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머라면 누구에게나 추억의 게임이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걸리면 눈물 찔끔 나올 정도로 혼나면서도 다음날이면 또 부리나케 달려가 손에서 놓지 못했던 게임들. 세월은 흘렀고 지금 나오는 최신 게임들과 비교해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던 게임이지만, 그때는 또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자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린 시절의 나를 사로잡았던 그 게임들을 만든 개발자를, 지금 만나게 되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아마 철없고 순수했던 아이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흥분해서 손을 잡고 흔들며 외치지 않을까? '내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난 당신이 만들었던 게임의 팬이에요!'

김주보 대표에게도 어렸을 때 정말정말 재미있게 즐겼던 추억의 게임이 있었다. 오락실 한켠에 자리잡고 수많은 초등학생들을 사로잡았던 '닌자 베이스볼 배트맨'. 기자도 한때 재미있게 즐겼던 게임이지만 김주보 대표는 추억으로 되새기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닌자 베이스볼 배트맨이 1993년 출시되었으니 2013년은 20주년. 김주보 대표는 20주년을 기념해서 원작자를 만나보고야 말겠다는 생각 하나로 낯선 땅 미국까지 달려갔고, 힘겹게 만난 원작자 '드루 매니스캘코'는 김주보 대표를 'Number 1 Fan'으로 칭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추억의 게임을 만든 원작자를 찾기 위해 낯선 땅 미국까지 찾아갔다. 이 정도만 해도 인간 승리가 아닐까 싶은데, 김주보 대표에게는 원대한 꿈이 하나 더 있었다. 추억의 게임을 내 손으로 다시 만들어 한번 더 생명을 주고 싶다는 소중한 꿈. 이역만리 미국에서 만난 원작자 드루 매니스캘코에게 김주보 대표는 외쳤다. '저에게 라이센스를 주세요!'

과연 그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한국에 돌아온 김주보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승전보를 알렸다. 라이센스 계약 체결! 어린 시절 추억을 따라 찾아간 미국에서, 20년 전 재미있게 즐겼던 게임을 다시 한번 현실로 불러올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 계약의 과정에 대해 써놓은 페이스북을 봤다. 개발자 이전에 게이머로도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 같은데...

93년 당시 부평 근린공원 근처 칠성오락실(지금은 사라졌다)에 친척 형을 따라 갔다가 처음 이 게임을 접하게 되었다. 그 때의 충격이 어찌나 선연한지, 지금도 그 게임에서 쏟아지던 픽셀과 오락실 유리의 선팅지 사이가 벌어져 생긴 햇살과 메추리알 같던 콘크리트 바닥이 생각난다.

드루 씨를 처음 만났을 때에 그랬다. 악수를 하던 순간이었다. 그 모든 기억이 삽시간에 무작위로 쏟아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멈춰 섰다. 가늠하기 힘들었던 만큼의 감격 덕에 나는 한동안 어린 아이 또는 그 비슷한 존재가 되어 거기에 서 있었고, 드루씨 또한 그러한 나를 보며 뭔가 표현하기 복잡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과거를 공유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때의 기묘한 적막을 그 이상으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 낯선 땅 미국까지 직접 판권자를 찾아가 계약을 한다는 것이 보통 용기는 아닌 것 같다. 한국에서 미국까지 게임찾아 삼만리도 아니고... 계기가 있나? 뭔가 특별한 가능성을 봤다던가?

나는 드루 씨를 믿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럽지만, 도박의 일환이라고 해도 좋을 성 싶은 생각과 행동이었다.

하지만 열망이 있었다. 기꺼이 거기다 나를 연료로 삼기로 했다. 이번 20주년이 아니더라도 21주년, 25주년이 또 있었다. 안 되면 말고. 다시 또 도전하지 뭐. 그런 심플무식한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통했나보다.

▷ 원 저작자인 드루 매니스캘코씨와 만나서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분위기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그도 나처럼 놀라움과 경이의 중간선상에서 오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시다시피 해당 게임은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나 미국 아케이드 시장에서 참패했다. 당시 스트리트 파이터의 기판 판매량에 비교해 보면, 본 게임이 50개도 못 판건 비운이라고 하기에도 무색하다.

드루 씨는 그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었고, 따라서 한국의 한 청년이 20주년을 기해 축하 연락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한 것 같다. 매우 기뻐했다. (그는 메일을 주고받는 중간에 구글 번역기로 돌린 어색한 한국어로 '안녕하십니까 Jubo? 나는 메일을 보았다? 그것은 매우 감동의. 번역을 통한 인사. 반가운 시선!'이라는 내용을 보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결국 어떻게 어떻게 우리는 만나고 말았고, 미팅 내내 서로가 연신 Great, Fantastic, Amazing을 첨언하는 웃지 못할 상황을 연출하곤 했다. 그렇게 마냥 행복하고 신기했다.


