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게이머 입장에선 참 알쏭달쏭한 해다. 매 년 연초는 보통 잠잠하기에 별 기대없이 묵은 게임들을 플레이하기 마련인데, 올해는 참 요상하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게임들이 빵빵 터졌다. 3개월 전만 해도, '팰월드'랑 '헬다이버스2'가 전세계적인 흥행 게임이 될 거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다. 심지어 해당 게임 개발사와 퍼블리셔들도 말이다.

그 1분기 흥행 열차의 막차를 '라스트 에포크'가 탔다. 게임 장르 구분을 잘 모르는 이들이라 해도 '디아블로 같은 게임'이라 하면 단박에 알아듣는 쿼터뷰 핵앤슬래시 게임. 생각보다 많은 강자들이 존재함에도 결국 디아블로와 POE(패스 오브 엑자일)의 그림자에 가려지고 마는 비운의 장르지만, 라스트 에포크는 20만이 넘는 동시접속자를 기록하며 '이 게임이 왜?' 대열 합류에 성공했다.

그러니 한번 보자. 도대체 이 게임은 왜 떴는가? 실제로 그 정도로 괜찮은 게임인가?

게임명: 라스트 에포크
장르명: 핵앤슬래시 ARPG
출시일: 2024.2.22
리뷰판: 1.0
개발사: 일레븐스 아워 게임즈
서비스: 일레븐스 아워 게임즈
플랫폼: PC
플레이: PC(Steam)


진순은 너무 싱겁고 불닭볶음면은 너무 매운데요
근본부터 시작해보자. 결국 이 장르 게임들의 재미 본질은 '성장'에 있다. 레벨업을 하고, 아이템을 찾고, 스킬과 아이템 옵션 간의 시너지를 찾아내며 최적화된 빌드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캐릭터가 강해지면 나타나는 건 더 강한 적이다. 그렇게 더 강한 적과 더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고 또 강해지면 다시 그 과정이 반복된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다 쉬워지면, 이제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을 지닌 다른 캐릭터를 키우러 간다.

그 과정에서 내가 손수 깎은 빌드가 통한다는 쾌감과 졸업급 아이템을 얻을 때의 희열을 느낀다. 그게 이 장르의 재미 본질이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아니 세져 봐야 적도 세져서 재미가 없는데요?" 그럼 그냥 이 장르랑 안 맞는 거다. 조용히 다른 게임을 하러 가면 된다.

그리고 그 재미를 충분히 느낄 줄 아는 이 장르의 팬이라면, 다들 디아블로 시리즈와 POE 정도는 해 봤을 거다. 물론 안 해 봤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으니 뒤로 가기에서 손 떼도 된다.

▲ 이 숫자 사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게이머들이라면

핵앤슬래시 팬 게이머의 관점에서, 디아블로 시리즈는 순한 맛 게임이다. 순대가 막 뽑히고 사람 가죽이 널려 있으니 하드코어 ARPG라는 인상이 있지만, 보이는 것 만큼 각박하고 어려운 게임은 아니다. 성장까지 가는 과정에서 고민할 여지가 그리 많지 않고, 효율적인 성장 방법과 성장 요소 간의 시너지가 매우 명확하게 보인다. 아이템이 안 나오기 시작하면 지옥이 따로 없지만, 머리가 복잡하진 않다는 점에서 누구나 쉽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디아블로 시리즈의 포지션이다.

반면, 다른 한 쪽 산맥인 POE는 완전 반대다. 이쪽은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쉬운데요?" 라고 말 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어렵다. 콘텐츠의 양도 엄청나고, 성장 방법도 너무나 많으며, 커런시 시스템부터 거래 체계, 링크와 패시브에 대한 이해까지 알아야 할 게 너무 많다. 아이템이 우수수 나와도 뭘 버리고 뭘 가져가야 할 지 머리가 아프다.

그리고 라스트 에포크는, 딱 이 두 게임의 중간에 놓여 있다. 너무 순하지도, 너무 맵지도 않은, 단박에 설명하긴 어렵지만 적절한 어딘가다. 디아블로처럼 스킬의 수는 많지 않지만, 각 스킬이 전부 증강 트리를 지니고 있어 스킬의 활용도 변화가 훨씬 심오하다. POE처럼 아이템 옵션을 변경할 수는 있지만 중세 연금술사 마냥 커런시를 지지고 볶아야 하는 POE와는 달리 2개의 접두사와 2개의 접미사라는 간편한 체계를 쓰고 있다.

