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ㅅ ㅣ발 박정희가 잘 못한것 열가지를 말해도 (이만큼 먹고 살게 해줬다)는 말 한마디로 다 용서가

된다고? 지롤 죶까고 있네 진짜...

 

 

먼저 한가지 언급하자면 박정희의 5.6쿠테타가 일어나기 직전의 4.19 전후에 분출했던 국민들의 열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4.19혁명 지도부는 국민들의 열망을 담은 요구를 명시하고

그것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었는데... 그 요구들은 다음과 같다.

 

① 정치적 민주주의,  ② 평등하고 부정부패 없는 정의로운 사회, ③ 서민에게 유리한 공정하고 자립적인

경제, ④ 제국주의 열강이 강요한 냉전체제 반대와 민족통일...

 

 

정치.사회 상황

그러나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민주주의도 거의 자동적으로 확립된다는 부르주아 근대화 이론을 내세우

면서... '먹고 살수 있어야 민주주의도 가능하다'는 논리로 위의 국민적 열망을 일거에 말살시켜버렸다.

 

오히려 스스로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박정희 정권은 더욱 권위적이고 야만적이

돼 갔다. 사회는 군대처럼 운영됐다. 경찰은 ‘바리깡’을 들고 다니며 백주대낮에 청년들의 머리를 밀고,

자를 들고 다니며 여성들의 무릎과 치마 사이 길이를 측정했다. 중앙정보부는 수만 명의 요원을 동원해

사회를 감시했다. 반정부 인사뿐 아니라 술김에 박정희를 비난한 평범한 사람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됐다.

온갖 고문과 납치, 암살, 처형이 일상화했다.

 

박정희는 18년 집권 기간에 계엄령, 위수령, 국가비상사태 선포 등 군대를 발동하거나 그에 준하는 억압

조처를 8번이나 취했다. 거의 2년에 한 번 꼴로 군대를 풀어 체제를 유지한 것이다.

 

 

경제 상황

급속한 자본축적을 하기엔 국내 자원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박정희는 외국 자본과 외화 획득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정의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이 대표적이다.

박정희는 일본 자본을 유치하는 대가로 과거 일본이 저지른 악행들을 사면해 줬다. 이는 대중의 정당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었다.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을 자청했다.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참전을 두고 “한민족이 반도 생활의 울타리를 타파, 처음으로 해외에 웅비한 가장

특기할 만한 일대 전환점을 기록한 역사적 이벤트”라고 떠벌였었다.

 

한국군은 1964∼73년에 연인원 32만 명이 참전했다. 4천6백87명이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이 부상했다.

그리고 “4만 1천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민간인 9천여 명을 학살했다. 결국 가난한 한국군

병사들과 베트남 민중의 피를 대가로 경제성장의 종잣돈을 마련한 것이다.

 

외자 유치를 위해 매춘 관광을 조장하다

박정희는 ‘무공해 외화획득사업’의 일환으로 매춘관광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은근히 조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72년 국제관광공사는 “관광진흥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한국 고유의 풍류인 기생촌과

누드쇼 등을 볼 수 있는 누드촌”을 만들었다. 목적은 "보다 많은 외화를 획득”이었다.

 

저임금 전략

박정희 시절 고속성장은 노동자들의 막대한 희생을 바탕으로 했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최고의

산업재해율, 극단적으로 낮은 저임금은 박정희식 성장 전략에 필연적이었다.

 

다음은 (브루스 커밍스)가 박정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대통령 각하 ……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서 ……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 저는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사회 공공 복지

1965년 보건부분 예산 비율은 한국0.1퍼센트로 베트남 0.6퍼센트, 인도 0.7퍼센트 세계 최저를 기록함.

게다가 정부 예산 중 전체 보건복지비 비중은 가파른 경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줄어들어서

1962년 2.28퍼센트에서 1976년 1.83퍼센트로 계속 줄어들기만 했다.

 

1963년 의료보험법 제정 그 뒤 10년이 지난 1973년에도 가입자 수는 4천 명에 불과했고... 1976년 들어

의료보험 가입 대상자가 5백 인 이상 사업체로 확대됐지만,  사람들은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질 못했다.

심지어 1972년 대도시 주민들조차 질병 치료를 위해 병원을 이용하는 경우는 21.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농촌의 경우는 2∼3퍼센트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 그나마 제대로 기능한 복지는 체제 유지와 관련된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뿐이었다. 

 

박정희는 ‘선성장 후분배’를 운운하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분배를 억압했지만, 가진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아무리 일해도 실제 생활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부정부패

박정희가 부정부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두환이 자기 재산이 29만 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쿠데타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은 4대 의혹 사건 등으로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비난을

들어 왔다. 사실 부정부패는 박정희식 경제모델, 즉 국가와 재벌의 유착과 상호의존을 유지시키는 핵심

메커니즘 중 하나였다. 수출재벌은 국가의 막대한 특혜를 입어 돈을 긁어모았고, 박정희 정권은 이들

에게서 막대한 정치자금을 뜯어냈다. 정권과 유착한 부유층들은 각종 투기로 불로소득을 쌓아갔다.

 

한홍구의 추산에 따르면 박근혜 일족이 물려받은 재산만도(정수장학회, 영남대, 육영재단 등)  가치가

10조 원에 가깝다. 

  

결론

박정희 그 개 시벨 독재자 ㅅ ㅐ끼의 덕으로 이만큼 먹고 살만해졌다고 믿는 새퀴들은 어디가서 평생

머슴살이나 해라... 주인님 덕분에 먹고살만 해졌습니다요.. 이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