▲ 현재 미국에서는 만화 제작을 위한 킥스타터 모금을 준비중이다.


▷ 라이센싱 계약을 결심하고 미국에 방문, 원 저작권자와의 만남, 그리고 계약의 체결까지... 뭔가 예상하지 못했던, 아니면 예상을 뛰어넘었던 에피소드 같은 것은 없나?

엄청나게 많다. 그 2주간 겪은 일은 책으로도 내면 재밌겠다 싶을 정도로. 대표적인 에피소드만 하나 들자면...

미국에 있는 큰고모댁에 묵기로 했다. 따라서 경유지인 디트로이트 입국 심사장에서 '친척네 집에 묵을 것이며, 사업차 방문이다' 라고 했다. 눈이 부리한 흑선생 심사관은 친척의 주소를 대라고 했다. 아뿔싸. 나는 내 아이폰 에버노트(클라우드 노트 서비스)에 그 주소를 적어두었고, 와이파이가 안 터진 나머지 메모해 둔 것을 볼 수 없었다.

사람이 당황하면 모국어가 나온다. 내 첫마디는 "X발?" 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와이파이 공공재 확대 정책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인천에서 아예 통신사에 일시정지를 요청했다. 따라서 로밍이고 뭐고 없었다. 입국 심사장은 와이파이 전파가 잡히지 않았다. 진퇴양난이었다. 졸지에 나는 심사관의 일그러지는 표정에 압도되고 말았다.

머리가 하얘진 나는 손짓, 발짓과 함께 최대한 비굴한 미소를 던졌다. 라이온킹의 무파사가 심바한테 처맞고 나서 짓는 측은한 표정까지 지어봤으나, 911 테러 이후 엄혹해진 심사장에선 얄짤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지금의 나는 지나치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지에 싸우스 코리안에서 노쓰 코리안의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지나친 스트레스로 반쯤 맛이 간 나는 "와이파이! 와이파이!" 라고 반복했고, 심사관은 당장이라도 총을 꺼낼 표정이었다. 그렇게 실갱이 끝에, "너는 못 지나간다" 라는 말을 들었다. 머릿속에 김광진의 [편지]가 흘러나왔다. '여기까지가~끝인가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 내가 만약 미국에서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정말 진땀 흘릴만한 순간이었을 것 같다.

그 때였다. 순간적으로 드루 씨의 생각이 스쳤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연락처 어플을 켜서 드루 씨의 주소를 댔다. 이것이 마지막 찬스란 마음에, 최대한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사실 난 비즈니스로 왔소." 흑선생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어떤 비즈니스를 하러 오셨소?" "게임 캐릭터 라이센스요." 그 때였다. 갑자기 흑선생님의 태도가 급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게임이냐, 이름이 뭐냐, 얼마에 계약하냐... 나로서도 어리둥절하며 대답을 하고 있는데 쾅! 흑선생은 도장을 찍어 주었다. "지나가시오."

그렇게 나는 심사장을 통과할 수 있었다. 심장이 너무 철렁해 일단 공항 밖으로 벗어났다. 흡연구에서 줄담배를 뻑뻑 태우며 공황상태를 간신히 벗어났다. 셔츠가 땀에 잔뜩 젖어있었다.

▷ 그러고보니 정작 개발자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김주보 대표의 개인적인 이력을 좀 소개해달라.

어디서 낭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난 개발자라고 말할 수 없다. 유니티를 좀 만지지만 유치원 수준이다. 개인적인 이력은... 12살 때 만화가 문하생으로 출발해, 고등학생 때 단편선을 냈다. 만화 공부를 하다 영화에 미쳐 후반작업 쪽 일을 하였고, 이후는 영어 과외나 모션그래픽 디자인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다 존경하는 정치인을 돕기 위해 사표를 내고 대통령선거 캠프에 들어갔다. 캠프는 해산되었지만, 이 때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얻어 정부 쪽 영상 일, 웹툰 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시간이 좀 남아 돈을 더 벌고자 게임회사를 전전하며 컨셉 아티스트와 PM,UI 디자인을 했다.

이후 우연히 드루씨와 연락이 되자마자 사표를 내고 미국을 향했다. 당시에는 백 번 정도 사표를 낼까 말까 고민을 했었지만 지나고 보니 잘한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스카웃 제의가 들어와서 지금은 모 전자책 회사에 기획 실장으로 들어갔고, 동시에 영상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 영상 업체 말인데, '누나 엔터테인먼트' 회사명이 범상치 않다. 왜 그랬나?

