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트리거,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드래곤퀘스트 시리즈. 한 시절을 풍미하던 16비트 게임기의 명작들이 스마트폰으로 이식되는 것이 낯설지만은 않다. 최근에는 16비트 게임기뿐만 아니라 PS2, PS3, PSP 등 여러 기기의 게임들이 스마트폰으로 이식되고 있다. 심지어 웹 게임도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오는 세상이다.

드래곤퀘스트 8의 이식과정을 설명하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이식 작업이 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 적 있다. 하드웨어가 차이가 나면 프로그래밍 언어도 다를 수밖에 없고 게임 내 코드의 전면적인 구조는 물론 에셋의 종류도 변경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식 타이틀이 쏟아지는 것은 이미 검증된 게임성과 함께 플레이어의 향수를 자극해 안정적이고 계산 가능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추억팔이라고 매도 당하던 단순 이식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최근 캡콤은 자사의 킬러 타이틀인 '몬스터 헌터 포터블 2nd G'의 iOS 버전을 출시, 원작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세가 역시 '판타지스타 온라인 2es'의 iOS의 버전을 출시했다. 스퀘어에닉스는 스마트폰 오리지널 작품인 '파이널 판타지 아기토'를 출시했다.

'추억 팔이'로 대변되는 단순한 이식을 넘어 스마트폰을 새로운 플랫폼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도 단순한 이식을 뛰어넘은 작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으르렁거리는 육중한 엔진소리로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워게이밍의 야심작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를 만나보자.





* 기사에 사용된 스크린샷은 스칸디나비아에 선 출시된 버전으로 촬영했습니다. 한국 앱스토어에 출시되는 버전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월드오브탱크는 벨라루스의 게임 개발사인 워게이밍넷이 개발한 온라인 전차 MMO 슈팅 게임이다. 러시아에서 2010년 10월 30일 발매되었으며 러시아 게임 시장에서 크게 성공하여 그후 북미, 중국, 유럽, 동남아, 한국 등에서 서비스되고 있다.

러시아 서버 동접수자만 110만이 넘는 게임을 이 자리에서 다시 소개하는 것은 지면 낭비요, 키보드 스프링 소모만을 불러올 것이니 이만 접어두겠다. 마치 청소하려고 폼 잡는데 엄마가 "청소 좀 해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여담으로 러시아 국방부 기갑기계화총국 최고사령관이 이 게임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군대에 관심이 많아졌으며, 이 게임은 미래 기갑부대의 승무원들의 첫 번째 준비 단계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기사 번개 부대 포수 출신인 기자의 친구는 월드오브탱크를 못한다.


▲ 월탱 달력 클래스. 전차장님 저도 하나 주시지 말입니다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는 앞서 말했듯이 완벽한 이식과 함께 모바일 환경에 맞게 적절한 수정을 가했다. 가령 PC와 다르게 7 VS 7 전투까지만 지원한다든지 미국, 소련, 독일 세 국가만 등장한다든지는 모바일 디바이스의 환경에 맞게 최적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고심의 산물이다.

최적화가 상당히 잘돼있어 현재 탁상시계 역할만 하는 아이패드1도 최소 프레임이지만 게임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흡사 벤치에 앉아있던 폴 스콜스가 현역으로 뛰는 느낌이랄까. 항간에서는 아이패드1에 대한 노인학대란 이야기가 있지만, 최적화만큼은 확실히 챙겼다.

최적화를 위해 그래픽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거나 게임성 자체를 완전히 바꿨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포탑이 회전하는 속도를 비롯하여 도탄, 경사각을 이용한 티타임, 엄폐 등의 '월드오브탱크'의 특징을 온전히 보전한 체 모바일로 넘어온 모양새다.


▲ 7 VS 7. 일견 심심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맵이 작아 철 튀기는 전투를 경험할 수있다


느릿느릿한 전차의 움직임, 탄의 피격 위치에 따라 다른 관통 판정, 각종 인터페이스 또한 PC 버전의 성격 그대로을 가져왔다. 그 외에도 으르렁거리는 전차 엔진의 묵직함과 조작감 역시 일품이다.

특히, PC 버전의 '월드오브탱크'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부실한 튜토리얼을 환골탈태시켜 처음 '월드오브탱크'를 접하는 유저도 부담감 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이는 게임에 익숙한 코어 유저들이 적은 모바일 게임의 특성상 새로 유입되는 유저들에게 월드오브탱크의 진입 장벽을 낮춰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집 앞 호프집 상씨 아줌마가 요즘 재밌는 게임 없느냐고 물었을 때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를 보여줬더니 "야 그거 재밌어 보인다."하고 별 무리 없이 플레이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물론 티타임이나 헐 다운 따위는 포탄과 함께 대기권 밖으로 날려보냈지만….


▲ 상세한 튜토리얼

▲ 상세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것은 안 가르쳐준다. (*출처: 월드오브탱크 인벤의 카츄사님 글)


진입 장벽을 대폭 낮췄지만, 모바일 게임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게임 내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터치하기도 바쁜데 어느 세월에 타지를 치고 있으랴. 특히 한 팀을 구성해 거점을 선점하거나 우회로 기동을 위한 엄호사격 등 팀플레이 요소가 다수 있는 게임 특성상 상당한 장애로 받아들여질 만한 요인이다.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는 이러한 문제를 PC 버전에 비해 작은 맵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승리 목표는 PC판과 대동소이 하지만 작은 맵을 제공함으로써 간단한 기본 지식만 있다면 전술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주지 않도록 했다.

