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용신의 검을 뽑는다.

적들을 베어넘길 때의 짜릿한 손맛, 질풍참에 몸을 맡길 때의 가벼움, 2단 점프를 할 때의 경쾌함과 수리검을 날릴 때의 신속함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바로 겐지를 할 때의 이야기다. 이따금씩 겐지가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푸념을 늘어놓거나, 때때로 욕설을 내뱉는 이를 만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한가? 중요한 것은 내가 겐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거늘.

한때는 나 역시 겐지를 혐오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상것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모름지기 제대로 된 겐지라 함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후방으로 침투해 메르시와 같은 연약한 이들을 사냥하고, 부활하고 달려오는 자들의 경로를 막아 합류를 늦춰야 하는 법 아닌가. 그러나 도통 이 공방의 겐지라는 것들은 은밀함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눈에 띄는 행동만을 하기 일쑤였고, 벽을 타고 잠입이라도 할라치면 위도우메이커에게 머리를 맞아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처럼 꼴사납게 추락하는 것이 일상 다반사였다.

겐지로 라인하르트의 방패에 신명나게 수리검을 던져대며 아군 탱커에게 왜 진입하지 않느냐며 되려 성을 내는 겐지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기가 차고 코가 막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겐지를 좋게 보지 않았다.


나는 겐지와는 거리가 먼 서포터였다. 예전에는 말이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저 아군을 치료하고, 죽어가는 이를 살려 무사귀환시키는 것에서 재미를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군가의 희생을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못하기 때문에 서포터나 하는 것 아니냐며 적당히 업혀가는 사람 취급을 했다.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되는 조롱과 홀대 속에서 내 마음은 변형되고 뒤틀렸다. 처음 겐지를 했을 때만 해도 그저 한 번의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서포터의 소중함을 느껴보라는 심산에서였다. 그러나 한 번은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열 번이 됐으며, 열 번은 수백 번이 됐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내가 보지 못하던 거대한 진실을 마주하게 됐다. 과소평가받고 인정받지 못하며 상처뿐인 승리를 거둘 것인가, 아니면 남들의 시선에 상관 않고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할 것인가.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번에도 겐지가 나타난 것을 보고 팀은 아우성을 친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완전하게 겐지의 길로 접어든 후 동료들이 날 설득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날도 하늘은 화창하고 날씨가 습한 것이 겐지를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망설일 이유도 없다. 겐지가 나타나자 대기실 안의 동료들은 크게 술렁였다. 머리를 맞대고 수근댄다. 이대로는 안된다, 다른 영웅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누구 하나 바꾸는 이는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내 나를 향했다. 테이블 앞에 있는 솔저:76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한다.

"동무, 이리 들어오시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동무는 무슨 영웅을 택하시겠소?"
"겐지."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들어오라고 하던 솔저:76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다시 말한다.

"동무. 겐지도 마찬가지, 물몸일 뿐이오. 자리야와 윈스턴이 우글대는 저 적진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겐지."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승패의 기로에 선 중대한 결정이란 말이오.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왜 스스로 포기하는 거요?"
"겐지." 이번에는, 그 옆에 앉은 라인하르트가 나앉는다.

"동무, 지금 오버워치에서는 서포터들을 위한 칭찬 카드 몰표 법령을 냈소. 동무는 누구보다도 많은 칭찬을 받을 것이며, 여차하면 전설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소. 전체 동지들은 동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모두가 동무의 개선을 반길 거요."
"겐지." 그들은 머리를 모으고 소곤소곤 상의를 한다. 처음에 말하던 솔저:76가 다시 입을 연다.

