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을 처음 체험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고 동시에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가짜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다. HMD를 내 머리에 뒤집어쓰기 전에, 난 몇 사람이 먼저 VR을 체험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앞이 안 보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들은 소경처럼 주변을 짚었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팔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난 속고 말았다. 눈앞에 가득 다가오는 그 가짜 화면에 움츠러들었다. 이성은 아니라 말하지만, 내 본능이 나도 모르게 움직인다. 그래, 알면서도 속는다는 게 이런 거다. 이후 VR의 원리와 작동 방식에 대해 무수히 들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VR은 뇌를 속이는 과정이다. 시야의 85% 이상을 장악해 공간감을 속이고, 오감 중 두 번째로 공간 지각에 많은 기여를 하는 청각마저 속인다. 이쯤 되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머리로는 알아도 본능이 거부한다.

GDC2016 2일차에 강연장에서 만난 '래디얼 게임즈'의 '킴벌리 볼'은 컴퓨터 공학 박사이자 뇌과학의 전문가였다. 사람이 너무 몰려 더 넓은 강연장을 빌렸음에도 모두 앉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들어온 그녀의 강연은 VR과 뇌의 인식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자신이 창조해낸 게임 경험 속으로 게이머들을 밀어 넣고자 했던 수많은 개발자들, 그리고 VR의 등장과 함께 변화한 '몰입'의 개념. 킴벌리 볼의 이 강연은 개발자들과 게이머들 사이에 벌어지는 '기만'의 과학이자, 그 과정에 대한 고찰이었다.

▲ '래디얼 게임즈'의 컴퓨터 공학 박사 '킴벌리 볼'



■ 우리의 '뇌'는 믿을 수가 없다.


킴벌리 박사는 우리의 '뇌'가 결코 믿을 수 없는 기관이라 말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실제로도 '뇌'의 착각이 물리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이미 밝혀진 바다. 온도를 거꾸로 느끼는 사람이라든지, 같은 크기임에도 배치에 따라 달라 보이는 착시 효과, 펜로즈의 계단 등도 모두 뇌를 혼란시킨다.

인간의 뇌는 생각 이상으로 착각에 약하다. 생리적으로 볼 때 '뇌'는 감각을 수용하고, 판단을 내리는 중추이다. 단순한 인과론에 입각해보면, 감각 -> 판단의 구조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진 감각을 뇌에게 안겨준다면, 뇌는 현실을 착각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인간의 이성적인 사고와는 관계없이, 필터링 없이 수용되는 감각으로 인한 결과다.

그렇다면, 사람이 특정 공간, 예를 들면 서울역에 있다고 할 때, 그 사실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보가 필요한 것일까?

일단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시각'이 있다. 눈앞에 어떤 광경이 펼쳐지냐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장소에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인지한다. 예시가 된 장소가 서울역이니 일단 대합실이 보여야 할 것이고, 열차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눈에 보여야 한다. 혹은 택시를 타는 정거장이라든지 말이다. 시각 말고도 여러 가지 감각들이 내가 그곳에 있다는 느낌, 즉 '현실감'에 기여한다. 대합실 출구 역 흡연구역에서 풍겨오는 담배 향기, 기차가 들어온다 알리는 알림음, 여러 냄새가 섞인 군중 사이의 후끈한 공기까지 말이다.

킴벌리 볼은 이 감각의 총체를 '수프'와 같다고 설명했다. 한국식으로 치면 '찌개' 정도가 될 거다. 찌개는 여러 재료를 넣어 한 번에 끓임으로써 완성된다. 만약 어떤 재료가 잘못되거나 들어가지 않았다 해도 '찌개'인 것은 맞지만, 모든 것이 완벽할 때의 그 맛이 나지는 않는다.

VR 역시 마찬가지다. 킴벌리 볼은 VR의 진정한 가치가 유저에게 '현실감'을 부여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기존의 게임은 어떻게 해도 '게임'으로서 재미있을 뿐, 유저에게 현실감을 주지는 못한다. 모니터 안의 세상이 진짜 내 세상이라고 속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VR은 감각을 흔들어 플레이어에게 '현실감'을 제공함으로써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다. VR을 개발하는 개발자들의 역할은 바로 이 '또 다른 세계'로의 초대장을 게이머에게 던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정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위해선 총체적 감각이 필요하다



■ 가상의 현실감 유지와 '충실한 계약(Fidelity Contract)'

"그러나 완벽할 필요는 없어요." 킴벌리 볼의 말이다.

