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정복하지 못하는 게임은 없다. 왜냐하면, 게임을 만들 때부터 정복당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렵다고 소문난 게임도, 언젠가 정복된다.

정복만 되면 다행이지. 최단 시간 내에 게임을 클리어하는걸 자랑하는 영상이 나오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대도 맞지 않거나, 게임 내의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는 고수들이 하나 둘 씩 생기면, 이제 그 게임은 더 이상 '어려운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그런 게임과 달리, LoL은 쉬운 게임이다. 친절한 튜토리얼, 많은 사람이 함께 발전시킨 챔피언 공략, 프로 선수들의 플레이도 쉽게 볼 수 있는 시스템까지. 게임을 처음 하는 사람도 LoL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그런 쉬운 게임인 LoL에 '어려운' 모드가 생겼다. 바로 '초토화 봇' 모드다. 초토화 봇 모드는 PBE서버에 등장하자마자 많은 화제를 몰고왔다. 어렵지만, 유저들의 도전 욕구를 자극했다. 다소 허술했던 AI를 상상을 뛰어넘는 스킬을 줌으로써 난이도를 올렸다. 정형화된 LoL에 익숙한 유저들은 충격과 공포를 맛봤다.

그런 초토화 봇 모드가 7월 28부로 종료됐다. 기자는 약간 부끄러운 체험기를 썼다. AI와 게임 개발자를 무시했던 반성문이기도 하다.


■ 팀원을 찾아보자...!

초토화 봇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게임을 잘하는 동료들이 필요했다.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5대 1은 무리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LoL 고수들로만 팀을 꾸리는 건 조금 불안했다. AI가 상식을 뛰어넘는 플레이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하고 풍부한 게임 경험을 통해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진짜 '게임 베테랑'들을 물색했다. 마치 영화 오션스 일레븐의 조지 클루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북미짱 'Zzoda'

▲ 북미 추억팔이 전문 'Zzoda'


첫 번째 멤버는 일단 롤을 잘해야 했다. 그리고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초토화 봇 모드라도 LoL 기반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팀의 중심을 잡아주길 바랬다.

한국 서버가 나온지 2년. 그 이전의 사람이 필요했다. 북미에서 잘 나가던 유저, 그리고 협동심을 장착하고 있는 군필이 필요조건이었다. 그래서 북미 1위를 했던 'Zzoda'를 영입했다. 군필에 많은 경험. 딱 좋은 팀장급 멤버였다.

'Zzoda'는 자신감이 넘쳤다. 아무리 어려운 모드라고 해도, AI에게 자신이 질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일생일대의 라이벌 'Raoching'을 언급하며, 걔보다 자신이 낫다고 어필했지만, 별로 상관 없는 얘기였다. 추억에나 살라지.


▶ 아마짱 '오박사'

두 번째 멤버 또한 롤을 잘 하는 유저로 영입했다. 'Zzoda'가 경험을 갖췄다면, 두 번째 멤버는 패기를 가졌으면 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패기로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인재. 두 번째 멤버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마추어 LoL 게이머 '오박사'를 영입했다.

'오박사' 장현수은 '훈' 김남훈, '강퀴' 강승현과 함께 팀 올림푸스로 롤챔스 스프링에 참가한 적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 게다가 패기와 친화력까지. 이렇게 '초토화 봇 초토화팀(이하 초토화팀)'에 어울리는 사람은 '오박사' 뿐이었다. '오박사' 역시 자신감이 넘쳤다. 초토화 봇이 100명이라도 다 박살낼 수 있다는 패기를 발산했다.


▶ 탱크짱 '꿀꿀맨'

▲ 왼쪽이 지완선 선수


맷 데이먼과 브래드 피트는 영입했다. 경험과 패기를 갖추게 된 초토화팀. 하지만 갈 길은 멀었다. 성취해 본 자가 도전도 잘한다고 했던가. 대한민국 최고에 올라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국가 대표 정도의 성취를 한 사람을 물색했다.

운 좋게도, 대한민국 1등을 넘어 아시아 월드오브탱크 1위 팀인 'ARETE'의 핵심 멤버를 알고 있었다. 정상에 있어도 겸손함을 잃지 않고 위트가 넘치는 믿음직스러운 사람. 바로 '꿀꿀맨' 지완선 선수였다.