발음하기 쉽고, 기억하기 쉽다. 영어 이름으로도 또한 그러하다. 영미권 사람 또한 읽기 쉬워야 하는데 "Hyung(형)"은 발음이 어렵다. "Um-ma(엄마)"는 뭔가 도시락 업체 같고 어감도 썩 좋지 않다. 이외에도 "Oppa(오빠)", "Appa(아빠)", "Gomo(고모)"까지 다 생각해봤다.

결국 "Noona"가 가장 발음이 순하고 여러 문화권에서 받아들이기 쉬운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누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AV 프로덕션 같다' 란 말을 듣고, 업체명을 바꿀까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 고전 게임은 추억 속에 있을때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고전게임을 리메이크할 경우 '내 아름다운 추억을 망치지 마!'라는 반응이 제일 많으니까. 팬의 입장이나 개발자의 입장에서 그런 부분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

당연히 있다. 있는데... 해당 게임이 당시 빛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이 더 컸다. 원작자인 드루 씨는 심지어 회사의 자금 부족으로 막판에 퇴직해서 정식으로 크레딧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그가 겪은 절망을 나 또한 경험했다. 게임이 출시 전에 자금이 바닥난다던가, 알맹이만 쏙 빼 먹혀지고 팽을 당한다던가.

나는 그가 지난 세월 쏟은 열정 만큼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생각한다. 드루 씨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게임을 내고 싶다. 그렇게 그가 과거에 재현하지 못한 영광을 찾게 하고싶다.

▷ 차후 개발 계획이 궁금하다. 장르나 플랫폼 등등. 간절히 원하던 라이센스를 얻었으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시간이 아닌가.

플랫폼부터 고심중이다. 기존의 횡스크롤 장르로 스팀이나 콘솔 쪽으로 갈 것인가, 심플한 조작으로 컨버전해 모바일로 갈 것인가 등등... 콘솔 쪽으로 가면 개발 시간과 비용이 너무 든다. 하지만 손맛의 재미는 콘솔에 있다.

좀 더 의논해 볼 일이다. 인벤이나 루리웹 등 게이머들이 자주 찾는 포럼에서 나오는 의견을 주시하고 있다. 가끔 '이 사람은 천재인가?' 싶은 의견을 본 경험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또한 능력자도 많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접촉을 시도할 것이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카톡으로는 하지 말자' 라고 지금의 팀 멤버끼리 의견을 모았다. 반론과 의문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환영한다.

장르는 기존 그대로 간다. 다만 원작이 끔찍하게 잘 만들었기 때문에, 비슷하게 맞추려면 '보통 시간과 노력으로는 안 된다'고 각오하고 있다. 이 점은 드루 씨에게 미리 이야기를 했다.


▷ 아니면 되던 안되던 꼭 한번은 만들어보고 싶다는 게임 장르가 있나?

사실 굉장히 많다. 굳이 꼽자면 '여성만 이용 가능한 MMORPG' 이다.


▷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건데, 목표로 하고 있는 다른 라이센스는...

없다. 이번 건이 끝나면 드루 씨와 또 다른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라이센스가 관련된 건 아니고 엄청나게 큰 프로젝트이다. 이런 것을 한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다. 부담이 너무 큰 나머지, 유학을 간다던가 공부를 좀 더 많이 해서, 몇 년 후에 천천히 시작할 예정이다.


▷ 마지막이다. 김주보 대표의 꿈이 드디어 현실로 다가왔다. 게임을 제작하는 각오는 어떤가?

잘 하자. 인생은 세이브 / 로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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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보 (Jubo Kim)
General Manager of Pandamo Korea,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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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제휴/업무관련 : boy@pantoon.co.kr
사랑고백 등 : kimjubo@gmail.com




다음은 김주보 대표의 페이스북 내용 전문이다.

[승전보]

친애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원수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김주보입니다.
저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 시간으로 오늘 오후 6시 경을 기해 인천 공항에.

떠날 때가 2주 전이었지요. 시절이 에르메스 뒷꿈치처럼 속절없이 빠르게 가는군요. 벌써 이렇게 귀국을 하다니 감개가 무량..., 이런 젠장, 왜 이리 주절주절 서론이 길까요. 저는 이게 문제인 것 같네요. 본론으로 워프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기억 하시나요? 제가 출발할 때, ' 계획한 일이 잘 안 되었을 때 쪽팔리니, 자세한 내용은 일이 성사되었을 때 하겠다'고 했던 것. 결론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
.
.
성공했습니다. 야호!!

저의 파트너 드루 매니스캘코(Drew Maniscalco) 씨와 저는 멤피스 공항의 한적한 레스토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라이센스 계약조항에 사인을 했습니다. 앞으로 본 캐릭터가 등장하는 신작 게임은 저 김주보가 만듭니다.

