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인터내셔널5(The International5, 이하 TI5) 본선 플레이오프 일정도 절반이 넘게 지났다. 플레이오프가 개막했을 때 다른 것 보다도 이제 계속해서 웨스틴 시애틀 호텔까지 왔다갔다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모노레일 왕복 티켓값만 4.5달러인데 하루에 여러 번 웨스틴 호텔을 가다 보니 어느새 지갑이 상당히 성공적인 다이어트(?)를 한 상태였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서 키 아레나까지는 걸어서 불과 1분.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최근들어 날씨가 조금씩 흐릿해지더니 오늘 아침엔 구름이 잔뜩 낀 쌀쌀한 날씨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최근까지의 날씨가 이상하게 좋았던 것이고 오늘같은 우중충한 날씨가 시애틀의 원래 날씨라고 한다.



개막전 당일에 비하면 사람이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키 아레나 내부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인파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었다. 걸음을 옮기다 보면 각종 도타2 영웅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고, 일부는 정말 놀라운 퀄리티를 자랑했다. 온 몸에 빨간색 바디 페인팅을 칠한 트롤 전쟁군주, 전신을 덮는 탈을 쓴 얼굴없는 렉스 등...

오늘 아침에는 키 아레나 한편에서 이런 코스프레 유저들을 모아 사진을 찍는 포토 타임이 있었다. 한 팀이, 혹은 한 명이 사람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바로 옆에서 대기하며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우 놀랍고 끔찍하게도 나는 수정의 여인 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를 분명히 보았는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그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도대체 나는 뭘 본 것이었을까?

제일 눈에 띈 것은 제우스 복장을 한 남자와 그 옆에서 같은 옷을 입은 꼬마 남자아이였다. 제우스부터가 선글라스를 낀 것이 뭔가 느낌이 남달랐는데, 함께 서 있던 아이는 소위 '스웩 넘치는' 행동이 일품이었다. 아이는 카메라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포즈를 취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상당히 느낌 있게 생긴 제우스와

▲ 가면무사 삼남매

▲ 고증에 충실하지 못한(?) 바람순찰자까지!

▲ 그 외에도 수많은 코스프레 유저들이 대기 중이었다.

키 아레나 1층을 둘러보다 '저거넛 플라자'란 곳을 발견했다. 도타2 스킨 제작에 대한 워크샵 강연이 열리고 있었다. 단상에 선 남자가 끊임없이 각종 스킨들을 보여주며 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하는 중이었다. 남자가 보여주는 그림에는 도타 올스타즈 시절부터 로딩 화면 일러스트를 그려온 'Kunkka'의 작품임을 알려주는 사인이 들어가 있었다.

워크샵 강연이 한창 진행 중인 저거넛 플라자 한편에는 여러 팬아트를 모아둔 갤러리도 있었다. 물론 갤러리라고 칭하기엔 규모가 그 정도로 큰 건 아니고 그냥 벽면에 팬아트를 전시해 둔 정도였지만, 이 정도만 해도 그림을 그린 팬이 얼마나 기뻐할지는 짐작이 갔다.



저거넛 플라자에서 계속 이동하며 키 아레나를 돌자, 이번에는 플레이오프 중계를 진행하는 메인 중계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KDL 당시 한국을 찾은 적도 있는 반가운 얼굴 '멀리니'를 포함해 5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밴픽 설명을 하거나, 이따금씩 서버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 시간을 때우는 힘든 일을 맡기도 했다.

원래 저 중계진 자리에는 유명한 여성 해설자인 '쉬버'가 앉을 때도 많은데, 하필이면 내가 도착했을 때 '쉬버'는 없었다.


선수들과 VIP들을 위한 스위트룸이 있는 2층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굉장히 특이한 코스프레가 눈길을 끌었다. 복장이 특이한 건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 특이했다. 많이 봐야 9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꼬마 여자아이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수정의 여인 망토와 자기 키보다 훨씬 큰 지팡이를 들고 혼자 키 아레나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자아이 주변의 사람들도 연신 귀엽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다. 나 역시 아이에게 사진을 찍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을 찍고 나서 돌아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아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이가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 유난히 인기가 많았던 수정의 꼬마

2층에는 각 팀별 스위트룸과 2개의 VIP 바, 그리고 완미세계 등 각종 게임 퍼블리싱 업체용 스위트 룸, 그리고 와일드카드 탈락 팀인 팀 아콘과 베가 스쿼드론의 방까지 있었다. 키 아레나를 기준으로 동서남북 방향에 각각 4개 팀이 모여 있고, 그 사이를 2개의 VIP 바가 양분하는 구조였다. 나는 입구에서 조금 더 가까운 MVP 피닉스의 스위트룸에서 쭉 기사를 써 왔다.

스위트룸 내부에는 언제나 밸브에서 차려준 과일과 음식들이 가득했다. 사과, 딸기, 산딸기에 파인애플까지... 과일들, 특히 파인애플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내게 이 과일상은 참을 수 없는 악마의 유혹이었다. 첫 날, MVP 피닉스의 스위트룸에서 이 과일상을 본 나는 홀린 듯 포크를 들고 파인애플을 집어먹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한 줄 가득 담겨있던 파인애플은 서너 개 밖에 남지 않았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는 잠시 고민 끝에 마치 처음부터 파인애플은 없었다는 듯이 남은 서너 개의 조각도 전부 먹어치웠다.


매 끼니마다 밸브에서 다양한 식사와 음료를 제공해 주는 덕분에 끼니를 해결하러 스위트룸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졌다. 선수와 관계자들의 복지를 위해 이토록 힘쓰는 밸브의 노력에 답해 나는 매 끼니마다 최선을 다해 음식들을 뱃속으로 우겨넣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사진을 찍을 때 말고는 스위트룸 밖을 나갈 이유가 없기에 계속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있게 된다는 것 정도일까?