지완선 선수는 초토화 팀의 계획을 듣자마자 합류하겠다는 대답을 했다. 재밌을 것 같다고, 자신의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계획이라는 답변이었다. 어려울 줄 알았던 영입이 쉽게 풀리게 되자, 우리 초토화팀의 성공은 확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디아짱 '베라님'

▲ 게임 재능러 베라님



조금 더 게임을 다각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우리 초토화팀의 마지막 멤버가 될 것이었다. 많은 게임 고수들을 찾아봤다. 철권, 도타, 하스스톤 등 다양한 분야의 고수들과 접촉 시도했으나 다 불발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마지막으로 접촉을 시도한 디아블로3 고수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평소에 LoL을 즐기고 있는데, 최고의 팀과 함께 초토화 봇 모드를 공략하고 싶다는 답변이었다.

바로 국내 최초로 불지옥 디아블로를 공략한 '베라님'이었다. 출시된 지 5일 만에 불지옥 디아블로를 공략한 사람. 잠을 거의 자지 않고 게임을 할 수 있는 체력과 강인한 정신력을 갖춘 남자다.


▲ 멋있다!



■ 악몽의 1경기!

네 짱이 모였다. 북미짱, 아마짱, 탱크짱, 디아짱. 그리고 그 버스를 타는 기자까지. 우린 초토화 봇을 박살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린 자신감을 무장한 채, '초토화 봇 5단계'를 클릭했다.

그렇다. 우리는 자신감이 있었다. 챔피언 선택 창에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여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했다. 마치 베테랑 군인이 전투 전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처럼. 조금 다른 점은, 그런 군인들은 전투 전 긴장을 환기하기 위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지만, 우린 진짜 긴장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 긴장 0%


▲ 초토화 봇과의 첫 만남! 아직까지 여유로운 모습


처음엔 굉장히 쉬웠다. 선취점을 쉽게 따냈다. 적 챔피언에 뭔가 특별한 게 있다고 파악하긴 했지만, 체력이나 공격력은 여타 모드와 다를 게 없었다. 아주 간단한 처치. '오박사'와 기자가 만들어 낸 합작품이었다. 선취점이 나오자, 분위기는 더 편해졌다. 채팅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킬이 더 나오고, 1차 타워 안까지 상대방을 몰아넣자 이미 이긴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 선취점을 가볍게


하지만 봇 라인은 그렇지 않았다. 디아짱 '베라님'이 SOS신호를 보냈다. 자신의 라인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정글러가 있어서 봇 라인은 '베라님'의 우르곳만 배치했다. 다소 밀릴 수 있는 라인이라고 판단하긴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우린 급하게 리 신을 파견했지만, 피들스틱 봇과 애니 봇의 화력에 밀려 뒤로 퇴각했다. 저게 애니인지 라그나로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 불의 세례를 받아라!


화력만 강한 게 아니었다. 봇만 가지고 있는 이상한 버프들. 봇 근처에 가면 녹턴 궁극기를 켠 것처럼 어두워진다든지, 얼어붙은 건틀릿의 슬로우가 바닥에 여러 개 깔려 접근을 어렵게 한다든지, 투명해져서 공격을 피한다든지... 하여튼, 상상을 넘어선 봇은 사기적인 스킬로 무장한 채 우리를 밀어붙였다.

1대 1 승부는 절대 이길 수 없었다. 다이아 1티어 상위권인 'Zzoda', '오박사'도 봇의 사기적인 스킬에 막혀 쓰러졌다. 혼자 힘으로는 뒤집을 수 없는 상황. 우리는 봇은 절대 가질 수 없는 '협동심'을 발휘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미드 라인을 빠르게 찔렀다. AI들은 탑과 봇에 나누어져 공격을 하고 있었다. 미드에 수비를 하는 챔피언은 카서스 봇 뿐이었다. 미드 2차 타워를 파괴하고, 억제기까지 밀었다. AI들은 이제서야 귀환을 하고 백업을 하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

쌍둥이 타워 앞에서 한타 각이 열렸다. 봇 중에서 가장 약한 블리츠크랭크가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우리의 화력은 블리츠크랭크를 빠르게 녹이기 충분했다. 하지만 녹는 쪽은 우리였다.

