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긴 휴식을 가진 롤챔스의 스프링 시즌을 맞이해 자랑스러운 한국 프로게이머들의 슈퍼 플레이를 재조명하는 새 코너를 기획했다. 이름 하여 '돌슈리(돌발 슈퍼 플레이 리뷰)'.

진에어 그린윙스가 SKT T1을 잡았다. 한 세트를 따낸 것이 아니라 2:0으로 1승을 챙겼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다. 현장을 찾은 진에어 그린윙스의 팬들조차도 '승리'보단 '나아진 경기력'을 기대하고 왔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체이서' 이상현, '갱맘' 이창석의 공백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KeSPA 컵과 IEM 새너제이 롱주 게이밍과의 경기에서도 새로운 진에어 그린윙스는 불안한 비행을 선보였다.

두 선수의 부재로 진에어 그린윙스에 대한 평가는 곤두박질 쳤다. 항상 중위권을 하는 팀에서 하위권으로. 이 평가는 롱주 게이밍과의 경기에서 사실이 됐다. 그런 진에어 그린윙스는 어떻게 SKT T1을 꺾었을까. 1세트에서 '블링크' 강선구와 '스카웃' 이예찬이 나와서? SKT T1이 방심해서? 아니다. 이길만하니까 이긴 것이다.

두 선수의 각성이 진에어 그린윙스를 완벽히 다른 팀으로 만들었다. 야수성을 되찾은 탑 라인계의 이단아 '트레이스' 여창동과 '체이서' 이상현의 대타가 아닌, '윙드' 박태진이 되고 싶었던 그의 간절함이 SKT T1을 무너뜨렸다.



[Original] 독창성 - 자신의 '색'을 되찾은 여창동


'트레이스' 여창동의 플레이는 여타 슈퍼 플레이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모든 것이 평범했다. 피지컬, 판단력, 순간 반응 속도. 하나의 특이함만이 그의 플레이를 슈퍼 플레이로 만들었다. '자신'을 믿는 선택. 여창동은 대세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밀고 나갔다. 보통 프로게이머들은 모험을 두려워한다. 독창적인 픽을 선보였을 때 자신의 실수로 팀이 패배하는 상황은 견디기 힘들다.

검증된 픽은 말끔하게 닦인 도로다. 성능도 좋고, 승률도 낮지 않기에 주류가 된 챔피언들이다. 운영, 라인전, 한타 모두 공식이 있다. 프로게이머들에게 주류 챔피언의 또 다른 장점은 죄책감, 미안함, 자괴감의 정도가 얕다. 반면 특이한 챔피언을 했을 때 패배의 책임은 대부분 자신의 몫이다. 팀원이 자신의 플레이를 받쳐 주지 못했을 때도. 실수 한 번으로 나락에 떨어져도. 그러나 여창동은 팀의 승리를 위해 그 중압감을 이겨냈다. 탑 그레이브즈라는 픽을 꺼낸 용기와 유연한 사고 그 자체가 슈퍼 플레이였다.



여창동은 라인전이 강력한 챔피언을 잘했다. 정확히 말하면 '라인전이 강력한 독창적인 챔피언'을 잘했다. 대표적으로 렝가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손에서 주류가 된 챔피언도 많다. 정글로만 사용되던 거미여왕 엘리스는 여창동의 손에서 탑 라이너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레넥톤, 쉬바나가 탑을 지배하던 때에 아트록스로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탱커 챔피언도 잘했으나, 그가 진짜 빛날 때는 자신의 공격성을 드러내 상대를 짓누를 때였다.

시간이 흐르고 그의 공격성은 '팀 게임'이라는 틀에 맞춰졌다. 규격에 몸을 맞추기 위해 여창동은 많은 것을 깎아냈다. 공격성, 과감함, 특이함까지. 이 모든 것을 포기하니 어디로 튈지 몰라 상대에게 부담을 주던 여창동은 모르가나라는 명맥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 자리는 또 다른 여창동이 채웠다. 언제나 안정적인 1인분을 해주는 탑 라이너. 그 이상은 힘든 탑 라이너.