3일 차에는 경기를 보고 있는데 비밀 상점을 다녀온 MVP 피닉스의 선수들이 큰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봤더니 '페비' 김용민이 구매한 피규어에서 황금 카드가 나온 것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황금 혈귀 피규어였다. 모든 걸 다 가진듯한 김용민의 미소가 참 인상적이었다.


MVP 피닉스 스위트룸을 항상 찾는 손님도 있었는데, 바로 VG의 'iceiceice'였다. 그룹 스테이지 때만 해도 그 'iceiceice'를 내 눈앞에서 봤다는 것 때문에 감격에 겨워했는데, 플레이오프가 시작되자 'iceiceice'는 하루에도 몇 번씩 MVP 피닉스 스위트룸에 놀러와 선수들과 수다를 떨었다. 스위트룸에서 'iceiceice'를 열 번도 넘게 마주치자 이젠 하도 익숙해져서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할 정도가 됐다. 심지어 'iceiceice'는 MVP 피닉스와의 대결이 확정된 후에도 이곳에 놀러왔다.


각 팀마다 경기가 끝나면 자기들의 스위트룸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선수들 얼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팀은 역시 홈 팀인 북미의 EG였다. EG의 스위트룸은 팀 시크릿과 함께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바로 앞에 있어서 접근성도 대단히 좋았다. EG가 경기를 하고 스위트룸으로 복귀를 할 때마다 키 아레나 복도 1, 2층은 'USA!'란 구호가 울려퍼졌다.

수많은 팬들이 선수들을 찾아와 자기 티셔츠에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즐거운 광경이었다. EG가 기술단을 꺼내 이홈을 잡고 다음 라운드 진출을 확정지었을 때, 스위트룸으로 복귀한 '아우이2000'은 팬들에 둘러싸여 10분 가까이 사진 촬영과 사인을 해 주기 바빴다.


반면 절망에 빠진 선수들의 모습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이긴 팀이건 진 팀이건 경기가 끝나고 스위트룸으로 돌아오고 나면 보통 문을 닫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VP에게 패해 TI5에서 탈락한 컴플렉시티는 스위트룸으로 돌아와 문도 닫지 않고 멍하니 앉아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컴플렉시티의 방에서는 작은 말소리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복도에 서 있는 팬들은 항상 패배하고 돌아온 팀에게도 'Good job'이라던가 'Well played'라며 격려의 말을 건넸는데, 절망에 빠진 컴플렉시티의 얼굴을 보고는 그런 팬들조차 뭐라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다 잡은 2세트를 역전당하고 결국 '승패패' 스코어를 기록했으니 그들의 기분이 얼마나 끔찍할지는 비단 선수가 아니더라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TI5 플레이오프] 사그라든 컴플렉시티의 돌풍... VP, 2:1로 승리하며 3라운드 진출


팀 시크릿이 iG를 꺾은 후에는 복도가 '시크릿!'이라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스위트룸으로 들어간 '아티지'는 금방 나오더니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는 몇몇 팬들과 함께 '아티지'의 뒤를 따라갔다. '아티지'가 들어간 곳은 VIP 바였다. 바의 빈 탁자에 앉은 '아티지'는 과자를 한 줌 집어 접시에 담고 조금씩 먹으면서 키 아레나 현장을 내려다봤다. 바 앞자리에 앉은 한 팬은 '아티지'가 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두런두런 말소리 때문에 뒤를 돌아보고는 'Holy shit!'이라며 소리를 지르고 '아티지'에게 사진 촬영을 요청하기도 했다.

팬들의 사인과 사진 촬영 요청이 끝난 후 나는 '아티지'에게 말을 걸었다. 예전에 이메일로 인터뷰를 요청했던 한국 매체 기자라고 하자 놀랍게도 '아티지'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DAC 직전 1월에 했던 인터뷰가 아니냐는 '아티지'의 반문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아티지' 정도 되면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한 두 번 온 것도 아닐텐데 약 7개월 전 인터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다시 한 번 인터뷰 요청을 해 봤으나 곧 가족들이 오기 때문에 지금은 할 수가 없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대신 다음 날 경기에서 이기면 그 때 인터뷰를 하자는 말을 남기고 '아티지'는 떠났지만... 거짓말처럼 팀 시크릿이 탈락해버렸다.

[팬보이 특집①] 차세대 도타2를 이끌 에이스! 팀 시크릿의 '아티지'

[TI5 플레이오프] 러시아의 기적! VP, 우승 후보 팀 시크릿 잡고 패자전 4라운드로


경기가 거듭되면서 TI5 무대에 돌풍을 일으켰던 MVP 피닉스도, 컴플렉시티도, 우승 후보 중 하나인 팀 시크릿도 탈락했다.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TI5, 한화로 70억 원이 넘는 역대급 상금과 단 하나의 최정상 팀만이 가질 수 있는 불멸의 아이기스를 차지할 팀은 누가 될 것인지, 이제 단 이틀 후면 모든 베일이 벗겨진다.

시애틀에서 맞이하는 밤도 이제 두 번 밖에 더 남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는 오지 못할 수도 있는 시애틀 키 아레나. 최고의 명경기를 기억에 담고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플레이오프 4일 차 밤이 저문다.



신동근의 잠 못 이루는 시애틀

1편 - 도타2의 성지 시애틀, 감격의 땅에 그 첫 발을 내딛다
2편 - 으아아, 이 비밀 상점이 내 지갑을 빨아먹는다!
3편 - 생동감이 넘치는 시애틀의 명소,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