▲ 모든 스킬에 스킬 트리가 있어서 복잡해 보이지만

▲ 스킬의 변화가 다채롭다는 점에서 오히려 재밌다

콘텐츠의 구조도 그렇다. 디아블로 시리즈의 게임 콘텐츠는 시리즈 넘버를 막론하고 다섯 손가락 안에서 헤아릴 수 있다. POE는 발가락까지 다 써도 셀 수 있을지 모르겠다. '라스트 에포크'는 딱 중간이다. '모놀리스'라는 맵핑 콘텐츠는 디아블로에는 없지만 POE의 그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엔드 콘텐츠인 아레나와 던전은 종류는 적어도 특별한 기믹이 들어 있어 충분히 파고들 가치가 있다.

▲ 던전 보스가 광역기를 쓰면 잠시 과거로 후퇴하면 되는 '시간의 성소'

심지어 거래와 파밍의 개념에서도 라스트 에포크는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위에 말한 두 게임 사이가 아니라, 거래를 원하는 유저와 그렇지 않은 유저 간의 중간이다. 게임 진행 도중 진영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거래를 보다 편하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거래 기능을 막는 대신 파밍 과정에서 이득을 취할 수도 있다. 각 진영에 오래 머물수록 보너스가 커지기 때문에 편의에 따라 진영을 갈아타는 선택은 오히려 불리하다.

이 회색 요소들이 모두 합쳐져, 라스트 에포크는 딱 적당한 맛을 낸다. 너무 막막하지도 않지만 시시하지도 않고, 지겹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머리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복잡하지도 않다. 보통 이렇게 애매한 방향을 지향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라스트 에포크는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하게 줄타기를 해냈다.

▲ 접사로 아이템 옵션을 정하는 직관적인 크래프팅

콘텐츠 상한선이 너무 높지 않아 온갖 빌드가 다 통용되고, 딱히 정석을 따르지 않아도 게임이 그럭저럭 풀린다는 것도 이 장르에서 쉽게 보기 힘든 장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고착화는 피할 수 없겠지만, 스킬마다 존재하는 증강 트리의 잠재력은 연구를 통한 재발견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 게임 꽤 맛있다.


반만 완성했지만 정식 출시다
맛있는 부분을 말했으니, 이제 끔찍한 부분을 보자. 솔직히 게임 재밌다. 정식 출시 전까지 '헬다이버스2'를 하고 있었는데, 민주주의를 잠시 내려놓을 정도로 이 게임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게임 외적 부분에서 불안 요소가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거다.

가장 먼저 유저들을 덮친 건 서버의 불안정성이다. 출시 후 3일 정도는 온라인 모드 플레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접속하려 해도 수천 명의 대기열이 발생하는가 하면, 가까스로 접속해도 지역 간 이동 시 무한에 가까운 로딩이 발생한다거나, 뜬금없이 게임에서 튕기는 등 온갖 문제가 발생했다.

▲ 앗...!

솔직하게 말해 게임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라스트 에포크는 오프라인 모드를 따로 지원하고, 아예 서버 연결조차 필요 없는 풀 오프라인 모드도 지원한다. 거래와 파티플레이는 안 되지만, 거래야 안 하면 그만이고 파티플레이는 친구가 없으니 애초에 상관 없다. 하지만, 게이머들이라면 알 거다. 온라인이 불가능한 게임이 아닌데 오프라인 모드를 플레이하는 건 짬뽕 맛집에 가 놓고 짬뽕 재료가 다 팔려 짜장면을 먹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다.

물론, 출시 후 1주 정도가 지난 현 시점에는 간헐적인 대기열이 발생할 뿐 꽤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헬다이버스2'또한 비슷한 문제를 겪었지만, 이 쪽은 뒷배가 무려 소니다. 하지만 일레븐스 아워 게임즈는 스스로를 인디 개발사라 말한다. 치킨을 시켰을 때 닭다리가 하나 적게 와도 프렌차이즈 치킨이면 어떻게든 보상해줄거란 믿음이 생기지만, 동네 치킨은 뭔가 불안하기 마련이다.

▲ 대기열 자체보다 기다려도 줄지 않는게 더 문제였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엉망진창이다 못해 끔찍한 수준의 한국어화다. '라스트 에포크'는 5년 전 얼리 억세스를 시작으로 정식 출시 전 한국어화를 지원했지만, 수준이 매우 떨어져 정식 출시 사양에 걸맞은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식 출시 빌드에서도 한국어 번역은 수준 미달이다.

'Necrotic'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두고도 부패와 괴사로 번역이 갈리는가 하면, 문법이 박살난 문장이 수도 없이 많고, 주는 피해를 받는 피해처럼 번역해 둬 굳이 영어 원문을 확인해야 할 때도 있다. 심지어 상점에서 판매하는 아이템 가격이 보이지 않는 오류까지 있다. 애초에 기계 번역부터가 문제지만, 기계 번역 중에서도 성능이 낮은 번역기를 쓴 느낌에 가깝다. 만에 하나 이게 기계 번역이 아니면 더 큰일인데, 생각해보니 기계 번역이 아닌 것 같다.

