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완성도 있는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 작가는 각고의 노력을 다한다. 이는 비단 소설이나 논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미술부터 음악,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시나리오는 물론, 신문 귀퉁이에 오르는 자그마한 사설을 작성하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게임계에 종사하는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작품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 빈번하게 찾아온다. 상업적인 이슈나, 사회적인 시선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물론, 하나의 완성된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함께 작업하기 때문이다.

NDC 행사의 마지막 날인 오늘(28일), '드래곤네스트'를 개발한 아이덴티티게임즈의 강지영 콘텐츠 팀장은 '여러 명의 작가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법'에 대한 강연을 진행했다. 강지영 팀장은 강연에 앞서 이번 강연이 '매력적인 시나리오 작성법'이나 '기본적 작법 이론'에 대한 내용이 아닌, 라이브 게임에서의 시나리오 제작 프로세스와 협업 노하우에 대한 강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아이덴티티게임즈 강지영 콘텐츠 팀장



드래곤네스트의 시나리오란?

강지영 팀장은 먼저 게임 내에 '시나리오'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게임 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나리오 표현법은 퀘스트 혹은 대사 텍스트를 이용하는 것이고, 이외에도 엔피시나 게임 내 시스템, 배경과 아이템을 통해서도 시나리오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게임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이러한 방법들이 '드래곤네스트'에서도 똑같이 사용됐지만, 유독 드래곤네스트의 시나리오가 유저들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드래곤네스트'가 고평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로 제시한 것은 모두 네 가지로, 신규 클래스가 추가될 때마다 더해지는 고유의 스토리가 있다는 점, '반전/떡밥' 요소의 존재,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여온 스토리와 이러한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잃지 않은 큰 흐름이 있다는 점이다.

▲ 드래곤네스트의 모든 캐릭터는 고유의 스토리라인을 갖는다.

보통 게임의 시나리오는 여러 클래스나 남녀 성별 차이, 종족의 변화가 있어도 하나의 큰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드래곤네스트에선 캐릭터가 추가되는 것과 동시에 고유의 스토리라인을 더하는 것은 물론, 기존의 캐릭터와의 연계도 고려하며 새로운 스토리를 계속 덧붙여나가는 작업이 진행됐다.

또한,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 복선인 '떡밥'과 '반전'이 계속해서 사용됐다. 유저는 이러한 요소들에 의해 '다음 이야기는 과연?'이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스토리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드래곤네스트에서는 7년간 계속됐고, 이 와중에도 메인 스토리의 큰 흐름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다.


라이브에서 시나리오의 제작 한계

▲ 흔한 시나리오 제작과정의 인사 변경.jpg

보통 게임 개발사에서 시나리오 담당은 한 명 혹은 두 명이 처음 그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채용과 퇴사가 반복되고, 사람은 점점 바뀌어 결국 처음 시나리오를 시작한 사람들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또한, 작업 멤버가 바뀜에 따라 작업 내용도 계속 바뀌고,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히 주요 설정 변경은 물론, 기존의 지역이나 캐릭터가 사라지는 등의 심각한 오류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크게 '설정오류'와 '문체의 변화', '외부 이슈의 간섭'이라는 3가지 원인을 통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먼저 설정오류는 다양한 작품에서 원작이라는 하나의 설정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에 자주 발생하는 문제로, 성별이 바뀌거나 전/후반의 파워밸런스가 크게 바뀌는 등으로 나타난다.

문체의 변화도 시나리오에는 큰 영향을 끼친다. 드래곤네스트의 경우 텍스트의 비중이 몹시 높은 편인데, 이러한 게임일수록 작중 문체 변화는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외부 이슈의 간섭도 무시할 순 없다. 게임 시나리오의 진행 과정에는 원래 계획과 다르게, 갑자기 들어오는 요구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이러한 외부 의견에 따라 극 중 진행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변화가 계속되면 시나리오는 원작과 충돌을 일으키고, 이야기는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 여러 문제에 계속해서 치이다보면…

▲ 시나리오는 산으로 가버린다.


