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국내 게임시장 흥행에 도전한 서양 온라인 게임은 많았습니다. '에버퀘스트2'나 '반지의 제왕 온라인', '에이지 오브 코난' 그리고 '시티 오브 히어로' 등이 그 예죠. 이들은 게임성 면에서 충분한 검증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별문제는 없어 보였습니다. 물론 선점 효과를 누린 WOW만큼의 성공을 바란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는 모두 그 이상의 실패로 돌아갔죠. 최소한의 시장 잔류조차 포기하고 서비스를 접거나, 링거 맞아가며 이름값만 유지하고 있는 게 이들의 현실. 외국에서 WOW에 근접할 정도로 명승부를 펼친 '길드워'마저도 국내 서비스를 접을 정도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던 중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일부 마니아층의 장르라고만 여겨지던 AOS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LOL)'가 등장하자마자 세계적인 흥행을 거둔 겁니다. 한국 역시 LOL에 뜨거운 반응을 보인 나라 중 하나였고, 스타 크래프트를 이어갈 E-스포츠의 차기 주자로 낙점되며 서양 온라인 게임 성공사례의 두 번째 홈런을 기록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월드 오브 탱크(이하 WOT)' 역시 LOL에 이어 연타석 홈런의 가능성이 내비치는 게임입니다.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다녀오는 군대! 그곳에서 전차병을 제외한 보직은 그저 구경만 해야 했던 탱크를 이제는 게임 속에서 직접 몰아볼 기회가 생긴 겁니다. 그것도 아주 리얼하게 말이죠.




통신병, 현지 병사로 교체 투입 완료!


WOT를 알아보기 전에 한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게임은 현재 국내에서 정식 서비스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공개한 이유는, WOT가 국내 정식 출시된 수많은 외산 게임보다도 더욱 뛰어난 한글화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 때문인데요.

외국 클라이언트를 내려받는 순간부터 이전까지의 외산 게임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설치 파일부터 친절한 한글로 구성되어 있었거든요. 워게이밍 넷이 한국 출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진행된 점은 매우 놀라웠습니다.

게임을 접속하고 바로 확인 가능했던 부분은 UI 및 튜토리얼 부분 모두 상당한 수준의 한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좋은 첫인상 정도로 남을 수 있었겠지만, WOT는 그 이상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아니, 국내 미출시 게임이 음성 한글화까지 완료됐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요!

사실 WOT의 번역이 썩 매끄러운 편은 아니라서 일부 어색한 부분도 있고, 성우의 연기력 역시 뛰어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크게 한글화가 필요치 않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심한 정성을 보여줬기에 그다지 큰 단점으로 비춰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정식 출시후엔 좀 더 개선해야 할 부분이지만요.

[ ▲ 세부적인 브리핑까지 한글화 완료 ]



차량 외부 도색 점검, 이상 무!


보통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그래픽이 먼저 눈이 들어오기 마련이지만 WOT의 첫인상은 귀부터 자극했습니다. 기분 좋게 속삭이는 목소리 찬양은 이쯤하고 이제 게임의 외형을 살펴볼까요?

WOT의 그래픽 퀄리티는 냉정히 말하자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며, 달리 특별한 점이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빅 월드 엔진으로 구현된 전장 역시 이름답게 꽤 넓은 편이긴 하지만, 밀리터리 게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죠. 하지만 워게이밍 넷은 자신들이 만든 게임의 장르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선택과 집중'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탱크로 시작해 탱크로 끝나는 WOT는, 정말 탱크의 구현도 하나만큼은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PC 패키지 게임에 비하면야 부족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 탱크가 뒤엉켜 싸우는 온라인 게임에서 이 정도의 표현은 고무적으로 보일 정도였습니다. 수십 개의 바퀴가 간신히 이끄는 둔탁한 쇳덩이의 표현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데다, 탱크의 궤도 같은 섬세한 부분도 꼼꼼하게 구현되어있어 한층 게임의 사실감을 높이는데 일조합니다.

[ ▲ 탱크의 종류가 적지않음에도 불구, 모두 뛰어난 재현도를 보여준다 ]


배경 디자인은 지금까지 출시된 밀리터리 게임들을 즐겨왔던 팬들이라면 큰 감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봐왔으니까요. 하지만 사실감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부족한 점이 없습니다. 특히 수많은 오브젝트로 구성된 엄폐물은 WOT가 가지는 전략적 요소를 한층 더 부각해줍니다. 같은 전장일지라도 유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다 전장 자체의 숫자도 적은 편이 아니기에 높은 시너지 효과가 기대됩니다.

'네이비 필드'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애초에 대중성 부분은 개발사도 크게 염두에 둔 것 같지 않은 이 게임은, 군함의 정밀한 설정 및 특유의 진지한 분위기로 밀리터리 마니아층의 사랑을 받고 있죠. 게임성 역시 다소 어렵긴 해도 부족하진 않습니다. 팬이 많지는 않았지만, 안티는 아예 없는 깔끔한 게임 중 하나죠. 느릿한 업데이트 및 리뉴얼 제작 게임인 '진주만'이 다소 애매한 포지션을 취해 일부 유저들에게 볼멘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만, 어쨌든 썩 괜찮은 게임입니다.

