푼으로 밥만 축내는 성 씨가 달가울 리 없었다. 사사건건 다툼이 잦아졌다.

 

이 양이 실종되기 하루 전인 13일 저녁 성 씨와 전 씨가 심하게 말싸움을 했다. 이를 지켜보던 이 양이 성 씨에게 “요즘 엄마와 자주 싸우는데 그만 괴롭히고 이젠 집에서 나가달라”고 말했다. 이 양은 성 씨가 생활능력도 없고 엄마와 다툼이 잦자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이 양한테 면박을 당한 성 씨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결국 이 양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다음날 새벽 5시쯤 여관 인근에 있던 전 씨의 집으로 찾아간 성 씨는 작은 방에서 혼자 자고 있던 이 양을 목 졸라 살해했다.

시신처리는 엽기적이고 잔인했다. 그는 이 양의 시신을 욕실로 옮겨 식칼로 목과 팔, 다리 등을 수 십 차례에 걸쳐 토막 내 검정 비닐봉지에 넣은 후 종이상자에 나눠 담았다.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다시 라면상자에 넣은 후 테이프로 밀봉했다.

 

같은 날 이복동생(충북 제천시 송학면)에게 전화를 걸어 “고사를 지낸 돼지머리를 버려야 하니 도와 달라”고 했다. 성 씨의 말을 의심없이 들은 이복동생은 자신의 그레이스 승합차를 타고 왔다. 성 씨는 이복동생의 도움을 받아 오후 1시쯤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읍 구암리 북한강휴게소 인근 야산에 이 양의 시신을 암매장했다. 성 씨는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미리 구입해 둔 타자기로 이 양이 가출한 것처럼 메모를 작성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양의 죽음을 가출로 위장하는데 성공한다.

 

한 번 시작한 살인은 두 번째는 더 쉬운 법이다. 21일 새벽 3시쯤 성 씨는 여관 안내실에서 전 씨와 또 다시 심하게 다퉜다. 전 씨가 “재산도 없이 남자 구실로 못하는데 어떻게 당신을 믿고 사느냐”고 말하자 이에 격분했다.

 

그는 같은 날 오전 8시쯤 여관 107호에서 잠자던 전 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수술용 칼로 시신을 토막 낸 후 살점은 도려내 정화조에 버렸다. 나머지 뼈 등은  라면상자 3개에 나누어 담고 포장했다.

 

토막 시신이 든 상자는 여관 안내실 계단 밑에 숨겨뒀다가 다음날 의붓형인 김 아무개 씨(50)의 렌터카를 이용해 강원도 원주군 문막면 동화2리 고속도로공사장 부근에 포크레인을 동원해 암매장했다. 성 씨는 이 양을 살해한 지 이틀 후 의료기기 가게에서 수술용 메스를 구입했는데, 이때부터 전 씨 살해를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씨는 범행동기에 대해 “이 양이 나에게 ‘엄마와 사이도 좋지 않으니 나가달라’고 대든데 앙심을 품었고, 전 씨는 ‘남자구실로 제대로 못 한다’고 구박해 모녀를 살해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경찰은 성 씨의 말을 액면가로 믿지 않았다. 숨진 전 씨가 황금장 여관 이외에도 서울 영등포 등에 수억 원대의 부동산을 갖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재산을 노린 계획적인 범행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시신 상태에 경찰도 경악
 
경찰은 암매장한 시신을 발굴한 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녀의 시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훼손돼 있었다.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잘려 있었고, 손끝 지문까지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심지어 얼굴 피부까지 모두 벗겨놓았다. 시신이 발굴될 것에 대비 신원확인을 하지 못하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했던 것이다.

 

경찰은 성씨를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하고 재판에 넘겼다. 같은 해 12월 21일 서울형사지법 합의23부(김황식 부장판사)는 검찰 구형대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성 씨는 현재 교도소에서 23년째 복역 중이다. 억울하게 죽은 모녀의 원혼은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다.

 

 ‘입양인-사형수 감동사연’ 놀라운 반전

 

미국인 ‘애런 베이츠’는 6살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됐다. 그는 1996년 미 육군에 입대한 뒤 친부모를 찾기 위해 주한미군 근무를 자원했다. 그가 친부모를 찾는 사연은 방송 등 매스컴을 통해 보도됐다.


이 사연을 본 성낙주는 자신이 ‘애런 베이츠’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했다. 그는 1999년 9월 교도소에 의료봉사를 나온 한 의사에게 자신의 사연을 전했다. 그리고 2000년 7월28일 광주교도소 면회실에서 성낙주와 애런 베이츠가 극적으로 만난다. 교도소 측은 이날 부자상봉을 위해 특별면회와 함께 다과자리도 마련해 줬다. 언론에서는 ‘사형수와 아들 27년만의 상봉’이라며 감동적인 미담으로 보도했다.

 

▲사진출처='KBS스페셜' 방송화면 캡쳐


그런데 반전이 생긴다. 2003년 'KBS스페셜'은 에런 베이츠와 성 씨의 사연을 제작하면서 두 사람의 ‘유전자검사’를 의뢰했다. 놀랍게도 친자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도 2007년에 개봉된 영화 '마이파더'는 두 사람이 친자관계인 것처럼 모티브를 설정하면서 논란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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