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이중성(二重性)의 매력에 대중은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중성을 가진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동경을 품다가, 어느새 자기도 이중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확실히 예전엔 이중적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인 느낌을 주진 않았다. 뒤에 사람이 붙으면 더 그랬다. '이중적인 사람이다'라는 말은 어딘가 겉과 속이 다른, 나를 충분히 속일 수 있는, 언젠가 나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길 위험이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마치 소시오패스, 더 나아가선 사이코패스적 위험이 잠재되어 있는 사람.

단어의 느낌이 바뀌기 시작한 건, 아메리칸 히어로 영화와 일본 만화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그곳에서 주인공들은 이중적이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스파이더맨의 주인공인 피터 파커는 직장에서 갈굼 받고, 연애도 잘 안 풀리는 우리네 모습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세계의 위험을 몇 번이나 구한 슈퍼 히어로다.

배트맨, 슈퍼맨, 아이언맨 등. 대부분 슈퍼 히어로들(가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은 다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다.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적인 이중성이 아니다. 딱히 표현할 단어는 없지만, 긍정적인 이중성이다.

그런 긍정적인 이중성은 우리 일상에 녹아있다. 우리는 어느새 긍정적인 이중성을 동경하고 사랑하고 있다. 싸이 강남스타일의 가사처럼 '이때다 싶으면 묶었던 머릴 푸는 여자'가 여자의 이중성, 초식남 상위 호환 버전인 '낮져밤이'가 남자의 이중성을 대표한다.

월드오브탱크의 'ARETE' 팀의 '이중성'도 그런 부류다.



ARETE 팀장 송준협은, 낮에는 늦깎이 대학생. 밤엔 한국 최고의 월드오브탱크 팀 ARETE의 팀장이다. 올 해로 서른을 맞이한 그는, 낮 대부분 시간을 학업에 할애한다. 물론, 성적은 좋지 않다. 밤에 게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송준협의 낮은 괴롭다. 면학 분위기를 따라간다는 건 현 프로게이머(ARETE는 스스로 프로게이머라고 생각하지 않지만)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의 나이도 어리다. 송준협은 ARETE 초기에는 자기가 게임을 한다는 걸 밝히지 않았다. 당시 주위의 시선이 따가운 건 자명한 일이었다. 덩치도 크고, 인상까지 무서운. 나이 많은 복학생. 진짜 '어깨'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교수들도 송준협을 보면 한숨만 쉬었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은 있는 건지, 성적은 왜 이렇게 나쁜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송곳 같은 말로 계속 찔렀다.

▲ ARETE 팀장 송준협


그러던 그가, 자기가 프로게이머임을. 한국 최고의 월드오브탱크 팀인 ARETE의 팀장이라고 밝혔다. 그 때 송준협이 느낀 카타르시스는 말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신입생들은 멋있는 직업을 이미 가지고 있는 송준협에 푹 빠졌다. 남자 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심지어 교수들도 송준협의 팬이 됐다. 낮에 꾸벅 꾸벅 졸고, 수업도 밥먹 듯이 제치던 것에 정당한 이유가 생긴 셈이다.

이미 월드오브탱크에서 큰 발자국을 남긴 송준협. 최근 목표는 졸업이라고 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방법을 보여주겠다고, 남자다운 미소를 지으며 장담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쫓지 말라는 말은, 동시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거고. 너는 한 마리의 토끼를 이미 잡았고, 이어서 다른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 거라고 굳이 말하진 않았다.



ARETE의 큰형, '투수' 최민수는 배우다. 백세주 CF로 이미 얼굴을 알렸다. 대단한 작품을 한 건 아니다. 그래도, e스포츠에서 최민수라고 하면 '나 떨고 있니'의 최민수보다 '투수' 최민수를 떠올릴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다.

최민수는 고등학생 때 우연히 참여했던 연극에 무한한 매력을 느끼고 중앙대 연극학과에 입학했다. 군대를 전역하고 연기에 몰두하던 중 CF 모델 제의가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배우 인생이 시작됐다. 가정도 있다. 최민수의 아내는 제 1호 팬이자 코치다. 둘의 사랑의 결실도 이미 세상에 태어났다. 딸과 아들, 두 명의 아이들을 뒀다. 낮에는 배우 아빠, 밤에는 프로게이머 아빠를 가진 셈이다.

▲ 최민수의 예전 모습. 2009년 즈음이라고


집에서 게임 하는 아빠. 상당히 부정적인 뉘앙스의 오라가 풍겨오는 말이긴 하지만, 최민수는 게임을 하는 것을 가족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예전보다 술도 적게 먹고, 연기를 하지 않아도 짭짤한 부수입이 들어오니 아내가 응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로게이머의 가장 이상적인 가정이 여기 있었다.



ARETE의 가장 특수한 이중성은 송준협과 최민수지만, '소드' 신남희의 이력도 심상치 않다. 신남희는 트럭 운전사다. 흔히 볼 수 있는 1톤 트럭이 아니라, 게임 '유로 트럭'에서나 운전해 볼 수 있던 10톤 이상의 트럭이다. 밤낮없이 운전해야 하는 트럭 운전사가 프로게이머를 한다니. 처음 말을 들었을 땐 이해할 순 없었지만, 신남희의 열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새벽부터 일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게임 연습했다. 게임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ARETE의 당당한 주전 멤버라는 것에서 그의 재능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가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더 무시무시한 선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송준협은 "원래 간절함이 있어야 더 잘할 수 있는 게 월드오브탱크다"라는 탱뽕(?)섞인 답변을 했다. 당시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에 당시에 고개를 끄덕인 것을 생각해 봤을 때, 기자도 어쩔 수 없는 월드오브탱크의 팬인가 보다.

▲ '이븐폴' 송호성


'시후파파' 방정한도 낮에는 아빠, 밤에는 프로게이머다. 인터뷰 혐오 증후군이 있다고 자랑하는 지완선도 낮에는 집에서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는 노동자, 깔끔한 외모와 능변으로 팀의 프론트맨 감인 송호성은 사람들에게 나서는 걸 싫어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 두 멤버인 이준수, 이태웅은 아직 이중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긴 하나, 누가 알겠나. 이 둘이 가장 큰 반전의 주인공이 될지.

WGL APAC 시즌3 온라인 예선이 1월 5일 시작된다. 월드오브탱크 최대 대회인 그랜드 파이널을 향한 마지막 기회다. 경기 방식도 '공방전(Attack/Defense Mode)'이 도입되고, 기존 전차 단계의 총합도 42단계에서 54단계로 상승해 더 다이나믹한 경기가 기대된다.

ARETE는 팀 자체도 이중적이다. 자기들만 좋은 전략과 전술을 감춰놓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원한다면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당장 다음 경기를 치르는 적이라도 예외는 없다. 최고의 위치에 있지만, 누군가 자신들을 이겨주는 걸 은근히 바라고 있다. 그런 재미있고, 긍정적인 이중성에 항상 1위만 차지하는 ARETE를 팬들이 싫어하지 않는 큰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