모든 일의 계기는 얼마 전 본 게임의 탄생 20주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1993년에 발매된 아케이드 액션 게임 '닌자 베이스볼 배트맨'. 저는 어릴 때부터 이 게임의 팬이었고, 지난 세월 꾸준히 이 게임에 관한 정보를 모았습니다.

이 게임의 라이센스가 드루 씨에게 돌아갔다는 뉴스, 한국에서는 모르는 녀석이 없을 정도로 히트쳤지만 미국에는 43대밖에 팔리지 않아 쪽박 찬 것, 게임에 관한 모든 설정정보와 컨샙 모티브, 제작자였던 드루 씨의 정보까지...

본격적인 계기는 제가 원작자인 드루씨에게 전화를 건 것이 발단이 되었어요. 저는 다짜고짜 '헬로, 여긴 한국입니다! 닌자 베이스볼 배트맨의 2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라고 준비해둔 대사를 영어로 던졌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전화를 받은 드루 씨는 적잖이 당황했죠. 이 날의 사건은 그 뒤로 저와 드루 씨가 메일을 주고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게임 이야기나 만화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친해졌습니다. 이후 '7살 때부터 이 게임을 좋아해, 고등학교 때는 기판(오락실에 있는 그 장농만한 오락기)을 중고로 사다 들여놓을 정도였죠.' 등의 심히 덕후같은 이야기를 이어갔죠.

저는 저대로 고전명작의 제작자를 직접 만나서 영광이었고, 드루 씨도 본인 나름대로 기억해 주는 팬이 있어 흐뭇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나온 이야기가,

'이 게임을 리메이크 하고 싶습니다. 라이센스를 주세요.' 입니다. 선생님, 리메이크가 하고 싶어요...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라 스스로도 많이 당황했습니다.

그 이후는 모든 일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들아갔습니다. 좀 무서울 정도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멤피스에 도착한 때는 마침 매형(될 사람)인 대니얼 형님이 '매형'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었습니다. 저의 친척누나를 몹시 사랑한 대니얼 형은, 친척 동생인 저에게도 점수를 따고 싶었던 거죠. 모 일본계 자동차 판매소에서 일하는 대니얼은 계약서에 익숙합니다. 네이티브 아메리칸인 그는 능숙한 글솜씨로 영문 계약서 양식을 작성해 주었습니다.

뉴저지에서 멤피스로 오겠다던 드루씨가 '일이 많아 시간이 날 지 모르겠다'고 해서 곤란한 적이 한 번 있긴 했으나, 친척누나는 드루에게 전화를 걸어, '내 동생이 지구 반 바퀴를 왔으니, 나머지 거리는 당신이 인지상정으로 와라' 라고 당차게 이야기해 줬습니다. 덕분에 드루 씨께서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결국 공항으로 옵니다.

이런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될 듯 안 될 듯 했던 일들이 하나 둘씩 거짓말처럼 이루어지고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저와 드루씨는 만날 수 있었습니다.

드루씨는 세심하게도 저의 어릴 적 우상이었던 캐릭터 호세(Jose)가 그려진 티셔츠와 함께, 20년 전 게임잡지(닌자 베이스볼 배트맨 광고가 실린)와 드루 씨의 싸인지를 제게 선물했습니다.

'Number 1 NBBM Fan, Jubo.'가 적혀 있는 사인패드와 콜렉션을 품에 받아들자, 그만 7살로 잠시 돌아가버렸습니다. 울먹울먹...

이후 드루 씨가 20년 전 게임을 만들다 회사에 자금이 떨어져 그만둔 이야기, 위키피디아 닌자 베이스볼 배트맨 항목에 지기 이름이 없어 추가했으나, 어떤 초딩이 끈질기게 지운 이야기...등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놀랐던 점은, 저와 드루 씨의 인생이 참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이나 일하면서 겪은 고충 등,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뭔가 통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로 만나러 온 걸지도...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우리는 공항 천장의 성조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졌습니다.

한국 오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미국에 오기까지 모든 과정은 20년 전인 1993년, 7살 때 부평 칠성 오락실에 있던 그 게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 같네요.
'나는 이걸 갖게 될거야.' 라고, 꼬마 시절에 생각했던 기억이 나면서 그게 현실이 되자 소름이 돋았습니다.

마치 영화 '서칭 포 슈가맨'같았던 저의 이야기는 사실 이 이야기의 스무 배는 됩니다. 오늘은 일단 오랜 비행으로 지친데다 내일 바로 출근을 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어서, 여기까지 씁니다. 나머지는 추후에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그동안 도와주고, 밀어주고, 조언해주고, 돈 빌려주고, 밥 사주신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꼭 보답하겠습니다.

▲ 김주보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계약서 및 선물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