때문에 '월드오브탱크'유저들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인 "'개돌'하는 트롤이 요기잉네." 하는 상황을 전략적인 국면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엄폐, 사격, 이탈 메커니즘과 배경지식의 필요성을 맵 크기 변화를 통해 모바일 게임에 맞는 호흡으로 재탄생시켰다.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는 오픈 시점에 8개의 전장과 100여 개의 전차를 선보이기 위해 준비 중이며, 새로운 전장과 전차 등의 콘텐츠는 공개 이후 계속해서 추가할 예정이다.


▲ 사실 욕을 먹어도 못 알아먹을 상황이긴 하다

▲ 넌 나를 쏠 수 없어! 하지만 나도 못 쏘겠지


지난 지스타 2013에서 공개되었을 때, 포탑이 360도 회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기동 상의 문제점을 전차의 앞 뒤에 화살표로 진행 방향을 표시해 유저 자신이 어떤 조작을 하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찬사를 받은 적이 있다.

FPS게임은 모바일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끊임없이 이동하며 시야를 확보하고 격발하는 메커니즘을 단순히 터치만으로 표현하기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가상 패드를 사용하는 '월드오브탱크: 블리츠' 역시 이런 메커니즘을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직관적으로 조작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역력하다.

'월드오브탱크: 블리츠'의 전투는 가상 패드로 진행되는 만큼 키보드와 마우스처럼 빠르고 정밀한 조작은 힘들지만, 조준점을 적 전차 근처에 가져가면 자동으로 적 전차를 향해 조준점이 이동한다. 여기서 다시 스나이퍼 모드로 바꿔 적 전차의 약점을 조준할 수도 있어 조작에 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 좋은 영혼의 싸움이다.

▲ 하얗게 불태웠어...


'월드오브탱크: 블리츠'의 조작은 X-BOX 에디션의 게임 패드 조작과 상당히 흡사한데, 왼쪽 엄지로는 전차를 이동하고, 오른쪽 엄지로는 시점을 움직일 수 있다. 옵션에서 조작을 변경할 수 있으며 주포의 발사는 양손 모두 가능하게 되어있다. 스나이퍼 모드 또한 재현되어 있으며, 수리 도구 등의 각종 소모품을 사용할 수 있다. 당연히 탄 교환도 원터치로 구현했다.

액션성을 중요시하는 게임들이 게임패드를 지원하는 추세에 따라 '월드오브탱크: 블리츠' 역시 iOS용 컨트롤러를 지원하고 있으며 개발자가 발표한 바로는 보다 다양한 기기를 지원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 기자도 패드 물려서 플레이해봤는데 좀 더 나은 경험이 가능했다

▲ 하지만 스나이퍼 모드에서는 마우스 키보드가 그리워...


진입 장벽을 대폭 낮췄지만 '월드오브탱크'의 심오한 세계를 배제하지 않았다. 즉 모바일이라고 단순하게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는 PC 버전의 물리효과가 대부분 적용된다. 전장에 있는 모든 지형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전차가 미끄러지기도 한다. 전차끼리 충돌하면 데미지를 입고 조준원이 흔들리며 중량 차이가 클 경우 충각전술의 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관통력 개념도 같아서, 경사 장갑에 의해 포탄이 탱크에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는 점도 오롯이 이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PC 버전에서 사용되었던 티타임 전술도 그대로 활용 가능하며, 각도에 따라 포탄이 튕겨나가는 도탄 현상도 똑같이 표현된다.

기자가 플레이하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상대 탱크와 서로 Flank position(옆구리)를 잡기 위해 엄폐물을 사이에 두고 뱅뱅 도는 기동을 할 때의 긴장감이 정말 대단했다는 점이다. 모바일 게임을 많이 즐겨왔다고 자부하지만 이런 긴장감과 현장감을 전달해주는 게임은 없었다. 재미를 전달한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도 미약하리라 우리는 안될 거야

▲ 원하는 전차를 사용하기 위해 차근차근 밟아가자

▲ 급탄은 슬라이더로 자유롭게



대단한 게임임은 분명하지만, 휴대성은 글쎄?

모바일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부분 유료화 정책은 워게이밍의 다른 작품과 맥을 같이한다. 원작과 동일하게 일부 선택적 요소를 제외하면 모든 콘텐츠가 무료다. 게다가 튜토리얼을 마치고 나면 프리미엄 계정을 하루 동안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현금이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Free to win)"라는 워게이밍의 철학이 녹아있는 부분이다.

부분유료화의 장단점이 계속돼서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유저들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 사라져버린 유료 어플 시장에서 어쩔 수 없이 부분유료화를 선택한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는 상당히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요금제를 채택했다.

다만, 수준 높은 비주얼과 깊이 있는 게임성 그리고 유저의 반발을 최소화한 과금정책을 담아냈다고 해서 완벽한 게임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는 모바일 게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인 '휴대성'에 상당한 핸디캡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 프리미엄 계정 1일 이용권을 제공한다. 열심히 달리라규!

▲ 전차가 필요한가? 사면된다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는 최근 모바일 게임의 대세로 자리 잡은 원 버튼 자동전투라던가 짧은 시간 부담 없이 즐기는 간편한 게임들과는 다르다. PC 버전에 비해 작아진 맵과 짧아진 전투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타 모바일 게임보다 신경을 많이 써야 하며 각 전차의 성능과 전술에 대한 이해도를 요구한다.

쾌적한 네트워크 환경은 필수이며, 게임을 플레이하는 3~5분 동안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탓에 이리저리 치이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플레이하는 것은 힘들 듯하다.

언급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를 상당한 수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미소녀 카드게임과 자동전투에 지친 유저들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으며 단순한 이식을 넘은 작품이란 것을 고려했을 때 모바일 게임계에 적잖은 반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 남자와 탱크의 공통점. 하부가 약하다.

▲ 남자와 탱크의 공통점. 단단하고 각이 살아있다

▲ 믿고 보는 워게이밍. 모바일 버전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