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리듬게임에 큰 관심이 있지는 않다. 좋은 노래라면 음원사이트에 넘치고 깔렸고, 손맛이야 타 장르에서도 충분히 맛 볼 수 있는 거니까. 리듬게임만의 고유한 영역과 시장, 마니아들의 취향은 인정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굳이 그 둘을 합친 게임을 할 필요성을 크게 못 느꼈다.

동료 기자가 "정말 끝내주는 리듬게임이라니까!" 하며 들이민 게임, '라디오해머'도 사실 그렇게 흥미가 가진 않았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에 듣기 좋은 오리지널 음원이 있어봤자 나에게는 '리듬게임' 이니까. 또,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인벤 모바일팀에는 두 명의 리듬게임 진성 덕후(?)가 있다. 이 쪽 장르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급인 본인보다 훨씬 잘 할 만한 사람들이다. 근데 이 사람들이 지금 굉장히 바쁘다. 허허, 이것 참 큰일이다.

'한 번 보기나 하자' 라며 동료 기자가 플레이하는 걸 쭉 보는데, 이상하게 흥미가 서서히 생겼다. 그 흥미는 '라디오해머'의 발랄한 리듬이나 아기자기한 그림체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게임 전반에서 볼 수 있는 기똥찬 유머 코드와 재치, 웬만한 도핑으로는 나올 수 없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 그것이 이 리뷰를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 라디오해머의 (멀쩡한) 소개 영상

일단 개발사부터 범상치 않다. 개발사 '바이닐랩'은 포털에 검색하면 제안 검색어가 뜰 정도로(심지어 음식 싸는 '비닐랩'이 뜬다) 잘 알려지지 않은 스타트업 회사다. 명성도 없는데다 게임 한 번 내민 적 없으면서 국내 최대의 게임개발자 컨퍼런스인 KGC에서 '게임은 문화이며 예술이다' 라며 목소리를 높이던 이상한 기업이다. 거기다 첫 작품 '라디오해머'를 두고 겸손은 고사하고 "바이닐랩만의 끼와 색깔을 유감없이 발휘한 게임. 창의성과 고유의 색이 확실한 게임" 이라며 자부심도 대단하다. 상당히 패기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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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중요한 건 개발사의 자부심 대로 게임이 잘 나왔다는 것이다. '라디오해머'는 고유의 색깔이 가득하다. '변태 때려잡는 DJ'라는 골때리는 컨셉도 그렇고, 특색있는 그림체와 완성도 높은 70여 가지의 자작곡도 매력적이다.

음원 자체는 딱 듣기 편한 정도다. 너무 대중적이지도 않고, 너무 신비스럽지도 않다. 모 항공사 CF수록곡인 페퍼톤즈의 'Super Fantastic'처럼 딱 편하게 듣고 즐길 만한 예쁜 음악이다. 고유의 감성은 유지하면서도 재즈나 일렉트로닉, 디스코 등 다양한 멜로디가 펼쳐지는 등 의외로 프로다운 모습도 볼 수 있다.

음원의 상큼발랄한 감성은 게임 화면에서도 이어진다. 화면 속에 있는 요소 모두가 어쩜 그렇게 잘 어우러지는지. 자기 키만한 망치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캐릭터부터 시작해서 폰트, 배경화면, 이펙트까지 찰떡궁합이다. 특히 배경화면은 진국이다. 바이닐랩 스스로의 말처럼 '쓸데없이 고퀄리티'인데, 이게 또 깨알같은 재미다.

▲ 수록곡도 꽤 많고, 각자 완성도도 높다



▲ 배경 오브젝트의 움직임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리듬게임의 중요 요소인 '노트'. 각 리듬게임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노트다. 리듬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유저를 음악으로 이끄는 경험의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리듬게임 개발사가 노트의 움직임, 모양, 소리의 구성에 굉장히 신경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디오해머' 역시 노트에 많이 신경썼다. 일단 모양부터 다르다. 그간 리듬게임에서 봐 왔던 기다란 바(BAR)나 동그랗거나 네모난 버튼, 화살표 모양이 아니다. 음표나 미사일, 미친 락커들이 우르르나온다. 그 중 바바리맨은 그야말로 획기적이다. 리듬을 잘 맞추면 뭔 짓 하기도 전에 맞고 날아가지만, miss라도 뜨면 바로 훌떡 앞섬을 풀어헤친다. 혹시 바이닐랩 명의의 약국이라도 하나 있나 의문스러울 정도다.

모양도 모양이지만, 노트의 패턴과 비트 역시 독창적이다. 변칙적인 패턴과 엇박자도 중간중간 등장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찰지게 바바리맨을 때리다보면 돌입하는 피버모드도 신나는 사운드, 너그러운 판정이 어우러져 즐거움이 배가 된다. 등장할 때 들리는 '휙' 소리와 때릴 때의 '탁' 소리가 합쳐져 만들어지는 비트 역시 절묘하다. 이상한데서 쓸데없이 고퀄리티다.


