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사: 닷지 롤 ⊙장르: 탄막 슈팅 로그라이크 ⊙플랫폼: PC, PS4 ⊙발매일: 2016년 4월 5일

원래 로그라이크라는 장르가 그렇다. 더럽게 어렵다. 좀 캐주얼하게 나온 게임도 있었는데 그래 봤자 어렵다. 너도 한 발 나도 한 발, 어이쿠 내가 먼저 죽어버렸네? 하는, 그런 직관적인 게임들과는 시작점부터 다르다.

게다가 한 번 죽으면 끝이다.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막 각성한 일리단처럼 우리들의 멘탈을 쪼깨는 장르가 로그라이크다. 장르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마천루같은 진입 장벽이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바인딩 오브 아이작'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 이거 '엔터 더 건전' 리뷰 아니냐고?

맞다. 그래도 '바인딩 오브 아이작' 먼저 언급할 거다. 이 게임의 성공이 없었다면, 로그라이크 장르가 이렇게 대중화되는 데 몇 년은 더 걸렸을 테니까.

'바인딩 오브 아이작'은 2D 카툰 그래픽을 채용한 로그라이크 게임이다. 캐주얼한 실시간 전투 시스템에 초창기 젤다의 전설의 맵 디자인을 적절하게 버무려 만든 것이 특징이다. 독특하면서도 깊이 있는 주제, 완성도 높은 레벨 디자인이 어우러졌다. 덕분에 인디 게임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 로그라이크의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바인딩 오브 아이작'


하나가 터져주니 이후 테크트리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였다. 진입 장벽을 낮춘 후발주자들이 속속 등장했고, 그중에는 상당한 퀄리티를 보여준 작품도 있었다. 묵직한 캐릭터에 세상 다 산 것 같은 심리 상태까지 끼얹은 '다키스트 던전', 자신도 모르게 어깨춤을 추게 하는 '크립트 오브 더 네크로댄서'는 정말 끝내준다. 꼭 해보자.

대중과 평단 모두가 따봉을 날린 로그라이크는 각자 자신만의 무기가 있었다. 박력있는 그래픽으로 일단 눈도장부터 박거나, '뭐 이런 장르를 끌고 왔지' 싶은 걸 귀신같이 버무려낸 게임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외도는 잘 통했다. 컬트적 장르로 여겨졌던 로그라이크는 이제 스팀 게임 순위에서도 심심찮게 보이는 수준이 됐다. 그야말로 격세지감.

그리고 4월 5일 출시된 '엔터 더 건전'은 로그라이크의 발칙한 변화가 얼마나 흥미로운 결과물을 낳는지 다시 한 번 보여줬다. 'GTA5' 못지않게 스웩 넘치는 한국어화까지 됐으니 버틸 수가 없다!

▲ '엔터 더 건전' 공식 트레일러





■ "총! 좋은 대화 수단이지! 그래서 200개 쯤 넣었어."

"뭐 건전?" 이게 웬 말장난이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게임을 켜는 순간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총에 대한 진지한 고찰에 '엔터 더 건전'은 우리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약실이 어떻고 구경이 어떻고 하는... 그런 고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엔터 더 건전'은 말 그대로 총에, 총에 의한, 총을 위한 결과물 그 자체다.

게임 내 모든 것은 총으로 귀결된다. 자잘한 던전 오브젝트부터 시작해 몬스터 디자인, 심지어 캐릭터의 체력 바까지도 총알 두 개를 겹쳐 만들었다. 몬스터 생김새만 봐도 얘가 뭘 어떻게 쏠지 알 수 있다. 리볼버 총알 몬스터면 권총 한 방을, 샷건 총알 몬스터면 넓게 퍼지는 샷건을 쏜다. 생긴 대로 싸우는 적들은 '엔터 더 건전'의 직관적인 조작 방식과 맞물리며 시너지를 냈다. 왼손을 키보드에 올릴 줄 알고,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쥘 줄 안다면 이 게임에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사실상 이 게임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총기는 '다채롭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 '많아봐야 20여 종 아냐?'라고 물으신다면 천만의 말씀! 그 열 배인 200여 종에 이르는 총기가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각 총의 성능도 천차만별이다.

▲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AK47'가 타탕 탕 타탕, 'M4A1'이 타타탕 타타탕이지만, '엔터 더 건전'의 총들은 탕탕, 찌융, 쮸왁, 부부붑, 퓍, 꽈광, 위이잉, 쉭쉭, 득득득득, 텅터텅, 딱딱따딱, 츙츙, 쓰큉쓰큉, 퐁퐁퐁퐁, 다다다, 꾸르룩, 촵촵, 까드득까득, 퓨우웅, 철컥철컥, 태태태택같은 발사음을 낸다. 이게 웬 말장난이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진짜로 저런 소리다.

