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고등학교 시절 각종 백일장에 곧 잘 나갔다. 보통 대학교나 유명 문학재단에서 여는 백일장에는 수백명의 학생들이 몰려와 시나 소설을 써서 상을 받기 위해 도전하곤 했다. 대부분의 백일장에서 주어지는 시간은 서너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주제가 주어지면, 간단히 이야기를 짠 후 바로 작성에 들어가야 얼추 맞출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써낸 글들은 비록 완벽할 순 없었지만, 간혹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번뜩하는 아이디어가 들어있었고, 그것이 나중을 위한 자산이자 도전의 촉진제가 되곤 했다.

어느 소설가는 '소설은 펜이 아니라 의자에 앉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 했고, 또 누군가는 '창작이란 시간과의 싸움이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글이 아닌 다른 어떤 창작물을 백일장처럼 만든다면 어떨까? 제한된 주제로 정해진 시간 동안,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면 말이다. 그것도 오늘 처음만난 사람들과, 각자의 컴퓨터만을 가지고, 단 48시간 만에!


지난 23일 금요일 밤, 서울 서초구 스마일게이트 오렌지팜에서, 각계각층의 게임 개발자들이 모여 48시간이라는 주어진 기간 동안 모여서 게임을 만들어보는, '2015 글로벌 게임잼 코리아'가 열렸다. '글로벌 게임잼'은 전세계의 인디 게임 개발자들이 동시에 참여하는 전세계 단위의 게임 개발 축제로, 올해로 7회째를 맞는다. 한국에서는 스마일게이트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유니티 코리아와 함께 행사를 진행했다.

참가 인원만 백명 안팎, 이마저도 이보다 수배 이상의 신청자들이 시간과 장소의 제약에 묶여 함께하지 못한 숫자였다. 기획, 아트 디자인, 프로그래밍 등 자기 역할에 맞추어 자리를 채운 참가자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가진 것은 자신의 노트북 뿐, 시간은 단 48시간에 함께할 팀원은 오늘 처음 만난 상황. 과연 이들이 이러한 조건 속에서 어떤 멋진 게임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를 품게 될지 기대됐다. 그들과 함께한 48시간, 인벤이 그 현장을 다녀왔다.


시작에 앞서... 마음 가짐과 주제

행사가 시작됨과 함께, 유니티 코리아의 지국환 에반젤리스트가 무대에 올라 '글로벌 게임잼'을 소개했다. 전세계의 개발자들이 각 지역에 마련된 장소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게임잼'을 진행하며, '글로벌 게임잼' 웹사이트를 통해 전세계의 개발자들이 서로의 결과물을 공유하고 즐기게 된다.


▲ 지국환 에반젤리스트(좌), 권연주 실장(중), 강심덕 팀장(우)

그는 "이번 게임잼의 목표는 게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이 즐기는 것이다"라 밝혔다. 이어 스마일게이트 사회공헌실의 권연주 실장, 유니티 코리아의 강심덕 팀장 등 행사 주최를 맡은 이들이 각각의 소감과 인사를 전했다.


▲ 할 수 있는 것을 불안해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다음으로 '글로벌 게임잼' 참가자들에게 전하는 해외 인사들의 축사 영상이 선보여졌다. 총 세명의 해외 개발자가 나서 프레젠테이션 영상과 함께 게임 개발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조언했다.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독창성,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자체에 다양한 시도를 도입할 것 등 전방위에서 이어졌다.



그 다음으로 참가자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가는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은 주변에 앉은 이들과 이름을 묻고,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친해져갔다.

마지막으로 이날의 주제가 던져졌다. 그 주제는 영어로 된 문장 하나였다. 'What do we do NOW?' 주제를 확인한 참가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우리, 이제 뭘하지?'


'우리 뭐하지?'



팀을 만듭시다, 탐색과 선택의 시간


주제가 주어지고, 짧은 시간의 아이디어 구상 시간이 흐르자 본격적으로 팀을 만드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이디어를 발표할 기획자들이 앞으로 나서서 짧고 굵은 프레젠테이션으로 아이디어를 선보이면, 몇몇 아트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가 그 자리에 모여 아이디어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 이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되는거거든요

▲ 게임을 만드는건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어떻게 되겠죠!

▲ 미소녀 게임 만듭니다. 미소녀 그리실 분 모십니다

▲ 기획, 프로그래밍, 아트, 다 기본 잡혀있습니다. 몸만 오시면 됩니다!