▲ 직스 : 폭발은 예술이야!


낚시였다. 블리츠크랭크의 두뇌가 인간 다섯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다. 블리츠크랭크는 마나 실드를 켜고 유유히 빠져나갔고, 우리는 본진으로 귀환한 깡패들에게 칼 한 번을 휘둘러보지 못한 채 도륙당했다. 패배.


■ 졸렬한 게 아니라, 전략적인 것!

충격이었다. 그리고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이겨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AI를 굉장히 하찮게 봤지만, 패배했다. 초토화 봇 5단계 난이도를 디자인한 악마 같은 개발자를 욕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자괴감을 이겨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실패는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디서 들었던 그럴듯한 저 말이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2차 원정을 떠났다. 비장한 분위기가 대기실에 맴돌았다.

우리 모두 정면 승부로는 봇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타 안에서 협동심을 발휘해도 버겁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아예 밴픽부터 초토화 봇에 맞추기로 했다.

네 명이서 막고, 마스터 이가 끝낸다. 이게 우리의 전략이었다. 라인 클리어가 좋은 챔피언 넷, 그리고 정글 마스터 이가 성장해서 게임을 백도어로 끝내기로 했다.

▲ 졸렬이 아닌 전략이다


▲ 2세트 시작!


▲ 멘탈이 조금 상했다


라인전부터 굉장히 힘들었다. 봇의 맹폭을 인내심으로 버티는 상황. 인간의 존엄성이 상하는 순간들이었다. 내가 AI한테 명치를 맞고 있다니. 우리 팀원들이 멘탈도 걸레 짝이 됐다. 스킬샷은 빗나가고,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이게 다이아인지, 브론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될 무렵.

▲ 자이라 봇... 정말 오지더라


'ZZoda'의 마스터 이가 타워를 하나 둘 씩 깨더니, 억제기까지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마스터 이는 벌레가 아니고, 빛과 소금같은 존재.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타워가 철거될 때마다 팀에게 골드가 들어오기 때문에, 그동안 도란의 반지와 저렴한 아이템들로 가득했던 인벤토리에 쓸 만한 코어 아이템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힘들지만 벌레만 믿고 간다


▲ 멘탈이 많이 상했다



▲ 마스터 이의 슈퍼플레이!


우리는 힘을 내서 AI의 본진까지 진격했다. 라인 클리어가 빠른 챔피언이 많았기 때문에 금방 억제기를 파괴할 수 있었다. 쌍둥이 타워가 눈앞에 보였다. 고지가 눈앞!

어이가 없었다. AI가 아니라 푸만두인가? 어떻게 AI가 앞 점멸 궁극기 콤보를 깔끔하게 할 수 있는 건지. 우리는 1경기의 악몽이 떠올랐다.


▲ 최소 푸만두


▲ 내 검은 당신의 것이오!


▲ 출처 : tjwls66님 팬아트


하지만 경기는 벌레가. 아니 마스터 이가 백도어로 끝냈다. 전략대로 흘러가긴 했지만, 발 밑에서 올라오는 부끄러움이 우리를 감쌌다. 정면으로 이길 수 없다니. 인공지능을 상대로!


하여튼, 우린 AI의 무서움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존엄성이 대가긴 했다. 하지만 초토화 봇 모드를 하기 전까지 무시했던 AI에 대한 생각을 180도로 바꿀 수 있는 계기였다.

꽤 재미있는 모드였다. 어렵기 때문에 도전욕구를 자극하는 맛이 있었다. X닭볶음면 같은 매력이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우리가 했던 4수비 1백도어 같은 졸렬한 전략이 아니라 제대로 이겨보고 싶다.

▲ 꿀잼! 성취감 100% 초토화 봇 모드, 다시 돌아 와~


아쉽게도 더이상 할 수는 없지만, 초토화 봇 모드가 다시 나온다면 친구들을 모아 또 도전하고 싶다. 어이없는 강적을 상대로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는 것은 꽤 재미있고, 가슴 뛰는 경험이었다.

초토화 봇 모드도 더 어렵고, 참신하게 보강하면 LoL을 대표하는 모드 중 하나가 될 것 같은 생각이다. 오션스 시리즈도 3편까지 나오지 않았나. 다시 돌아올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