그런 그가 날카로운 발톱을 다시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활한 '야수' 여창동의 첫 희생양은 SKT T1이었다. '듀크' 이호성의 퀸이 탑 라인을 밀었다. 미니맵으로 아군의 경고 세례가 쉴새 없이 날아들었다. 지난 시즌의 여창동이었다면 안전하게 우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탱커'라는 억제기를 풀어버린 여창동은 달랐다. 최악의 상황 탐 켄치와 이블린이 있더라도 여창동은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손 쓸 새도 없이 제거할 자신. '공격성'을 되찾은 여창동은 한 경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종잡을 수 없던 탑 라이너계의 이단아 여창동이 SKT T1을 잡아내며 자신이 귀환했음을 선포했다.


▲ 노련함으로 상대의 갱킹을 예측한 여창동


사실 그레이브즈는 굉장히 불안정한 픽이다. 정글러에게 장점이 되는 기본 공격은 라이너에겐 패널티다. 조금만 실수해도 의도치 않게 라인을 밀게 된다. 그러나 여창동은 독창성을 잃어버린 2년간 얻은 성과로 그레이브즈를 완전하게 만들었다. '갱킹'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노련함'으로 덮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까지 생각했던 여창동의 제2의 전성기는 지금부터다.



[Focus] 초점 - '체이서'의 그늘에 가려졌던 박태진의 발돋움



'윙드' 박태진은 2013년 나진 e엠파이어로 데뷔해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 정글러다. 브라질의 키드 스타즈에서 짧게 선수 생활을 마친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3년이라는 경력에 비해 그의 인지도는 초라했다. 진에어 그린윙스에 합류한 '윙드' 박태진을 신예로 아는 팬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가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록스 타이거즈와의 경기였다. 리 신으로 바론과 드래곤을 스틸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박태진의 활약에도 그의 평가는 여전히 높지 않았다. 그와 함께 생활했던 '체이서' 이상현의 그늘은 너무나도 넓고 짙었다. 한국 최강의 공격형 정글러인 이상현의 벽은 높았다. 위기와 기회는 동시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박태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KeSPA 컵을 기점으로 이상현, '트레이스' 여창동, '캡틴잭' 강형우, '갱맘' 이창석이 팀을 나가기로 했다.

진에어 그린윙스는 새로운 맴버로 KeSPA 컵을 준비했다. 엉성한 점이 많았고, 당연히 결과도 좋지 않았다. 새롭게 출발한 진에어 그린윙스의 메인 정글러 박태진은 첫 번째 기회를 놓쳤다. 두 번째 기회는 IEM 새너제이였다. 진에어 그린윙스의 첫 해외 데뷔전이기도 했던 IEM 새너제이. 결과는 최악이었다. 박태진은 나쁘지 않은 경기력을 보였지만 탑과 미드가 불안했다. 여전히 박태진은 이상현의 대타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진에어 그린윙스의 팬들은 기존 선수들을 애타게 찾았다.


▲ 박태진의 완벽한 와드 설계


롤챔스 개막과 함께 박태진에게 세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최강 팀 SKT T1. '윙드' 박태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상대의 정글 루트를 읽는 와드 설치. 이어지는 킬. 박태진은 쉬지 않고 유효타를 올렸다. 그럼에도 SKT T1은 쉽게 쓰러지지 않고 매서운 반격을 날렸다. 그의 갱킹에는 오랜 무명 생활을 탈출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 배성웅의 강타 타이밍을 무산시킨 트레이스와 이어진 윙드의 스틸


팀원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근처에는 '윙드' 박태진이 있었다. 그의 존재로 위기는 매번 기회로 바뀌었다. SKT T1은 정말 잘했지만, 박태진의 간절함이 더 컸다. 이 날 박태진이 보여준 플레이 모두가 슈퍼 플레이였다. 진에어 그린윙스의 팬들은 더는 이상현을 찾지 않았다. 박태진이 이상현의 그림자에 맞춰 있던 '초점'을 자신에게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3년 차의 무명 게이머 박태진이 '체이서' 이상현도 못했던 SKT T1을 무너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