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徳島男児失踪事件
(松岡伸矢くん行方不明事件)

1989년 3월 7일, 일본의 시코쿠지방 도쿠시마 현 사다미츠 정에서 일어난 미스테리한 어린이 실종 사건으로 당시 만 4세였던[1] 마츠오카 신야 군이 아버지의 시야에서 멀어진 20초 사이에 실종된 사건이다. 일본 3대 미해결 어린이 실종사건 중의 하나로 꼽힌다.

2. 20초만에 사라진 아이
사건의 발단은 신야의 외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야는 가족과 함께 이바라키현(茨城県) 우시쿠 시(牛久市)에 살고 있었는데, 신야의 외할머니, 즉 신야의 어머니 마츠오카 케이코의 친정어머니가 사망하자, 온 가족이 도쿠시마 현 코마츠시마 시에 가서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들은 코마츠시마 시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사다미츠 정에 있는 케이코의 친척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인 3월 7일, 신야의 아버지인 마츠오카 마사노부는 자신의 아이들과 친척, 조카들을 데리고 집 근처를 가볍게 산책했다. 아침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산책은 10분여 정도로 끝났다.

마사노부의 진술에 따르면, 친척집에서 현관까지 10m 정도의 돌계단이 있는데, 이때 신야가 분명 자신의 뒤를 따라서 현관 앞까지 왔었다고 한다. 신야는 좀 더 산책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마사노부는 빠른 걸음으로 돌계단을 지나서 집 앞 대문으로 가서, 안고 있던 둘째 아들을 부인 케이코에게 넘겨주고 다시 현관 밖으로 나왔는데, 현관 앞에 서 있어야 할 신야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마사노부가 둘째 아들을 부인에게 건네주고 현관으로 나오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20초 정도였다.[2] 마사노부는 신야가 근처에 갔나 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신야를 찾을 수 없자 온 가족들이 나서서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도무지 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고, 친척의 연락으로 마을의 소방대원들도 동참해서 수색했지만 신야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오전 10시에 경찰에 신야의 실종을 신고했다.

처음에는 신야가 근처 산을 헤매다가 실종된 걸로 여겨서, 관할 경찰서 인력의 절반을 비롯해 현경기동대, 마을 소방대원, 자원한 일반 시민 등 100여명이 나서서 산을 수색했다. 그럼에도 신야를 찾지 못하자, 다음날에는 수색 인원을 배로 늘려 200여명이 동원되었고, 3개월 동안 수색을 벌였지만 신야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사건 현장인 케이코의 친척집은 길목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라서 외부인의 출입이 거의 없었던 데다가, 마사노부의 시야에서 신야 사라진 시간이 불과 1분도 안 되는 매우 짧은 시간이라서, 그 사이에 신야를 누군가 납치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일이었기에, 경찰은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건 현장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밭이 있었는데, 그 밭에서 일하던 마을 주민들은 "외부에서 온 차 같은 건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더군다나 신야의 가족이 온 것은 전날로, 마을 사람들은 신야의 가족이 온 것을 신야가 실종된 날에야 알았다고 한다. 뺑소니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경찰의 수색 결과 아무런 교통사고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3. 미스테리한 전화
신야의 가족들은 도쿠시마의 친척집에 남아서 신야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게 되자 3월 17일에 이바라키 현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3월 16일, 도쿠시마의 친척집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을 이바라키현 세이케이 유치원[3]에 다니는 나카하라 마리코의 어머니라고 말하면서, "세이케이 유치원 달님반에서 신야의 실종에 가족들을 위로하려고 위문금을 모았는데, 가족들이 언제 돌아오시느냐??"라고 묻자, 케이코는 "내일 돌아갈 예정"이라고 대답했고, 통화가 끝났다.

신야의 가족이 돌아간 뒤, 며칠이 지나도록 위문금을 전달하겠다는 소식이 없자, 신야 가족이 먼저 세이케이 유치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치원 측으로부터, "위문금을 모은 사실이 없으며, 나카하라 마리코라는 학생도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당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케이코에게 전화를 건네준 마사노부는, 전화를 건 사람이 어미(語尾)가 올라가는 도쿠시마 사투리를 썼던 것을 기억해냈다. 

이 전화가 미스테리한 것은, '만약 이바라키 현에 사는 사람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면, 어떻게 신야 친척집의 전화번호를 알고 전화를 걸었을 것이며, 반대로 도쿠시마현에 사는 사람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면, 어떻게 신야가 다니던 유치원 이름을 알았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아이를 납치한 도쿠시마 여자가 아이에게 다니는 유치원 이름을 물어 가족들의 귀향 날짜를 알아내려는 의도일 수 있다. 신야를 납치한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있지도 않은 위문금 지급을 미끼로 신야 가족의 귀향 날짜를 알아볼 이유가 없고, 이바라키현에 사는 사람이 굳이 먼 도쿠시마까지 가서 아이를 납치할 이유도 없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전화를 건 사람은 분명 신야네 가족의 신상을 알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지만, 이 전화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는 되지 못했다.

4. 신야에 대한 목격담
이후 신야의 가족들은 TV에 출연하고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신야의 행방을 찾았지만, 끝내 신야의 행방을 찾을 수는 없었다. TV 출연으로 일본 각지에서 신야를 봤다는 목격담이 나왔지만, 신빙성 있는 목격담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신빙성 있는 목격담으로는, 2000년에 케이코 친구의 지인이 전한 목격담으로, 신야가 사라진 다음 달에 도쿠시마 현의 히와사쵸 해안에서 신야와 비슷한 남자아이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에 따르면, "30대 후반의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부모로 보기에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부모라면 아이에게 뭔가 말을 걸거나 할 텐데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남자아이는 얼굴도 신야와 많이 닮았다" 라고 말했다.

목격자는 도쿠시마에서 자란 사람이었고, 신야의 실종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다가가자, 남자가 아이를 숨기려는 듯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근처에 세워둔 흰색 자동차에 타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남자가 북한 공작원이고 신야가 납북된 게 아니냐는 주장을 펴기도 했지만, 실상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대개 납북 일본인들은 주로 성인들이었고,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일본인으로 위장해 세계 각국에 침투시킬 목적으로 납치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 공작원이 사건 당시 고작 4살밖에 안 된 남자아이를 굳이 납치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5. 와타나베 마리의 실수와 정체불명의 제보자
사건 몇 년 후, 이 사건에 대해 어떤 프로그램에서 방송을 하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갈 무렵에 한 통의 제보 전화가 왔다. PD가 그 전화를 받았는데 제보자는 어떤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저는 카와사키에 사는 XX라고 합니다. 제가 신야의 행방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제보하려고 전화했습니다. 단, 절대 제 이름이 밝혀져서는 안 됩니다. 부탁드립니다."고 PD에게 익명을 보장해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그만 그걸 전달하는 과정에서 미스가 나버렸다.

당시 진행자였던 와타나베 마리라는 아나운서는 그 전달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만 "카와사키시에 사는 XX씨(실명을 밝혔다)께서 사건에 대한 제보를 해주셨습니다"라고 한 뒤, 남자 진행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전화를 건 남자는 "나는 분명 익명으로 해달라고 했는데, 내 이름을 밝혔으니 말을 할 수 없다"라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와타나베 마리와 남성 아나운서가 "가족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며 다시 전화를 걸어줄 것을 간청했지만, 끝내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