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선수의 트로피 키스는 이제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사진: WCS GSL 결승 김민철)

한국 선수들이 스타크래프트 세계 무대를 휩쓸고, SKT T1 K가 롤 올스타전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것은 이제 당연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한국 선수가 우승을 하는 것보다 탈락하는 것이 더 큰 이슈가 될 정도다.

하지만 e스포츠 전체 종목으로 보았을 때 한국의 기세는 그리 당당하지 않다. 해외 팬들에게 꾸준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FPS에서는 한국의 소식이 끊긴 지 오래이며, 스포츠 장르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콘솔 게임에서는 격투 장르에서 간간히 성과를 내고 있지만, 아무래도 목에 힘을 주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세계 e스포츠 무대에서 스타크래프트, 리그오브레전드와 함께 '탑 3'로 꼽히는 도타 2에서는 더욱 상황이 좋지 않았다. 도타 2의 전신인 도타 올스타즈가 세계 곳곳에서 흥행 가도를 달렸지만, 한국에서는 스타크래프트와 RPG 장르에 밀려 소위 말하는 '듣보잡'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로 인해 해외 선수들이 10여 년 간 자신들의 실력을 다져 도타 2 대회에서 전성기를 뽐낼 때 한국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지난 해 10월 넥슨이 도타 2 국내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이전에도 한국 도타 2 팀들의 세계 무대 도전이 있었다. 중국 쿤샨에서 개최된 WCG 2012가 그 무대였다.

당시 2011년도 공식 종목으로 채택됐던 리그오브레전드가 스케쥴 조정 실패로 제외되면서 밸브가 야심차게 내놓은 도타 2가 새롭게 WCG 공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WCG 2012 개최지인 중국이 도타 강국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앞서 열린 TI2(디 인터내셔널 2012)에서 우승을 차지한 중국의 IG는 WCG 2012에서도 우승컵을 차지했다.

WCG 2012에서 한국은 도타 2와 도타 올스타즈 모두 참가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미네스키 코리아'로 출전한 도타 2 한국 대표팀은 부전승과 함께 몽골 대표팀을 상대로 1승을 거두긴 했지만, 벨라루스 대표팀과 IG에게 패하며 탈락했다. 당시 미네스키 코리아에는 현재 MVP 피닉스의 'Reisen' 이준영과 Rave의 'pYung' 권평, 정대영, 김정기 등이 속해 있었다. 그들과 함께 미네스키 코리아에 속해 있었던 인벤의 모 기자는 IG와의 경기를 회상하며 '죽는 것 밖에 할 것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 WCG 2012에 출전했던 도타2 한국팀. 가려진 이가 당시 예비멤버였던 이준영

비록 WCG 2012에서 한국 도타는 자신들의 한계만을 실감했지만, 기존 도타 팬들의 관심을 도타2로 조금씩 돌리기엔 충분했다. 더군다나 넥슨이 밸브와의 계약을 체결하며 국내에 정식으로 도타 2를 서비스 할 것을 알리자 곳곳에 숨어 있던 도타 팬들은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3년 3월, 아직까지 도타 2 국내 서비스와 관련한 뚜렷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FXOpen의 이형섭 감독이 도타 2 팀 창단 소식을 알렸다. WCG 2009 도타 올스타즈 국가대표였던 박태원과 WCG 2012 도타 2 국가대표였던 김정기가 중심이 된 FXOpen 도타 2 팀의 창단은 당시 국내에서 대회조차 열리지 않은 도타 2를 향한 과감한 승부수였다.

▲ 넥슨 스타터 리그 시절 FXOpen 선수들. 한국 도타 2 프로팀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3개월이 지난 2013년 6월, 넥슨은 E3 2013 현장에서 도타 2의 출시일과 함께 20억 규모의 e스포츠 대회를 열 것을 발표했다. 넥슨의 발표 직후 시작된 넥슨 스타터 리그는 그렇게 국내 도타 2 e스포츠의 첫 걸음이 됐다.

넥슨 스타터 리그에는 앞서 창단 소식을 알린 FXOpen을 포함해 버드갱, EoT 등 재야 고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대부분의 팀들이 정식 스폰서 없이 친분으로 뭉쳐 있었고, 남들보다 먼저 준비를 마친 FXOpen이 이변 없이 우승을 차지하며 TI3(디 인터내셔널 2013) 현장 관람의 기회를 얻었다.

넥슨 스타터 리그를 통해 제법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 낸 넥슨은 TI3가 종료된 후 본격적으로 e스포츠 개척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리그오브레전드라는 막강한 경쟁작이 있었던 만큼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국내 도타 2 e스포츠를 이끌 게임단을 키우기 위한 넥슨 스폰서십 리그를 개최했다.

상당한 규모의 상금은 넥슨 스타터 리그 이상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넥슨 스폰서십 리그의 개최 소식과 함께 MVP, VTG 등의 게임단이 새롭게 도타 2 팀을 창단했으며, 이에스게임즈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ESWC 2013 도타 2 종목에 출전할 한국 팀을 가리는 대표 선발전을 개최했다.

