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있는 모든 도타2 팀의 최종 목표는 바로 디 인터내셔널(The International, 이하 TI)이다.

TI는 수십 억 원이 넘는 상금 때문에 우승을 하는 순간 인생이 바뀔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세계 대회다. 현존하는 모든 도타2 팀은 이 TI 하나만을 바라보고 1년을 투자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팀이 창단, 리빌딩, 해체를 반복한다. 하지만 TI 진출이 허락된 팀은 전 세계를 통틀어 불과 16개 뿐이다.

2013년 10월, 도타2가 국내에 정식 서비스 될 때만 해도 한국 팀의 실력은 냉정히 평가해 '수준 이하'였다. 국내 리그 NSL 시즌1 우승 팀인 스타테일은 슈퍼 인비테이셔널에서 러시아의 VP에게 손 한 번 뻗지 못하고 KO패를 당했다. 당시 VP의 'NS'는 인터뷰에서 '한국 팀은 한타 능력이 약하고 픽밴이 너무 단순해서 뭘 할지 뻔히 보인다'고 일침을 가했다.

하지만 그 후로 약 1년 8개월, 한국은 TI5 동남아 예선을 1, 2위로 마감하는 기염을 토했다. MVP 핫식스는 한국 팀 사상 최초로 TI 본선 무대에 직행했으며, MVP 피닉스는 지난 TI4에 이어서 2년 연속 와일드카드전에 출전하게 됐다. 한타가 약하고 밴픽도 단조로운 한국 팀이 2년도 되지 않아서 전 세계에서 16개 팀 밖에 갈 수 없는 TI에 발을 들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강해지게 한 것일까?



■ 수많은 해외 리그 출전, 패배할지언정 포기는 없었다!


슈퍼 인비테이셔널 매치에서 해외 팀들이 한국 팀의 단점으로 자주 지적했던 것 중 하나는 '경험 부족으로 인한 상황 판단 미스'였다. 슈퍼 인비테이셔널이 끝난 후에도 NSL, KDL 등의 국내리그가 펼쳐졌지만 비슷비슷한 수준의 한국 팀들끼리의 대결만으론 결코 세계 무대에 나설 수 없었다.

이에 MVP 피닉스는 스타래더, 더 서밋, i-리그, 드림리그 등 수많은 해외리그에 꾸준히 참가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해외리그에서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드림리그 예선에서는 레이브, iG, LGD에게 3패를 당하며 예선에서 탈락했고, 더 서밋2에서도 동남아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행운은 노력하는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iG와 LGD가 비자 문제로 드림리그에 불참하게 되자 MVP 피닉스가 대타로 참여하면서 MVP 피닉스는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메타에 적응하지 못해 고전하던 MVP 피닉스는 비록 1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 MVP 피닉스에게 한 줄기 빛이 됐던 드림리그 대타 출전.

이때 쌓은 경험이 현재의 MVP 피닉스와 MVP 핫식스에게 밑거름이 됐다. 당시의 MVP 피닉스 멤버들 중 '레이센' 이준영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이 각각 둘로 나뉘어져 현재의 MVP 피닉스와 MVP 핫식스에 들어가게 됐다. 각 팀별로 경험 많은 선수들이 둘씩 포함되자 MVP 형제 팀은 새로운 멤버를 갖춘 상태에서도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MVP 피닉스는 '마치' 박태원이, MVP 핫식스는 '힌' 이승곤이 경험이 부족한 다른 선수들을 이끌었다. 연습 자체부터 애를 먹었던 전 포커페이스 선수들인 '페비' 김용민과 'MP' 표노아는 MVP에 입단한 후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로스터를 꾸린 양 팀은 이후에도 꾸준히 해외리그에 참가하면서 팀웍을 다졌다.

그리고 마침내 MVP 핫식스가 MPGL 시즌7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면서 국내 도타2 사상 최초로 해외 오프라인 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따내게 됐다. 해외리그에서 꾸준히 활동한 경험 많은 선수들과 실력은 출중하나 경험이 부족했던 선수들의 조화가 이뤄낸 쾌거였다.



■ 눈물나게 쓴 보약이 된 DAC, 크게 늘어난 영웅풀


도타2 아시아 챔피언쉽(이하 DAC). MVP 피닉스는 초청 팀 자격으로 DAC에 참가했다. 스타래더 시즌11 4위, i-리그 시즌2 4위를 기록한 MVP 피닉스는 종전의 부진을 떨쳐낸 듯한 모습이었다. 많은 도타2 팬들은 성장한 MVP 피닉스가 '미니 TI'로 불리는 DAC에서 얼마나 좋은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었다. 개막전에서 MVP 피닉스가 TI4 우승 팀 뉴비를 잡아낼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MVP 피닉스는 이오와 흑마법사 운영 외에 준비된 카드가 없었음이 드러났고, 남은 모든 팀은 1초의 고민도 없이 이오와 흑마법사를 밴했다. 팔다리가 잘린 MVP 피닉스의 DAC 최종 성적은 1승 14패, 최하위였다. 성적을 떠나 경기력이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었기에 국내 도타2 팬들은 MVP 피닉스에게 비난을 쏟아냈다.