다행히 WOT는 게임의 분위기를 해치는 모든 찌꺼기가 청소된 모습입니다. '정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정도로 진지하게 탱크를 구현한 개발사의 목표답게, 뜬금없는 미소녀 브리핑이라던가 그런 건 없습니다. 무거운 게임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라이트한 콘텐츠를 삽입하는 건 좋으나, 어울리는 게임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거든요. WOT는 전략 탱크액션에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최대한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려고 노력한 게 눈에 보입니다. 물론, 그 속에서도 대중적인 면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최소한 '네이비 필드'만큼 어렵진 않아요!



[ ▲ 전략적 요소로 가득한 다양한 전장들 ]



승무원 정신교육, 수행 완료!


유저가 온라인 게임을 지운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뭐 사람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게임이 취향에 안 맞는다고 느꼈을 때요, 둘째는 부족한 실력 탓에 멘탈이 회복 불능상태에 빠졌을 때죠.

WOT는 이런 기준을 놓고 봤을 때, 상당히 이례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포신 속 포탄이 떠날 겨를도 없이 자신의 탱크가 녹아버렸다 하더라도 그리 열받지 않거든요. 자신이 불지옥을 노니는 야만용사같이 죽음을 초월한 네팔렘이 아닌 이상, 게임불능 상태가 되면 깊은 한숨과 함께 키보드 옆 담배로 손이 가는 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WOT는 이 부분을 특유의 시스템으로 깔끔하게 해결하며 유저의 아드레날린 분비를 억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 게임을 한판 해보겠습니다. 시작했습니다. 이동 속도를 위해 장갑을 포기한 제 경전차는 전장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며 적 전차의 위치를 체크, 아군의 레이더에 전송했습니다. 자동으로 전송되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돌아다니던 제 경전차는 이내 막다른 곳으로 몰리고, 적들의 집중 포화에 용맹하게 산화했습니다.

죽었으면 그냥 나가면 됩니다.

WOT는 리스폰 같은 거 없이 죽으면 그 판은 끝난 겁니다. 사실 회색화면 속에서 꿈지럭거리며 움직이는 아군 탱크를 오 분, 십 분 구경하고 있는 걸 좋아하는 유저는 없을 겁니다. 몰래 엿보기를 좋아하는 변태 같은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 ▲ 어라, 죽었네. 네 다음 탱크~ ]


플레이어는 게임을 빠져나간 후 로비화면에서 재정비하던가, 차고에 있는 다른 탱크를 꺼내 새로운 게임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 도중 게임을 빠져나가면 페널티를 받는게 온라인 게임의 일반론으로 굳어지고 있지만 WOT는 반대 모습입니다. 아니, 오히려 시스템으로 행동 불능 상태에서 게임에 잔류하고 있는 것을 적극 말리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랄까요.

다른 탱크로 새로운 게임을 진행하는 와중에 그전 라운드가 종료됐다면, 해당 경험치와 포인트를 그대로 적용받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충 감이 오실 겁니다. 빠르게 레벨업을 하고 싶다면 최대한 공격적으로 게임을 운영하고, 만약 자신의 탱크가 파괴됐다면 미련없이 바로 다음 탱크를 출격시키라는 거죠. 개발사의 이런 오픈마인드는 특유의 느린 게임 진행이 단점이 되지 않게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 ▲ 근처 편의점을 다녀오더라도 라운드가 종료되면 해당 전투 포인트는 자동 수령된다 ]



엔진 가동 이상 무, 전장 투입 대기중!


그 외에도 장점은 많습니다. 특색이 뚜렷한 수많은 탱크 숫자에 한 번 놀라고, 탱크마다 수많은 커스텀 파츠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두 번 놀라게 되죠. 또한, 서양 서버에 접속해도 쾌적한 게임 진행이 가능할 정도로 안정된 서버 운영은 WOT가 비추는 성공 가능성에 힘을 더해줍니다.

국내 정식 서비스의 가장 큰 적은 모두 잘 아시겠지만 '플레이어의 인식'입니다. 시원시원하고 빠른 게임을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WOT의 매력이 제대로 전해질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하지만 WOT가 '총싸움' 게임에 비교해 단지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묻히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무척 재미있었고 인상 깊게 즐겼습니다만, 이 느낌을 국내 유저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이런 풍의 게임은 국내에선 불모지나 다름없으니까요. 개인적인 바람은 WOT가 오랫동안 묵혀져 왔던 국내 게임시장의 장르 편중화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은 모습을 보는 겁니다. 거시적 관점으로 게임계를 바라본다면 최대한 다양한 장르에서 발전 가능성이 나타나는게 좋기 때문이죠.

묵직함과 캐주얼한 느낌이 공존하는 WOT의 포신은 한국 게임계를 향하고 있고, 그 속엔 즐거움이라는 포탄이 장전되어 있습니다. 이제 발사 준비는 끝났습니다.

[ ▲ 월드 오브 탱크 플레이 영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