외국 선수들의 유입도 줄을 이었다. 외국 선수의 참가에 제한이 없는 만큼 여러 팀들이 전력 강화를 위해 외국 선수를 영입했다. 그 와중에 데몬 등 세계 최정상급 선수가 활약하기도 했으며, 외국 선수로만 이루어진 제퍼는 NSL 마지막 시즌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한국 선수들의 부족함을 느끼게 했다.

▲ 'DeMoN' 지미 호의 합류는 MVP 피닉스의 실력을 한층 올려 놓았다

하지만 세계 정상급 규모의 상금 수준과는 달리 한국 도타 2 팀들의 실력은 우물 안 개구리 수준에 불과했다. 국내에서 최고라 평가 받는 팀도 외국 팀과 만나면 경기 내내 끌려다니는 모습만 보여주었고, 픽밴과 전략이 단조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스타 2013 기간에 맞춰 온게임넷에서 주최한 도타 2 슈퍼매치는 이런 한국 팀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얼라이언스, DK 등 세계 최정상 급 팀들을 초대한 도타 2 슈퍼 매치는 매 경기마다 상금이 지급되는 방식의 일종의 이벤트 매치였다. 2개의 외국 팀과 1개의 한국 팀이 한 조를 이뤄 진행된 도타 2 슈퍼매치에 국내외 팬들은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팬들의 관심은 한국 팀이 아닌 외국 정상급 팀들간의 경기에만 쏠려 있었다. 한국 팀과 외국 팀간의 경기는 20분을 넘기기조차 힘들었고, 국내 팬들은 한국 팀의 무기력한 모습에 실망감만 느끼게 됐다. 결국, 한국 팀의 참가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NSL이 종료되자 한국 도타 2 팀에 대한 기대는 바닥을 쳤다. 해체한 팀도 있었고, 그나마 명색을 유지했던 스폰서마저 선수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뜨거운 무언가를 기대했던 팬들의 관심 역시 차갑게 식었다. 한국 팀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 팬들을 실망시킨 것이다. 동시에 팬들은 상당한 규모의 상금이 결국 외국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것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 KDL 시즌1 전승 우승을 달성한 제퍼. 팀 창단 반년만에 1억 원의 상금을 확보했다

이런 가운데 넥슨은 또 다시 과감한 승부수를 띄웠다. 넥슨은 약 1년 간 진행되는 KDL의 발표로 다시 한 번 국내 도타 2 e스포츠에 숨을 불어 넣고자 했다. 그러나 KDL 시즌 1이 종료되고, 외국 선수들로만 구성된 제퍼가 전승 우승을 달성하자 혹시나 했던 팬들의 기대는 또다시 실망으로 바뀌었다. e스포츠 강국으로 꼽히는 한국이지만, 도타 2에서만큼은 그 이름이 통하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연이은 패배와 멤버 교체 등 시련을 겪은 한국 도타 2 선수들은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일방적인 패배를 보여줬던 선수들은 치열한 승부를 펼치기 시작했고,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팀을 상대로 승리의 가능성을 비추기도 했다. 동시에 'QO' 김선엽, 'MP' 표노아, 'Febby' 김용민 등 세계 수준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또한, 국내 팀들은 본격적으로 해외 리그에 출전하며 빠르게 경험을 쌓아 나갔다.

이런 한국의 성장에 주목한 스타래더는 시즌9에서 한국에도 참가 기회를 부여, MVP 피닉스가 경쟁 끝에 대표 자격을 차지했다. 도타 2 메이저 대회인 스타래더 시즌 9 본선에 한국이 출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등을 돌렸던 팬들은 다시금 관심을 보였다.

이미 세계 무대에서 바닥을 경험한 MVP 피닉스는 오히려 부담감이 없어 보였다. 앞서 The Inaugural에서 동남아 2티어급 팀인 미네스키를 격파하며 자신감도 얻었다. 결국, MVP 피닉스는 엠파이어, DK, 얼라이언스를 상대로 패배했지만, 팽팽한 승부를 만들어내며 팬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스타래더를 통해 경험과 자신감을 얻은 MVP 피닉스는 넘을 수 없어 보였던 제퍼를 상대로 KDL 시즌 2에서 첫 승을 기록했고, 이런 기세를 몰아 지난 19일 TI4 동남아 지역 선발전을 2위로 통과하며 시애틀 티켓을 손에 쥐었다. 오랜 패배가 드디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성장한 것은 MVP 피닉스 뿐만이 아니었다. KDL 시즌 2 돌풍의 중심인 포커페이스 역시 제퍼의 벽을 넘은 것은 물론, 아시아권 팀들을 연달아 격파하며 ESL ONE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전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렸다. 승리를 위해 외국 선수들을 영입하던 한국 팀들이 이제는 외국 팀을 위협하는 실력을 갖춘 것이다.

▲ ESL ONE 아시아 최종 예선을 앞두고 있는 포커페이스

한국 도타 2 e스포츠는 아직 성장 중이다. 더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하지만 폭발적인 성장력은 벌써부터 외국 선수들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조이게 만들었고, 해외 중계진과 매체들 역시 한국 팀들의 성장에 주목하고 있다. TI4, ESL ONE,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여러 대회에서 조만간 한국 도타 2 팀들의 우승 소식이 들려올 날이 머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