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터 : 이 전투는 4번 나가야 해요. 여기에 맞춰서 스토리 만들어주세요.
맵 디자이너 : 이번에는 시간이 없어 이 맵을 재활용해야 할 것 같아요. 스토리 좀 맞춰주세요.
마케팅 : 보안 문제로 U-OTP를 사용하게 해야 하는데 관련된 퀘스트 대사 만들어주세요.



이 수많은 요청에 그녀는 모두 이렇게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둠', '울펜슈타인 3D', '퀘이크'의 리드 디자이너 였던 존 카멕은 이렇게 말했다.
'게임에서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꺼내며 청중에게 물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마비노기 영웅전의 시나리오를 담당하고 있는 이차선 라이터는 그렇게 강의를 시작했다.



▲ 마비노기 영웅전의 시나리오를 맡고 있는 이차선 라이터



"사실 스토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배제한 게임 중에서 굉장히 성공한 게임도 많습니다."


맞는 말이다. 그녀가 이야기 했듯이 스토리를 전혀 배제하고 제작된 '마인크래프트'는 올 해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GDC2011(Game Developers Conference)의 '게임 개발자 어워드'에서 3개 부문 수상을 했다. 이 와는 반대로 뛰어난 스토리로 전 세계에서 호평을 받았던 게임 '헤비레인'은 3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단 하나의 상도 수상하지 못했다.



▲ 뛰어난 스토리로 호평을 받았던 헤비레인



그녀는 이 같은 사실을 이야기하며 현재의 게임 개발에서 스토리는 다른 요소들 뒤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렉터는 컷신 만들 자원이 없다며 섭섭해 말라 하시고, 기획 팀장님은 쓰던 거 그만두고 이 시스템에 세계관 좀 맞춰달라 하십니다. 프로그래밍 팀장님은 아무도 안 읽는 스토리 왜 자꾸 늘리냐고 하고, 선배 라이터들은 그냥 포기하면 편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정말 포기하면 편할까요?"


2010 대한민국 게임대상에서 시나리오 대상 수상작의 라이터인 이차선 라이터는 우리에게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녀는 이런상황에서 포기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 자리에서 세션을 진행할 수 없었을 터, 그녀는 스토리와 플레이가 융합된 게임들의 예를 들며 스토리는 아직 게임 개발에서 중요한 축을 맡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언차티드 2의 첫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열차가 떨어지며 시작되는 그 순간, 플레이어가 직접 조작하여 주인공을 탈출시킵니다. 컷신이 아니라 플레이가 이미 시작된 것이지요. 해비레인에서는 죄 없는 사람에게 총을 쏠 지 쏘지 않을 지 유저가 결정할 수 있죠. 죄책감도 유저가 받습니다. 이런 게임들에서는 이미 스토리와 플레이의 벽은 허물어진 것이지요. 온라인 게임에서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는 위상 변화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유저들에게 세계관의 변화를 직접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 스토리와 플레이의 벽을 허물었다고 언급한 언차티드2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스토리를 플레이와 융합시키기 위해 그녀는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그녀는 스토리가 다른 여러 요소들의 뒤에 가려져 있는 상황에서도 스토리를 플레이와 융합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비노기 영웅전에서 콜헨과 로체스트 사이에는 벌판이 있습니다. 이 벌판은 유저들도 잘 가지않아 너무 황량했어요. 그래서 외롭지 않도록 헤레타라는 양을 한마리 넣어줬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헤레타가 너무 외로워보이더라구요. 그래서 헤레타의 털을 이용해 장비를 만드는 스토리를 넣었습니다.


또한 게렌이라는 얄미운 캐릭터가 있는데, 그 정도가 심했던 지 게렌을 죽이게 해달라는 유저들의 요청이 너무 많았어요. 게렌만 죽일 수 있다면 평생 영웅전을 하겠다고 할 정도로... 그래서 2차 변신을 하게되는 맹약 스토리에 게렌을 죽일 지 죽이지 않을 지 선택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반응은 정말 폭발적이었죠. 진짜 게렌이 죽는지 죽지 않는 지는 직접 해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 얘만 죽이게 해주면 평생 영웅전하겠다는 유저가 있을 정도...