저런 소리가 나는 이유는 총 하나하나가 기상천외한 모습이기 때문. '엔터 더 건전'의 총들은 말 그대로 필터링없이 다 쏜다. 일반적인 총알, 로켓포, 레이저, 석궁 등 다른 게임에도 잘 나오는 녀석들은 그나마 아주 얌전한 총에 속한다. 축축이 젖은 빨래, 짤랑거리는 열쇠 뭉치에 알파벳 단어까지 가리지 않고 다 쏘는 장면에서는 실소를 넘어선 감탄이 나온다. 요술램프 지니가 튀어나와 적을 주먹으로 때리는 마술 램프 총, 석유를 들이붓는 화석 총, 펄떡거리는 생선을 연사로 쏘는 배럴 총까지 있다. 이쯤 되면 진지하게 개발자의 뇌 상태가 의심된다.

총 숫자가 차고 넘치면, 톱니바퀴같이 맞아떨어지는 밸런스를 기대하기 어렵다. 30~40여 종의 총기가 구현된 온라인 FPS 게임조차 못 맞추는 것이 밸런스인데, 소규모 개발사에서 개발한 '엔터 더 건전'이 밸런스까지 생각했다면 아마 출시일이 3년쯤 밀렸을 거다.

다만, 이를 참작하더라도 '엔터 더 건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총기가 게임 진행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상당히 아쉽다. 뒤가 없는 장르인 '로그라이크'에서 플레이어의 생고생은 말 그대로 필연적이다. 따라서 게임을 진행함에 따라 조금씩 캐릭터가 강해지는 느낌을 줘야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얻는다. 하지만, 불행히도 '엔터 더 건전' 내 총기들은 대체로 효율성이 빵점이다.

시작할 때 주어지는 기본 총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닌데, 이후 획득하는 총기들 대부분이 기본총보다 세다고 보기 어렵다. 그냥 시각적인 즐거움만 주는 선에서 그친다. 물론, 먹는 순간 리무진 뒷좌석처럼 편안해지는 일부 총도 있기는 하나 말 그대로 극소수. 총 대부분은 플레이어가 겪어야 할 총알 지옥을 견뎌낼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물론, 5층까지만 클리어하면 1회차 엔딩을 볼 수 있기에 총기 성능의 하향 평준화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개발진의 의도 역시 각 총기의 성능보다는 콜렉션 요소에 더 집중한 모양새다. 하지만, 모태 슈팅 고수가 아닌 이상, 지나치게 확률에만 의존한 레벨 디자인은 평범한 플레이어를 지치게 한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 "이런! 총이 너무 구려서 못 잡겠어!"


■ "게임 좀 한다고? 일단 이것부터 피하고 말하지 그래."

스팀 라이브러리에 게임을 100개 이상 쌓아둔 게이머라면 더는 도트 게임에 향수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기엔 시장에 도트 게임이 이미 너무 많이 나왔다. 요즘 활용되는 또 다른 표현 기법이라 부르는 게 맞겠다.

장인 정신이 뚝뚝 떨어지는 고퀄리티 도트 게임도 속속 등장했다. 예전에 기획기사로 선보였던 'EITR'이 그렇고, 도트 퀄리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Sword and Sworcery'도 마찬가지. 그리고 '엔터 더 건전' 역시 도트 게임이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나름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Sword and Sworcery'처럼 예술적인 그래픽을 구현했다는 말이 아니다. '엔터 더 건전'의 그래픽은 철저히 실용적이다. 게임플레이와 직접 연관이 없는 곳에서 쓸데없는 비용 낭비를 줄였고, '총을 쏜다'는 부분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트에서 오는 복고풍 느낌을 강화하기보다는 2D 특유의 속도감과 타격감을 살리는 데 신경 쓴 모습이다.

▲ 아, 이 더러운 하트 좀 치워!


적이 쏘는 총알은 대부분 비비탄과 같은 원형인데, 대부분 플레이어 방향으로 정직하게 날아온다. 그런데 총알 숫자가 너무 많다. 그냥 눈으로 보고 피하기에는 부담스런 양이다. 멍하니 서 있다가는 1분도 버티기 어렵다.

보스전은 '엔터 더 건전'의 백미다. 일반 적들도 그리 쉬운 상대는 아니지만, 보스는 정말 심호흡 한 번 하고 상대해야할 만큼 가공한 화력을 뿜어댄다. 1탄 보스 만날 때까지 컨트롤이 손에 익지 않았다면, 2탄 넘어가는 건 그냥 포기하는 게 좋다. 일반 적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탄환을 말 그대로 폭포수같이 쏟아붓는 것은 기본. 단순히 플레이어 방향으로 날아오는 게 아닌, 유도탄, 레이저형 탄환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슈팅 게임에 타고난 플레이어라면 한두 번 만에 클리어하겠지만, 재능이 없다면 어쩔 수 없다. 미칠듯한 재시작으로 그냥 보스의 패턴을 다 외워버리자.