그녀는 앞서 '현실감'을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간 '수프'와 같은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은 곧, 몇몇 재료가 바뀐다 해도 여전히 수프는 수프라는 뜻이다. 비록 전과 같은 맛은 나지 않을지언정. 때문에 개발자들은 현실감을 불러내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저 몇 가지 재료만 조금 바꾼 수프를 게이머에게 전달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바뀌게 될 재료가 바로 '시각'과 '청각'이다.

사람의 뇌는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될 '근거'를 필요로 한다. 뇌는 이유 없이 착각을 하지 않는다. 뇌가 무언가를 느끼는 이유는 그렇게 느낄 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감각별 의존도는 차이가 난다. 만약 뇌가 '맛있다'와 '맛없다'를 판단하는 과정에 있다면, 뇌는 미각과 후각에 많은 의존을 할 것이다. '아름답다'와 '추하다'를 판단하는 과정에서는 시각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 시각과 청각, 두 가지 재료만 바꿔도 현실감을 주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다.'라는 현재감을 느끼게 하는 가장 큰 근거가 되는 감각기는 '시각'과 '청각'이다. 때문에 'VR'이라는 장비의 힘을 빌리면, 어렵지 않게 '현실감'을 구체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별도의 트릭 없이 강제적인 감각의 파도를 통해 뇌를 속일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VR이 있다고 해서 완벽한 현실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힘들다. 공간에 대한 현실감은 시각과 청각에 크게 의존하지만, 주변의 공기나 온도, 냄새 등 그 이상의 감각들도 작용하니 말이다. 하지만 불완전하다 해도, 수프를 끓이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개발자들이 조심해야 할 몇몇 가지가 있다. 킴벌리 볼이 '충실한 계약(Fidelity Contract)'라고 표현한 이 개념은 바로 가상의 현실이 얼마나 충실한 현장감을 전달할 수 있냐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이 가상의 '사무실'을 체험하는 VR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눈앞에는 여러 사무 도구들과 사무 공간이 펼쳐져 있다. 끓고 있는 커피포트는 스위치를 누르자 커피가 쏟아져 나온다. 방의 불을 켜는 전기 스위치를 건들자 방의 불이 모조리 켜진다. 참 재미있다. 하지만 옆에 놓인 컴퓨터는 아무리 건드려도 작동하지 않는다. 뭐가 문제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눌러 봐도 반응을 보이긴 커녕 스위치가 눌려 들어가는 모션조차 나오지 않는다.

뭐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개발자가 만들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게이머가 VR 환경 안에서 무언가 상호 작용을 시도할 때, 개발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몰입이 저해되는 것을 킴벌리 볼은 '충실한 계약'이 깨지는 것이라 표현했다. 이는 게임으로서 딱히 이렇다 할 아이덴티티를 보여주지 않는, VR 초기에 쏟아질 각종 '시뮬레이터'류의 프로그램에서 일어나기 쉬운 일이다.

▲ '충실한 계약'이 깨질 때, 현실감은 현저히 떨어진다

킴벌리 볼은 이러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항상 게이머들의 행동 양식을 주의 깊게 보고, 이를 분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어떻게 포장한다 해도 VR은 '가상'이고, 가상의 현실감은 굉장히 얻기 어려울뿐더러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런 와중에 이런 현상은 너무나 쉽게 몰입을 해칠 수 있는 불안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법도 있다. 게임이 스스로 강력한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있다면, 즉 'FPS' 게임이거나 '오디오 쉴드'와 같은 리듬 게임이라면 굳이 이곳저곳을 다 들쑤시고 다니는 게이머의 수는 현저히 줄어든다.



■ 멀미, 그밖에 VR이 가진 위험성에 대하여...

▲ 멀미는 VR 개발자의 최대 난제와도 같다

이어 킴벌리 볼은 VR 개발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멀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게임의 역사는 어떻게든 자신이 만든 세계로 게이머들을 집어넣으려는 개발자들과, 이를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게이머들 사이에서 만들어져 왔어요.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죠. 하지만 개발자들은 절대 게이머들을 힘들게 하거나, 그들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돼요."