이 외에도 플레이어에게 차갑게 대하는 루더렉 캐릭터를 골탕먹일 수 있도록 빵에 소금을 넣을지 설탕을 넣을지 선택할 수 있는 퀘스트 등 유저들이 스토리에 녹아들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단순히 유저들이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 진짜 캐릭터가 되었다는 느낌을 들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감정이입을 더 잘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죠. 얼마 전 에피소드에서 드윈이라는 캐릭터가 사망했는데 유난히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과연 왜 그랬을까요?"


내용은 이렇다. 사망한 드윈이라는 캐릭터는 게임 초반 플레이어의 상관으로 등장한다. 플레이어에게 반말을 사용하고 지시를 내리는 위치에 있지만 게임 중반을 넘어서 플레이어의 지위가 높아지면 플레이어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상관으로 따르게 된다. 이렇게 플레이어의 위치가 변화하면서 거기에 따른 NPC의 반응도 달라지는데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 캐릭터가 드윈이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유저들과 가장 많이 소통하고 반응한 NPC이기 때문에 죽음 역시 유저들에게 더욱 크게 받아들여졌다는 것.



▲ 많은 유저들의 가슴을 후벼팠던 NPC 드윈의 죽음




"다른 NPC도 있습니다. 잉켈스라는 캐릭터는 엑스트라 에피소드에 잠깐 등장하는 단역이지만 그의 죽음 역시 유저들은 굉장히 가슴 아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죽이는 사람이 다름아닌 플레이어 그 자신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유저들은 더욱 캐릭터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결국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플레이어가 도망자가 된 이 후 자신을 걱정하는 여관의 할아버지나 처음에는 친절하게 대했다가 후에는 180도 바뀐 태도의 블라윈 역시 플레이어가 자신의 위치변화를 가장 확실히 느끼도록 해주는 NPC들이지요."



이야기를 듣고나니 지금까지 별 생각없이 진행했던 퀘스트나 스토리들이 다르게 보였다. 왠지 뒤통수를 한 대 크게 맞은 느낌이었다. 기자도 어느새 그녀의 의도대로 스토리에 녹아들어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마비노기 영웅전의 스토리는 굉장히 암울하고 무겁습니다. 자신들의 이상향의 세계로 가기위해 마족을 모두 죽이려고 애쓰고 있죠. 그래서 저는 이 무거운 스토리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기 위해 개그적 요소나 감동적 요소를 많이 넣으려고 애썼습니다. 대표적으로 아글란 스토리가 그렇게 탄생되었지요."


아글란은 마비노기 영웅전 EP 8에서 오르텔 성을 지키는 돌로 만들어진 골렘이다. 오르텔 성의 전 영주는 끔찍하게 아끼는 아들이 있었는데, 워낙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여 영주는 항상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다 결국 영주가 보는 앞에서 아들은 절벽에 떨어지지만 절벽 아래의 바위가 움직여 아들을 구해준다. 영주는 이에 고마워하여 움직이는 바위에게 기사 직위를 주고 오르텔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는 게임 속에서 노래로 전해져내려온다는 감동적인 스토리이다.





"최근 게임의 시나리오는 시스템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용도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게임을 만들어야 하고 경쟁은 치열해져 결국 그래픽과 같은 가시성에 많이 치중하고 있죠. 존 카멕이 말한 것처럼 스토리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되면 결국 유저는 게임을 하며 이유도 모른 채 계속 뺑뺑이만 돌게 되겠죠."


이차선 라이터는 온라인 게임의 역사가 짧아 아직 이를 통하여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과 시도가 가능하고 아직 나오지 않은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온라인 게임은 스토리 중심으로 제작되지는 않아 시나리오와 융합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유저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소통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세션을 마무리하며 그녀는 청중들과 다른 라이터들에게 부탁과 희망의 뜻을 전했다. 하나의 스토리를 듣는 느낌을 주었던 이 세션이 끝나자 청중들에게서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져나왔다.


'모든 디렉터 여러분, 싸우는 라이터를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모든 라이터 여러분,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는 그 순간이 바로 게임오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