스테이지 화면도 상당히 독특하고 아기자기하다

▲ 때리기만 하면 PERFECT판정을 받는 피버 모드. 신난다!

▲ What the... 이런 꼴 안 보려면 미리미리 때려둬야 한다


특별한 건 이 뿐이 아니다. 시나리오만 봐도 정신이 멍해진다. 변태가 무리짓고 다니며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건 그렇다 쳐도, 그들을 상대하는 정의의 사도가 왜 DJ여야 하는지,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왜 전세계에 생중계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당위성이 눈꼽만큼도 없는 스토리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생각할 필요 없이 크게 웃을 수 있다. 대사도 깨알같다.

"제발 살려주십쇼! 집에 곰같은 하드디스크와 토끼같은 피규어들이..."
"오직 변태를 위한, 변태의, 변태적인 축제를 벌일테다!"
...이 재치는 도대체 뭘로 사야 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 작가가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명대사


사실 리듬게임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 바로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플레이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데, 플레이 결과는 가차 없다. 퍼펙트는 몇 번, 연속 콤보는 얼마, 실수는 몇 번 했는지 일일이 계산해 점수로 보여준다. 꼭 한 두 번은 실수를 하는 나에게 이렇게 무지막지한 점수 체계는 자신감 하락의 주 원인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점수를 기록하다보니 흥미도 점점 사라졌고, 결국 '리듬게임은 할게 못 된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 '라디오해머'는 부담없이 플레이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점수가 있고 콤보가 있고 판정은 있지만, 이 결과들이 내 게임 성취도를 좌우하지 않는다. 각 스테이지 별로 설정된 3개의 목표만 착실히 수행하면 된다. 점수가 엉망이더라도 목표 조건만 만족했다면 스테이지 클리어다. 클리어 조건 자체도 별다른 컨트롤 없어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리듬게임 입문용으로 플레이하기 참 적절하다.

게임 진행의 호흡도 입문자 용으로 적당하다. '라디오해머'의 곡 길이는 고작 1~2분으로, 4분 정도의 기존 리듬게임에 비해 상당히 짧다. 다만 보통 1판 당 1곡의 기존 방식과는 다르게, '라디오해머'는 한 스테이지 당 2~3개의 음악이 재생된다. 이 방식은 초보자가 게임에 익숙해지기 쉽다. 하나의 곡을 주욱 플레이하는 것에 비해 더 많은 패턴을 학습할 수 있고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디오해머'를 입문용으로 추천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과금 체계가 상당히 착하다. 보통 유료게임이라도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내기 위해 유료 아이템 같은 과금 요소를 마련해두는데, 이 게임에는 그런 것이 아예 없다. 어플 구매가격인 3천 원만 지급하면 무한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고 음악을 즐길 수 있다. 대부분 합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하는 5곡 당 2천원의 뮤직팩 가격보다도 더 저렴하다. 70곡의 오리지널 음원이 단 돈 3천 원이라니. 거의 공짜나 다름없어 게임에 굳이 돈 쓸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이라도 부담은 없을 것이다.

▲ 점수가 낮고 콤보가 끊기면 어떠랴. 별만 얻으면 된다

▲ 제약 없이 몇 번이고 플레이할 수 있기 때문에 못 다 이룬 목표도 언제든 시도할 수 있다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이전에 비할 바 없이 많은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허나 소위 '잘 먹힐 만한' 게임을 추구하다보니 새로움보다는 익숙함, 창조보다는 모방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한 사례가 많다. 이제는 표절 논란까지 일어났다. 이젠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에 유저들은 색다름을 원하고, 업계 역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기에 '라디오해머'와 개발사 '바이닐랩'을 주목할 만 하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재치, 색다른 컨셉과 세심한 정성까지 모두 보여 준다. 즐길 수 있는 게임은 만들 때 부터 즐거워야 된다는 것, 수익을 이끌어내기 보다는 개성을 얼마나 드러내느냐를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도 일깨워 준다.

- "좋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은 음악적 감성과 경험을 줄 수 있는 게임이 있다면, 그건 무척 재밌으면서도 특별한 게임이다."
- "게임을 연주한다는 건,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


바이닐랩의 회사 소개 영상에 나온 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멋진 말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개발사는 해냈다. 적어도 '무척 재밌으면서도 특별한 게임'은 만들어 냈다. 스스로도 작은 개발사라 평하지만 '라디오해머'를 통해 보여준 그들의 미래는 굉장히 밝고 크다. '라디오해머' 로딩화면에서 밝힌 다음 작품 '런어웨이즈'도 상큼하고 톡톡 튀는 게임일거라 기대해본다.

▲ 바이닐랩의 포부 가득한 멋진 회사 소개 영상


▲ 로딩화면에서 살짝 언급하던데, 이 꿈을 함께 할 여성개발자를 애타게 찾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