흑역사가 되어버린 DAC가 끝난 후, 구 MVP 피닉스는 갈라졌다. 박태원과 '큐오' 김선엽은 MVP 피닉스에 남았고 이승곤과 '포렙' 이상돈은 MVP 핫식스로 이동했다. 팀이 분리되면서 양 팀의 전력이 하향 평준화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MVP 형제 팀은 모두 보기 좋게 생존에 성공했다.

▲ 1-14로 마감한 DAC였지만 결국 이는 전화위복이 됐다.

DAC이후로 양 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변화는 픽풀이 눈에 띄게 넓어졌다는 것이다. 팀 이동 뿐만 아니라 게임 내 포지션도 변경되면서 양 팀은 기존에 거의 쓰지 않던 카드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드캐리 메타가 주류를 이루던 DAC에서 끝까지 흑마법사, 가시멧돼지 등의 카드만 고집하다가 쓴 맛을 봤던 MVP 피닉스는 'kpii'라는 훌륭한 캐리를 영입하면서 변화했다. 6.84패치에서 대세 영웅인 레슈락, 고통의 여왕 등을 다룰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미드와 캐리끼리 포지션 변경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다.

MVP 핫식스의 픽풀은 더 넓었다. 최근 대세 영웅들을 전부 다룰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캐리로 포지션을 변경한 이상돈의 캐릭터 선택 폭은 밴 카드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혈귀, 길쌈꾼, 허스카 등은 MVP 피닉스가 쓰지 않는 MVP 핫식스만의 고유한 카드고, 이상돈은 이 모든 영웅들로 게임을 캐리한 경험이 많다. 미드와 1번 캐리의 영웅 폭이 많이 겹치기 때문에 밴픽 심리전에서부터 상대를 압박할 수 있고, 이상돈은 심지어 서포터로 쓰이는 리나를 캐리로 기용하기도 한다.

크게 늘어난 양 팀의 픽풀 덕분에 DAC의 악몽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DAC 자체는 MVP와 한국 도타2에 있어 가장 끔찍한 대회로 남았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쓴 경험을 한 덕분에 한국 도타2는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 MVP 핫식스 - '제락스'라는 날개를 단 캐리와 미드


TI5 동남아 예선 우승을 차지한 MVP 핫식스의 저력은 서포터 '제락스'로부터 나온다. '힌' 이승곤이 레인에서 아군 캐리를 보호하는 동안 '제락스'는 온 맵을 돌아다니면서 시야를 장악하고 상대를 갱킹한다. '제락스'의 뛰어난 맵리딩 덕분에 MVP 핫식스의 주요 영웅들은 안심하고 파밍에 전념할 수 있었다.

'제락스'는 맵리딩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센스와 스킬 적중률 또한 탁월하다. MPGL 시즌7에서 중국의 에너지 페이스메이커를 상대로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지진술사의 궁극기 한 방으로 상황을 뒤집었고, TI5 동남아 예선 결승에서는 리나를 선택해 바텀 레인에서의 2:3 싸움을 승리하기도 했다. 그림자 악마를 플레이할 때는 상대 미드레이너 고통의 여왕와 1:1 싸움을 벌여 쫓아내기도 하는 등 도저히 서포터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발휘하곤 한다.

▲ '제락스'는 서포터지만 서포터가 아닌 것 같았다.

'제락스'가 초중반에 활개치는 동안 이상돈과 'MP' 표노아는 레인에서 제 기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이상돈은 게임이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수입 1위를 놓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난전에 꾸준히 합류하면서도 독보적인 CS를 기록하는 등 캐리로서의 역량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혈귀, 허스카, 길쌈꾼 등 자신만의 영웅들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레슈락이나 리나도 캐리로 활용하면서 상대에게 밴픽 심리전을 강요하기도 한다. 픽풀이 상당하고 모든 영웅을 잘 다루기 때문에 상대 입장에서는 이상돈 하나를 상대하는 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할 정도다.