현란한 말빨로 좌중을 휘어잡아 8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팀을 꾸린 참가자들도 있는가 하면, 명확한 아이디어가 잡히지 않아 팀을 만드는데 애를 먹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도 팀원을 찾거나, 팀을 원하는 이들이 모여 이곳저곳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경청했다. 그렇게 한시간 가량의 시간이 흐른 후, 총 15개의 팀이 만들어져 개발을 시작했다.

▲ 대화중인 사람, 설득하는 사람, 소리지르는 사람...

▲ 저희의 자리를 애타게 찾습니다 ㅠ.ㅠ

▲ 내가 입찰한 개발자 상회입찰 하지마라!



그래서... 이제 어떻게 만들지?


각 팀은 자리를 잡자마자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다. 기획자는 게임의 기본 틀과 거기에 들어갈 시스템과 콘텐츠를 저울질 하고, 아트 디자이너는 배경과 캐릭터에 사용할 아트 리소스의 초안을 잡고, 프로그래머는 거기에 맞는 코드를 짰다. 48시간으로 제한된 만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 전기세 걱정하지마! 스마일게이트가 쏜다!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한지 몇시간, 여기저기 난관에 부딪힌 팀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획은 많은데 가능한 것은 얼마 안된다거나, 아트 리소스를 날렸다던지, 알 수 없는 코드 버그까지...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팀원들끼리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디서도 고성이 오가거나 자포자기를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이번이 두번째 게임잼 참가라는 한 외국인 개발자

▲ "미소녀 게임, 한번 만들어보죠!"



▲ 15개 팀과 그들의 게임

▲ 음... 그...그래...

팀원이 두명이든, 여덟명이든, 각 팀들은 빠르게 친구가 되고 '형, 오빠, 언니, 누나, 동생'이 되어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나이, 성별, 경력을 모두 초월하는 그들의 공통된 목표는 '게임을 완성하는 것' 이었다.


▲ 일요일 3시를 향해 간다!



중간지점에서 맞닥뜨린 고비


개발을 시작한지 어느덧 이틀째 새벽. 24시간이 지나고, 모두가 피로와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 전사자(?)가 속출하고, 게임 개발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 하나씩 야전병동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 어느새 게임개발에 최적화된 행사장

▲ "게임 한 번 볼 수 있어요?" 라는 질문에 볼펜을 꽉 잡던 그 개발자

▲ 끝내 이렇게 꿀잠을 자는 사람이 누군지 밝혀내지는 못했다

유니티에서 나눠준 담요를 덮고 쪽잠을 청하는 참가자나,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침대 매트리스를 깔고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또 행사장에서 제공하는 각종 간식거리를 수북히 쌓아놓고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일한다는 것을 증명하듯 작업을 계속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 아이템 챙겨가셔야죠!

▲ 정신 번쩍! 을 위한 샤워시설까지

▲ 알코올+비타민 = 건강 조심!

카페인, 알코올 등 함부로 취급되서는 안되는(?) 물질이 들어간 음료가 난립하기 시작했다. 이쯤되면 사람이 게임을 만들고 있는건지, 게임이 사람을 붙들고 있는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물론, 한켠에는 정신줄을 놓아버린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지만.



▲ 작업이 고되도 미소는 항상 유지하는 센스




마지막 12시간, 그리고 완성


완성된 게임을 제출해야 하는 시각은 마지막날인 일요일 오후 3시. 그러니까 실제로는 44시간의 시간이 주어진 셈이었다. 그럼에도 각종 악재를 견디고 완성되어가는 게임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팀원이 실종(?)됐다 돌아오거나, 컴퓨터가 잘못되어 몇시간 동안의 작업물이 날아가는 불상사에도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게임을 테스트하는 사운드가 들려왔다. 게임을 만든 이들의 함성도 함께.


▲ 이틀 밤샘의 흔적

▲ 코딩이 된다... 코딩이 된다...

▲조금만 기다려! 다시 일어나 게임을 만들테다!

▲ 그래 그렇게만 만들어봐요

▲ "되는거 같지?" "음... 아무래도 그렇지?"

게임이 완성단계에 접어들자, 기획자들은 프레젠테이션과 게임 제출을 위한 기반 자료를 모았다. 아트 디자이너들은 게임에 들어간 리소스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주력했다. 프로그래머들은 마지막 버그 하나까지 잡아내는 집요함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25일 일요일 오후 3시, 모든 게임 제출이 끝났다.