"동무의 심정도 잘 알겠소. 오랜 서포터 생활에서, 겐트위한들의 간사한 꼬임수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용서할 수 있소.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시오. 오버워치는 동무의 하찮은 잘못을 탓하기보다도, 동무가 오버워치와 탱커들에게 바친 충성을 더 높이 평가하오. 일체의 보복 행위는 없을 것이오. 동무는..."
"겐지." 리퍼가 날카롭게 무어라 외쳤다. 설득하던 솔저:76는 증오에 찬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좋아." 그러고는 눈길을 방금 빈 자리에 난입한 다음 인원에게 옮겨버렸다. 설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얀 의료 가운을 말끔히 차려입은 메르시가, 안경을 쓴 채 나의 정보를 샅샅이 훑으면서 조사하듯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 점수가 몇 점이죠?"
"......"
"음, 심해군요." 메르시는 내 정보를 계속 뒤지면서 말을 이었다.


"겐지라지만 막연한 얘기에요. 주력 영웅보다 더 나은 게 어디 있겠어요. 심해에 떨어져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 바닥에 가 봐야 바깥 공기 소중하다는 걸 안다고 하잖아요? 당신이 지금 가슴에 품은 울분은 저도 알아요. 서포터를 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아군 때문에 질 때가 있다는 걸 누가 부인하나요? 그러나 서포터는 정치를 당하지 않아요. 팀 게임에선 무엇보다도 정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소중한 거예요. 당신도 리그 오브 레전드를 통해 그걸 뼈저리게 느꼈을 겁니다. 팀 게임은..."
"겐지."

"강요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저와 같은 서포터였던 사람이, 돌아올 수 없는 '겐트위한'의 강을 건너겠다고 나서니 동지로서 어찌 한 마디 참고되는 이야길 안 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이곳에 수백만 경쟁전 참가자들의 부탁을 받고 온 거예요. 서포터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서, 승리의 품으로 데려오라는..."
"겐지."

"당신은 서포터만으로 300시간을 넘긴 지식인이에요. 팀은 당신을 요구하고 있어요. 당신은 위기에 처한 팀을 버리고 자신의 재미만을 찾으실 건가요?"
"겐지."

"오래 서포터를 한 사람일수록 불만이 많은 법이에요. 그렇다고, 정녕 겐지의 길로 들어설 건가요? 거기다 겐지가 어디 예전같은가요? 당신은 용검을 뽑고 일당백의 기세로 싸우는 겐지를 원하겠지만 이제 겐지는 더 이상 당신이 아는 겐지가 아니에요. 비실비실해져선 용검을 오래 들 힘도 없고, 하체 부실로 점프도 제대로 뛰지 못하죠. 질풍참을 쓰다가도 덫을 밟고 죽는 건 물론이고 자기 칼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게 됐어요. 그래도 이런 겐지를 하시겠어요? 전 당신을 처음 봤을 때, 훌륭한 서포터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만일 당신이 루시우나 젠야타를 하신다면 개인적인 조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어요. 어떠신가요?"

나는 고개를 쳐들고, 반듯하게 된 천막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한층 가락을 낮춘 목소리로 혼잣말 외듯 나직이 말했다.

"겐지."




지금 내 앞에서 아우성을 치는 이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를 구슬리던 이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무리들이었다. 파렴치한들. 자신의 재미는 중요하면서도 남의 재미는 자신의 승리를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철면피들. 본인이 재미와 승리를 다 가져가면 누군가는 그걸 전부 버려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한 자들. 어쩌면 이미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뻔뻔함과 이율배반적인 행태에 욕지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의 주장과 가치관을 저들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소모적인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어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난 무엇을 해야 할까?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넓은 아량을 베풀어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를 희생해 승리를 가져온다면 저들은 또다른 이에게 같은 희생을 강요할 것이고, 피해자는 점점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밝게 빛나는 초록색 용검에 손을 가져다댔다.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무기지만 칼자루를 쥐었을 때의 만족감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내 마음 속을 풍만하게 채워줬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칼자루를 움켜쥐자 칼날 속에서 맥동하는 용이 느껴졌다. 용과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 있다면 이보다 더 현실적인 경우가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 아테나의 가녀린 기계음이 마지막 숫자를 센다. 이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는 여전히 아우성인 팀원을 보며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겐지가...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