하지만 '멀미'는 게이머들이 육체적으로 손상을 입는 대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킴벌리 볼은 멀미의 원인을 굉장히 단순한 방법으로 설명했다. 그녀는 눈앞에 손가락을 하나 펼쳐, 좌우로 흔들게 한 다음, 그다음엔 손가락을 고정시킨 채로 머리를 흔들게 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 때 두통이 오려 한다고 말했다.

"뇌가 인지하는 것과 감각이 다를 때 멀미가 시작되는 거예요." 킴벌리 볼은 멀미의 원인을 간단하게 규정했다. FPS 게임에서 멀미가 일어나는 대다수의 경우는 화면이 굉장히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다. 마치 핸드 헬드(Hand held)기법으로 촬영한 영화를 볼 때처럼 과도한 화면 흔들림은 게임에 몰입한 이들에게 괴리감을 안겨준다. 내 몸은 아무렇지 않은데, 내 뇌는 무지막지하게 흔들리는 거라고 인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동차 멀미도 마찬가지다. 보통 자동차 멀미를 하는 경우는 스마트폰을 쳐다보거나, 책을 보는 등 작은 객체에 시선을 집중할 때 일어나는데, 이 땐 반대로 시선의 정적 움직임과 자동차의 흔들림에 따른 반고리관의 움직임이 일치하지 않는다.

'손가락 실험'또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손가락을 미리 흔들고, 흔들리는 상태에서의 손가락 모습을 인지했지만, 머리를 흔들어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손가락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흔들리는 머리와는 상관없이 비교적 정적인 시선을 유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개발자들은 VR 환경 하에서 항상 게이머들이 느낄 감각과 시각의 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 가지, 개발자들이 절대적으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어요.

끝으로 킴벌리 볼은 VR이 품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VR의 가장 큰 장점이자 차이점은 굉장히 높은 수준의 '현실감'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킴벌리 볼은 이 장점의 이면을 파악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공포 게임'을 생각해 보자. 모니터 환경 하에서 공포 게임은 크게 위험하지 않다. 게이머들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몰입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시선을 돌리거나, 화면을 끄거나, 혹은 게임을 셧다운 해버리는 식으로 공포를 회피할 수 있다.

하지만 VR 환경에서는 이 모든 것이 여의치 않다. 시선을 돌려도 게이머는 그 무대 안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이고, 화면을 끄려면 HMD를 벗어야 하는데 이 또한 그 상황에서 빠르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애초에 몰입의 심도 자체가 다르다. 킴벌리 볼은 이 상황에서 생길 수 있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지적했다. 과거 IGC 행사에서 남코의 프로듀서 '하라다 가츠히로'는 VR의 붐을 이야기하면서 "게임으로서의 재미가 아닌, 그저 신기하기 때문에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개발자들이 많은데, 게임으로서의 재미를 놓치는건 본질을 잃는 일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무분별한 개발이 게이머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 "게이머들은 개발자를 믿습니다."


킴벌리 볼은 게이머들과 개발자들의 관계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며 마무리 단계로 나아갔다. 게이머들은 VR을 체험하면서, 개발자들을 전적으로 믿게 된다. '그저 신기할 뿐, 내가 다칠 일은 없을 거야'라는 무언의 믿음이다. 하지만 그녀는 과몰입 상태에서 너무 심한 심적 자극으로 상처를 받는 이들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며, 이 상황에서 "이것은 가짜이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게임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애초에 기획 단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킴벌리 볼의 강연은 설명으로 시작해 응용으로 나아갔고, 개발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며 마무리되었다. VR이 세계를 뜨겁게 달구는 지금,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VR 개발에 뛰어들기 위해 나서고 있다. 강연에서, 그녀는 VR의 기본적인 생리 작용을 설명했고, 이를 통해 VR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개발자들에게 던졌다. 사실 모든 것을 태울 불길처럼 뜨겁게 번지는 VR 열풍 속에서 이런 예상치 못한 위험의 존재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강연은 처음 들었다.

그녀의 강연은 강연장을 터질 듯 채운 개발자들에게 기존의 열풍과는 다른 화두를 던졌고, 개발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단순히 '뇌'의 작용을 설명하는 자리인 줄 알고 왔던 개발자들에게 그녀의 강연은 어떤 느낌을 주었을까. 강연장을 뒤로한 채 나서는 발길이 전보다 가벼웠다. 아마 막연히 '너무 과한 열풍'이 아닐까 하고 경계심마저 들었던 'VR'에 대한 연구가 다각적인 부분에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