드물게 이상돈이 힘을 잘 쓰지 못하는 경우에도 표노아라는 보험이 있었다. 표노아는 상대의 집중 견제에 당해 크게 고통받더라도 어느새 시간이 지나고 보면 수입 1, 2위를 다투는 경우가 많다. 피지컬 또한 매우 뛰어난 선수기 때문에 갱킹에 마냥 쉽게 당하지도 않는 편이다. 안정적인 성향으로 대표되지만, 단신으로 게임을 하드캐리하는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TI5 동남아 예선 결승 4세트에서 MVP 핫식스는 중반까지 불리한 경기를 펼쳤지만, 표노아의 레슈락이 한타에서 상대를 몰살시키면서 역전승을 따내기도 했다.

언제나 믿고 맡길 수 있는 캐리, 미드를 보유하고 있는데다 '제락스'라는 특급 서포터까지 보유한 MVP 핫식스. 이들의 힘이 과연 세계 무대에서는 어디까지 통할지 기대된다.



■ MVP 피닉스 - 안정적인 맛의 'kpii'와 의심이 많아진 '큐오'


형제 팀과는 달리 MVP 피닉스는 매우 공격적인 팀이다. 미드레이너 김선엽은 물론이고 구 MVP 피닉스의 선수들 대부분은 게임 내내 공격적인 플레이를 즐겼다. 이길 때는 이런 공격적 움직임 덕분에 상대를 압도하고 빠르게 게임을 끝냈지만, 상대가 잘 대처하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듯한 플레이가 반복되기도 했다.

하지만 팀 리빌딩 과정에서 새로 영입된 캐리 'kpii'가 MVP 피닉스의 고질적인 약점을 크게 보완했다. 게임이 불리하게 흘러가더라도 'kpii'는 꾸준한 파밍을 통해 골드를 벌어들였다. 기존의 MVP 피닉스는 게임이 꼬이면 캐리, 미드 할 것 없이 전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캐리를 바라보고 후반을 기댈 수 있는 팀이 됐다.

또 한 가지 변한 점은 '빠질 타이밍'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MVP 피닉스가 역전패를 당하는 경기 대부분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소규모 한타에서 승리를 거두고 상대 타워를 무리해서 밀려다가 골드 부활을 한 상대에게 발목이 잡혀 전멸을 당하고 한순간에 경기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팀 리빌딩을 거친 후에는 대회에서 그렇게 무리해서 타워를 철거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뺄 타이밍을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전멸하던 모습을 떨쳐내고 '물러날 때'를 몸으로 익힌 것이다.

▲ 의심이 많아진 '큐오'는 확실할 때만 진입하는 선수가 됐다.

MVP 피닉스의 상징과도 같은 미드레이너 김선엽의 플레이 또한 변했다. 엄청난 공격성을 띈 것은 여전하지만, 예전처럼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들어갔다가 죽는 일이 크게 줄었다. 예전에는 '슈퍼 플레이'와 '쓰로잉'의 비중이 비슷했다면, 이제는 슈퍼 플레이의 비중이 훨씬 늘어났다. 초반 갱킹에 당하면 와르르 무너지면서 서포터급 수입을 기록하는 모습도 많이 사라졌다. 아무리 초중반이 힘들어도 김선엽은 어디선가 골드를 수급하고 돌아와 복수극을 펼쳤다.

김선엽의 최대 단점 중 하나는 시야 확보도 되지 않은 지역에 파밍을 하러 혼자 들어갔다가 끊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태원이 만든 게임 내 조각상 문구처럼 이제 김선엽은 '의심이 많아진 큐오'가 됐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면 예전처럼 황당하게 끊기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도 흥을 감당하지 못해 가만히 놔두면 자멸하던 예전의 김선엽이 아니라, 물러설 때를 알고 더 날카롭게 파고들 수 있게 진화한 것이다.

비록 MVP 피닉스는 형제 팀 MVP 핫식스에게 밀려 와일드카드전을 치르게 됐지만, 자신들의 공격성을 잘 제어할 수만 있다면 와일드카드전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지난 4년 간 TI는 항상 남의 집 잔치였다. 어쩌면 영원히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될 뻔했다. 하지만 한국은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이 꿈의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게 됐다.

전 세계 도타2 팀들의 1년 농사가 결실을 맺는 TI는 DAC보다 힘들면 힘들었지 쉬운 무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MVP 형제 팀이 TI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MVP 형제 팀이 자신들이 준비한 것을 남김없이 TI에 쏟아낸다면, DAC에서 저질렀던 실수가 반복되지만 않는다면 선수들에게나 팬들에게나 성적을 떠나 후회없는 멋진 무대로 남을 것이다.

▲ 꿈의 무대에서 MVP 형제 팀의 활약을 기대하며! (출처 : MVP 공식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