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에 아주가끔 전화통화 한번하고 한두번 찾아간다고,
시부모를 모시고 산다고하는 사람은 얘 빼고 아마도 없지?
문빠 칼럼리스트와 찢빠 홍위위원장의 피터지는 개싸움....

                           [시누이 김지나 글]
'저는 김은경 민주당 혁신위원장의 시누이 입니다'

그녀가 금감원의 부원장으로 취임을 했을 때에도, 아버지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셨을때에도, 그리고 민주당 혁신위원장으로 이름을 날릴때까지도 조용히 지나가길 바랬다. 하지만 며칠 전 노인폄하 논란을 일으키고 '남편 사별 후 18년간 시부모님을 모셨고 작년 선산에 묻어 드렸다. 그래서 어르신에 대해 공경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산 적은 없다'고 말한 내용을 보고서 이는 도를 넘는 행위이고 이런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아 마땅하기에 글을 쓰게 되었다.

단적으로 남편이 살아 있을때를 포함 단 한차례도 시부모를 모시고 산 적이 없고 공경심은 커녕 18년동안 김은경에게 온갖 악담과 협박을 받으셨고 돌아가시면서도 쉬이 눈을 감지 못하셨다. 이에 더 이상 돌아가신 분들을 욕보여드리지 않기 위해 어렵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글을쓴다.

저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도미한 지 20년이 되었고 저와 남편은 사업을 하고 있고 아이 셋을 건강하게 키우고 있는 보통 사람이다. 조금 덧붙이면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고 미주 한국일보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김은경은 1992년 제 오빠와 결혼을 했다.
사건은 2006년 1월에 일어났다.

오빠가 자신의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집에 아이들과 아내가 같이 있고 초저녁이었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모두가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가족은 부검을 원했지만 아내인 김은경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강하게 부인했다.

200명이 넘는 오빠 친구들이 장례식에 왔다.

한결같이 하는 말은 '항상 웃고 다니고 돈도 잘 쓰는 친구인데 이런 일이?' '자식 사랑이 대단한 친구인데 자식 앞에서?' 등의 발언을 하며 믿기지 않다는 말을 했다.

김은경은 오빠가 떨어져 죽은 그 순간부터 장례가 끝난 우리가 본 어떤 순간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장례가 끝난 바로 다음 날 남편의 사망 신고를 한 건 물론이고 오빠가 타고  다니던 고급 차르 바로 처분하더라. 그리고 무서워서 살 수 없다며  강남 서래마을로 서둘러 이사했다.

더욱 황당한 일은 어수선한 틈을 타 아빠의 사업체를 자신의 친동생 이름으로 바꾼 일이다.

사업체까지 며느리가 가로채 갔으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결국, 어머니가 그 충격으로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모셔지고 아버지 또한 기력이 다하셔 시골로 터전을 옮기셨다.

(김은경이)선산에 묻혀 드렸다는 말을 했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 흙 한 줌 뿌리라는 말에 손사래 치며  거절을 한 장본인이 김은경이고 이번 노인폄하 논란의 시작이 된 그 아들 또한 눈을 부라리며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에게 흙 한 줌 넣어드리지 않았다.

이번 노인폄하 사태를 보면서 역시 인간은 본성을 숨길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저는 피 토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이 절대로 평범하게 살아서도 안 되지만, 높은 위치에서 국민을 우롱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분통함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우리 부모님이 더이상 원통하지 않고 편안하게  이승을 떠나게 도와주시고 더 이상 남편의 죽음이  한낱 사랑 타령이라는 거짓으로 욕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

미비한 글이지만 널리 알려달라.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미국에서 김지나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