▲ 이쯤 되면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슈팅 게임의 레벨 디자인은 대부분 총알과 연관된다. 과거 1945 시리즈가 유행할 땐 커다란 피탄 판정에 적의 탄환도 어느 정도 형태가 정해진 구조였다. 즉, 플레이어가 총알 날아오는 방향을 외워서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벌레공주'나 '동방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탄막' 계열이 슈팅 장르의 주류로 떠올랐는데, 이들은 말 그대로 눈이 저릴 만큼 화면 가득히 탄환을 뿌렸다. 대신 피탄 판정이 작아 순발력만 있다면, 정말 1mm 차이로 다 피하는 플레이도 가능했다.

'엔터 더 건전'의 슈팅 시스템은 위에서 언급한 두 장르의 특징을 모두 채용했다. 보스전 기준으로는 탄막 슈팅 못지 않게 위엄 넘치는 총알 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 어깨만 스쳐도 바로 체력이 깎일 만큼 자비 없는 피탄 판정은 덤이다. 즉, 이론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할만한 요소는 다 넣었다.

덕분에 단순 '이동'으로 총알을 피할 때 느껴지는 고단함은 앞서 언급한 게임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체력이나 쉴드 개념이 있어 한 대 맞는다고 바로 죽는 건 아니지만, 3층 이하부터는 절대 피할 수 없는 탄환들이 연달아 쏟아지기에 방심은 금물.

▲ 저한테 왜이러시는 건데요...


이런 육두문자가 솟구치는 상황을 헤쳐가려면 두 가지 요소를 잘 활용해야 한다. 일단 '구르기'부터.

어떤 클래스라도 무제한으로 구를 수 있고, 사용하는 동안은 적 총알에 무적이 된다. 즉, 총을 쏘는 것보다도 적의 총알을 어떻게 굴러 피하느냐에 따라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결정된다. 아슬아슬하게 죽더라도 '아, 저기에서 한 번 굴렀으면 살았을 텐데'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나온다.

굴러갈 곳에도 총알이 있어 더는 회피가 어려운 순간도 나오는데, 이럴 때는 '엄폐물'을 사용해야 한다. 게임 내 등장하는 탁자를 발로 차면 훌륭한 엄폐물이 된다. 내구도가 있어 무적은 아니지만, 한동안 숨을 고르고 다음 전술을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는 데는 충분하다.

구르기와 엄폐 시스템은 다른 슈팅 게임과 차별화를 두는 요소로, '엔터 더 건전' 특유의 레벨 디자인에 귀결된다. 한 번 죽으면 끝인 '로그라이크'에서 재도전 욕구를 끊임없이 부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 탁자만 잘 뒤집어도 절반은 간다.


■ "집중력이 차이를 만들었다."

그간 '참신한 게임'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건 아닌가 싶다. 신선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누구도 '엔터 더 건전'을 어디서 본 듯한 게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엔터 더 건전'의 게임플레이와 레벨 디자인은 지금까지 출시된 '로그라이크' 게임과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다. 완성도 높은 슈팅 시스템을 구현했지만, 이것도 전에 없던 사례라 말하긴 어렵다.

'엔터 더 건전'의 정체성은 하나의 콘셉트에 매진한 개발자들의 집중력에서 나왔다. 수많은 총기와 몬스터 디자인, 심지어 게임 내 던전 이름까지, 모두 '총'이라는 주제를 꿰고 있다.

현존하는 무기, 곧 나올 것 같은 무기, 그리고 나와봤자 별 도움 안 되는 무기들까지 가리지 않고 만들어 넣었다. '갈매기관총', '아모콘다(Ammoconda)', '뱀총녀(Gorgun)'와 같이 보스 이름도 하나하나 총 맞은 것처럼 지었다. 상인과 물건을 거래하는 데 사용하는 화폐 단위는 '탄피', 한 층 아래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거대한 총알 모양.

가히 십만 덕후의 창의력을 갈아 만든 결과물이다. 단순히 껍데기만 따라 하는 것이 아닌, 게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의 콘셉트로 뚝심 있게 밀어붙였을 때 어떤 작품이 나오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 게임플레이 방식을 다르게 만드는 것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개발사에게도 좋은 참고서가 아닐까.

개발사 '닷지 롤(Dodge Roll)'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다.

"던전 이름도 '총굴'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냐?"

▲ '엔터 더 건전' 3층 플레이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