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깨진 그릇은 잘 붙지 않는다. 마치 울고불고 매달려 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옛 연인과 같다. 1년 여간 각고의 노력을 통해 그녀가 원했던 사람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이미 깨진 그릇 조각은 청소기로 빨려들어간 이 후다. 혹여 NASA의 신기술을 총동원해서 붙인다하여도 예전의 그 그릇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게임의 기획은 매우 중요하다. 애초에 기획이 뒤틀려 버린다면 전투요소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래픽과 스토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떠나간 유저는 돌아오지 않는다. 업데이트를 꾸준히 해도 힘들다. 괜히 여자들이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너만 보고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이러는거 아니다.

'슈퍼판타지워'는 지난 '넥슨 스마트 온'행사에서 공개될 때 "개발자들이 재미있게 즐겼던 SRPG 처럼, 게임의 결과가 아닌 게임을 하고 있는 재미를 전달할 수 있도록 개발 중."이라고 소개됐다. 이 말을 기억하고 접한 CBT는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의도에 정확히 부합했다.

적어도 조금하다가 "이게 무슨 *SRPG야!"라고 절규하는 일은 없다. 장담할 수 있다. 사실 모바일로 SRPG가 나온다고 했을 때 우려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우와는 다르게 깨지지 않은 온전한 그릇이 나왔다. 정말 SPRG를 하고 있는 느낌이 났다. '슈퍼판타지워'는 SRPG라는 그릇에 새로운 술을 담았다. 이 지면을 빌어 CBT를 통해 먼저 마셔본 새 술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대중에 널리 알려져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사용한다.




SRPG가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게임의 특성보다는 택틱스 오우거를 필두로 창세기전시리즈, 영걸전시리즈, 파랜드택틱스시리즈 등으로 전성시대를 누렸던 장르라고 말하고 싶다. 짜인 이야기를 따라가는 플롯은 RPG와 같으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위한 전략(strategy)을 강조했기 때문에 SRPG라고 불린다.

모바일에서 많이 시도되지 않았던 SRPG를 표방한 '슈퍼판타지워'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우려하던 조작의 불편함도 없었고 1.5배속 지원도 가능했다. 한 번 클리어 했던 스테이지는 자동 전투를 할 수 있게 배려했다.

로드가 사용하는 로드 스킬을 이용한 광역 공격은 신선했다. '파이널판타지택틱스'를 모바일에서 접하고 느꼈던 배신감과 귀찮음은 없었다. 오히려 PSP로 출시됐던 '잔다르크'처럼 간단하지만 제법 높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로드 스킬은 캐릭터의 턴을 사용하지 않는다.


으레 SRPG들이 그러하듯 '슈퍼 판타지 워'는 전략성을 강조한다. 전투에서는 지형 타일, 상성, 일제(一齊) 등 다양한 요소를 활용해 지엽적 전술 행동이 필요하다. 장비 강화와 영웅의 잠재력 개방 등 거시적인 시점에서 전략적인 기조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플레이어는 가위바위보를 활용한 상성과 캐릭터에 따른 공격방향, 맵 타일에 따른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전투를 펼쳐야 한다. SRPG를 해봤던 유저라면 별다른 장벽 없이 쉽게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다. 초등학교 때 옆자리 짝꿍을 어떻게 괴롭힐지 고민하던 이후로 머리를 써본적 없는 사람이라도 할 수 있다. 장담한다.

전반적으로 조작은 매우 편리했다. 이동, 공격을 모두 간단한 터치만으로 쉽게 행할 수 있었다. '파이널판타지택틱스'처럼 귀찮게 메뉴를 들락날락하지 않아도 되어 매우 쾌적했다.

▲ 간단하면서도 친절하다.


전투의 흐름은 한 번씩 페이즈를 주고받는 전통적인 SRPG방식이다. 반격이 없어서 삶의 어려움을 일찌감치 일깨워줬던 '영걸전'처럼 두 턴을 내다보고 움직여야 한다. 속된말로 '선빵'맞고 밀리기 시작하면 불리한 전황을 감수해야 한다. 함부로 이동할 수 없어 전술적인 움직임을 고민하게 한다.