▲ 번역 작업 도중 쓴 것으로 보이는 노트까지 그대로 게임에 넣어버리는 과감함

마지막 한 가지 아쉬움은 2019년부터 얼리 억세스를 시작한 게임임을 감안해도 그래픽 수준이 영 떨어진다는 것이다. 덕분에 비교적 저사양 PC에서도 구동이 원활하다는 슬픈 장점이 되긴 하지만, 그래픽 수준이 낮으면서 사양이 낮은 건 딱히 장점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장르가 장르인지라 캐릭터를 들여다 볼 일이 별로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옛날 게임 하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정리하면, '라스트 에포크'는 긴 얼리 억세스를 끝내고 정식 출시를 이뤄냈음에도, 게임 내 시스템 구축과 콘텐츠 구조만 갖췄을 뿐, 게임 외적 부분에서는 정식 출시라는 이름을 달기엔 영 모자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엔진하고 구동계는 갖췄으나 외부 도장이 안 된 자동차를 굴리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차가 잘 굴러가면 그만인 사람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4만 원에 가까운 돈을 내고 게임을 산 신규 유저들이 바랄 퀄리티는 분명 이보단 훨씬 위에 있을 거다.

▲ 그래픽이 막 중요한 게임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다 못해 기대와 불안 사이에서도 중간인 게임
우리가 흔히 쓰는 화법 중에 'Yes & But' 화법이 있다. 일단 긍정하고, 다른 일면을 얘기하는 이 화법은 '라스트 에포크'라는 게임을 설명하기 딱 좋은 방법이다. 라스트 에포크가 지향하는 방향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무던하면서도 국밥같은 포지션이기에 그럴 거다. "꽤 복잡한데, POE보다는 확실히 쉬움", "그리 복잡하지 않은데, 디아블로보단 파고들게 많음" 처럼 서두만 놓고 보면 상반되는 두 문장이 둘 다 참인 게임이 '라스트 에포크'니 말이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대다수의 대중이 원하는 건 양극단이 아닌 중간의 어느 지점이듯, 라스트 에포크는 충분히 많은 게이머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5개의 캐릭터와 15개의 전직만 존재하는 지금도 굉장히 다양한 캐릭터를 키워볼 수 있고, 수평적 확장 없이 틀만 만들어진 엔드 콘텐츠로도 꽤 만족스러운 플레이 타임을 보여준다.

▲ 오랜 얼리 억세스 덕분인지 서비스 초기 치고는 꽤 정돈된 콘텐츠

아직 재료를 더 넣을 공간이 많아 보이는 요리로도 충분히 맛을 낸다는 건, 앞으로 더해질 수많은 재료와 그렇게 만들어질 새로운 맛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충분한 당위성을 준다. 꾸준히 시즌이 교체되고 업데이트만 밀리지 않는다면, 너무 순한 맛과 너무 매운 맛 양 쪽에 모두 지쳐 버린 핵앤슬래시 팬들에게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불안하다. 일레븐스 아워 게임즈는 스스로를 인디 개발사로 포지셔닝하고 있으며, 아직 충분한 검증이 이뤄지지 않은 개발사다. 얼리 억세스를 5년이나 이어오면서도 프로젝트를 유지했다는 건 투자받을 만한 개발력과 열정을 가졌다는 뜻이지만, 이 업계는 실력과 열정만으로 다 되는 곳이 아니다.

▲ 게임 내에선 수천년의 시간도 건너뛰지만...

결국, 미래에 대한 예상조차 중간에 둘 수밖에 없다. 현 시점에서는 분명히 괜찮은 게임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지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공교롭게도 '라스트 에포크'의 게임 내 서사는 주인공이 시간을 넘나들면서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 시간을 넘어가는 기믹은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면서 동시에 게임 내 시스템으로도 활용되어 아이템을 강화할 때 서로 다른 두 아이템을 넣고 시간을 미래로 감아 융합해 버리는 독특한 컨셉을 보여준다.

그렇게 게임에서는 무려 다섯 개의 시대를 넘나들며 활약하지만, 정작 이 게임의 미래는 알 수가 없다. 'Yes & But'의 화법은 결국 결론이 뒤에 등장한다. 몇 년이 지난 후, '라스트 에포크'를 말하면서 "게임은 재미있는데..."로 시작하면 아쉽겠지만, "출시 초기엔 좀 삐걱댔는데..."로 시작하면 아마 괜찮은 상황일 거다. 개인적으로는, 그 시점에 이르러 부정적인 말로 말문을 열길 바란다. 그럼 틀림없이 게임이 잘 풀렸다는 뜻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