▲ 뭔가 위험한 게임이 만들어지고 있다

▲ 프로그래머 궁극오의 라면코딩!

▲ 완성 후엔 기념사진까지

▲ 음... 여러분이 바로 그 간결하면서도 화려하고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하고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분들이군요

▲ 그래서 특별히 다른 포즈도 부탁했습니다



다같이 즐겨라! 게임 플레이 및 시상


최종 제출이 끝난 후, 15개 팀이 만든 각각의 게임을 참가자 모두가 즐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노트북과 핸드폰을 들고 달려와 자신이 만든 게임을 보여주고, 플레이어의 반응을 살피며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이제 막 완성한 자신의 요리를 내놓은 셰프 같았다.


▲ FMG팀의 퍼즐 아케이드 '집으로 가는 길'

▲ 간결...뭐시기 팀의 슈팅 '픽셀 에볼루션'

▲ 엑시아팀의 '단짠단짠'

▲ 도원결의팀의 '스타사이드'

▲ 커플브레이커팀의 '남친이 암걸리는 게임'

가장 놀라운 점은 거의 모든 게임이 처음 정해진 아이디어 내에서 그 자체로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을 만큼 완성도를 갖추었다는 점이었다. 사소한 버그나 미흡한 점을 보이는 게임은 그야말로 한두개, 극소수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 게임들 역시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 정말 나온 미소녀 게임. 그런데 이제보니 노트북에 스티커가...?


▲ 무엇보다 인상깊었던 근육질 슬라임



▲ 군인이 배가 불렀어?

▲ (어이없음)

한시간 반 동안 각자의 게임을 즐긴 뒤, 발표가 이어졌다. 15개 팀을 대표하는 개발자들이 무대에 올라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다. 게임의 퀄리티 만큼이나 훌륭한 프레젠테이션도, 자료 없이 오직 말로만 진행되었지만 높은 환호를 받은 발표도 있었다.


▲ 여친이 부먹이냐 찍먹이냐를 맞춰야하는 게임 '단짠단짠'

▲ 복스럽게 먹는다

▲ 시간 내에 만드려면 가능한 기획만 하는게 필수!

▲ 팀 이름이 왜 '의미없죠' 인가요...?




▲ 참고로 팀명 FMG는 'Foot made games'의 약자입니다

이후 참가자들이 직접 뽑은 '글로벌' 상을 비롯, 팀워크가 좋았던 팀에게 주는 '게임잼' 상 등 팀별 상과 함께 각 참가자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추첨식이 있었다. 그야말로 우열보다는 서로의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보고 그에 대해 토의를 나누는 축제의 장이었다.


▲ 인기투표를 통해 정해진 '글로벌' 상, 그 주인공은 간결(이하생략)!

▲ '글로벌' 상의 '간결(이하생략)' 팀과 '게임잼' 상의 '서바이벌' 팀

▲ 추첨을 통해 다양한 선물이 참가자 전원에게 주어졌다

▲ 마무리는 역시 먹을 것 파티!

▲ 모두 3일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게임잼은 끝나고, 개발자와 게임이 남았다


과연 인디 게임 개발이란 뭘까? 누군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48시간 동안 잠도 줄여가며 미소를 띈 채 게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로 그 과정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참가자 중 게임잼을 수차례 경험한 바 있는 한 개발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디 게임 개발, 게임잼에 대해 보다 다양한 시각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요즘 게임업계는 이러한 인디 개발자들에 대해서 '스타트업'의 시선만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런 목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좋아하는 게임을 만들어서 수익을 낼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죠.

하지만 어떤 이들이 게임을 만들고, 또 그 결과물이 좋고, 재미있는 것을 오직 사업적인 면만을 보고 '그래, 좀 더 투자하면 좋은 수익을 얻을 수 있겠어' 라는 식의 반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게임 재미있는데? 어떻게 만든거지? 게임을 만드는건 과연 어떤 재미를 줄까?' 하는 식으로 게임을 만드는 것 자체가 즐거운 취미이고,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걸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디 게임 개발은 결국 게임을 만드는 것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처럼, 돈이나 시간의 제약 없이 누구나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마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누구나 시를 쓰고, 누구나 그림을 그렸듯이, 이제는 누구나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시대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