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캐릭터는 총 4명. 공격대라 불리는 파티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도 게임의 재미 요소 중에 하나다. 캐릭터에 따라 공격 범위와 방향, 스킬이 다르기 때문이다. 스킬은 한 캐릭터가 4개까지 보유할 수 있으며 레벨업을 할 때 새롭게 스킬을 획득한다.

개인적으로 '로드 스킬'에 신선함을 느꼈다. 캐릭터의 턴을 사용하지 않고 전술적 목표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으며 기존의 SRPG위에 '슈퍼판타지워'만의 매력을 올렸기 때문이다. 익숙한 모습에서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고 해야 할까? 마치 새롭게 바른 립스틱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지형을 이용하면 이런 장면도 연출할 수 있다.

▲ 전투, 딱히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시나리오는 메인 스토리를 따라가며 즐기게 된다. 메인 스토리 이외에도 소소한 서브 시나리오도 준비되어 있다. 모바일 RPG라 불리는 게임들이 시나리오에 별다른 무게를 싣지 않고 수집과 성장에 초점을 맞췄다면 '슈퍼판타지워'는 이야기와 전투가 게임을 가로지르는 두 중심축이다.

심도 있거나 반전이 있는 시나리오는 아니다. '세계정복'이라는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점이 곳곳에 눈에 띈다. 크게 웃기지는 않지만 소소하게 '피식'할 만한 거리가 가득하다. 시나리오 자체가 게임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전투와 함께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전투-이야기'의 형식이다. 튜토리얼도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캐릭터를 전투를 통해 획득하고 같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슈퍼판타지워'에 있는 수익 모델은 장비와 골드 그리고 잠재력을 개방하는 데 사용하는 마나스톤이 전부다.

장르 특성상 각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캐릭터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캐릭터의 스킬을 이해하며 함께 나아간다. 그런데 아무런 감정의 공유가 없는 캐릭터가 뽑기를 통해 '툭'하고 나타났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스토리에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싶다. 하나의 훌륭한 사업 모델을 포기하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모습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 세삼스럽게 뭘...

▲ 스토리를 보자, 스토리를!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비에 관한 부분이다. 장비가 레벨업하는 시스템은 SRPG에서 그리 찾아보기 힘든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슈퍼판타지워'의 장비 경험치는 전투를 통해 획득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제물'로 강화하는 개념이다.

전투를 수행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흐름에서 이는 주의를 크게 분산시키며 몰입을 방해한다. 모바일 RPG에서는 매우 쉽게 접할 수 있는 이 부분이 '슈퍼판타지워'에서 전투와 스토리에서 즐기는 감정의 순수한 즐거움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드벤처 게임에서 등장하는 수집품과 좀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재료를 모아야된다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강박증이 개입하는 순간, 게임은 멍청해진다. 전장을 이용하고 상성을 이용하는 전술적인 움직임을 게임 상에서 충분히 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외의 부분에서 게임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근래에 찾아볼 수 없었던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별 것 아닌 부분이 더 아쉽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유료 게임으로 나왔으면 어땠을 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든다.

▲ 그래도 이런 시도는 멋졌다.



오래 만나던 여자와 헤어지면 비슷한 스타일을 한동안 잊지 못하는게 인지상정이다. 창세기전, 파랜드택틱스 등의 게임을 즐겨왔던 유저들에게는 '슈퍼판타지워'의 단순한 스킬과 좁은 전장이 아쉽게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와 같지 않으면 어떠하랴! 새로운 사람에게 새로운 매력을 찾아내 새로운 잔을 만드면 되는 거다. 완벽하게 과거의 그녀와 같은 사람은 없듯, '슈퍼판타지워'는 SRPG 밑바탕에 새로운 요소를 더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예전처럼 각 잡고 하지 않아도 되는 SRPG를 선보였다.

제대로 된 그릇은 이미 만들어졌다. 몰입감 있는 전투와 시나리오는 SRPG에 향수가 없는 세대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아직 CBT기 때문에 담긴 술에 완전히 만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약간의 불순물이 보이는 것뿐이지 지금 당장 먹는 데 지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모바일 기기에 맞는 인터페이스와 짧은 호흡은 '슈퍼판타지워'가 가진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았다. 보는 맛보다 하는 맛이 더 컸다. SRPG라는 새로운 잔에 부어진 새 술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동그란 얼굴처럼 존재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다. 10년 전 추억이 없어도 충분히 괜찮은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