하나의 이야기 만들기

강지영 팀장은 제대로 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시나리오 제작의 기본 프로세스를 설정과 제작으로 구분하여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설정은 세계관에 맞춘 컨텐츠를 구상하고 기획하는 업무이고, 제작은 설정된 내용을 데이터로 만들어 실제 게임 내에 적용하는 것과 버그 수정 및 사후 관리까지 모두 포함한 단계를 뜻한다.

▲ 상단의 녹음 대본까지의 작업이 설정, 테이블부터 QA는 제작에 해당한다.

1. 가장 처음에 시작하는 '컨셉 문서' 제작은 말 그대로 어떤 이야기를 할 건지, 어떤 배경이 될 건지, 어떤 캐릭터가 등장할지 설정하는 단계다.

2. 컨셉 문서가 완성됐다면 이번엔 개요 문서를 작성한다. 개요 문서는 큰 이야기를 작은 단위로 나누고, 그 이야기들의 흐름이 잘 이어지는지 확인하는 단계를 말한다.

3. 다음에 필요한 것이 대본 문서의 작성이다. 대본 문서는 대사 진행형 게임의 경우에 게임 내에서 보여지는 시나리오 대사를 작성한 문서이고, 녹음이 필요한 경우 '녹음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이때는 녹음 분량을 설정하고 성우들이 볼 수 있도록 정리된 문서를 준비해야 한다. 여기까지의 과정이 전체 프로세스의 설정 단계에 해당한다.

제작단계에는 게임 내에 들어가는 데이터인 테이블과 스크립트, 연출이 포함되고, 여기에 QA(Quality Assurance) 과정을 덧붙인 것이 바로 최소한의 프로세스로 진행한 시나리오 작업이다.

최소한의 프로세스로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한다면, QA 단계를 제외한 모든 작업을 혼자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QA에서 심각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고, 개발자는 그냥 작업을 진행하거나 어떻게든 수정하는 두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 문제가 벌어졌다면, 어떻게든 미리 수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마지막 단계에서 문제를 확인하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것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좀더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드래곤네스트'의 시나리오에서는 기본 프로세스의 설정 단계에 '초안 구상'과 '정리'를 추가하고, 모든 과정에 '협업'을 추가했다. 또한, 제작 단계에서는 QA 이전에 '파트 테스트' 과정을 통해 마지막 확인 절차를 더했다.

여기서 '초안 구상'이란 모든 프로세스를 이전에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으로, 초안 단계부터 활발한 논의를 통해 협업을 진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때 논리적 오류를 걸러내고 설정의 자연스러움을 검토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컨셉 문서'도 공유 과정을 통해 약간의 변화를 갖게 된다. 파트내에서 작업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컨셉 문서를 만들면 시나리오에 대한 내용도 계속 추가할 수 있고, 여기에 그래픽 적인 내용도 가미할 수 있게된다.

그 후 '개요 문서'의 작성이 진행된다. 이때도 본인 혼자만 확인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었던 개요 문서에서, 서식을 만들고 놓치는 항목을 줄이는 방식을 채택해 모든 작업자가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이후 주석을 추가해 좀 더 보기 쉽게 수정한 대본까지 작업했다면, '정리 단계'를 거칠 차례다. 정리 단계는 원래 없었던 작업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작업이다.

▲ 공유만 했다고 다가 아니다. 모든 과정에서 피드백은 필수!


▲ 이렇게 만들어진 '수정된 시나리오 제작 프로세스'.
모든 단계는 한 개씩 피드백을 거쳐 차근차근 진행해야 한다.

오류를 줄이기 위한 철저한 프로세스를 거쳤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바로 협업과 공유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의견 차이'다. 모든 작업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갈릴 수도 있고, '누가 죽었으면 좋겠다', '어떤 캐릭터가 대립했으면 좋겠다'와 같은 의견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심하면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서로의 사이가 좋다면 이러한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최대한 서로 존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시나리오의 메인 제작을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진행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시나리오 제작을 하게 되면, 새롭게 문서를 만드는 시간이나 동료의 작업물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추가적인 절차가 생기기 때문에 '공유 및 검토'의 시간을 처음부터 일정에 포함시키고 진행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해야 할 일이 배로 늘어나 시간도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면밀한 완성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마무리 작업에 필요한 시간이 크게 감소한다. 또한, 재작업을 진행할 필요도 없어지고, 결과적으로 전체 일정에는 큰 변화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프로세스 수정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결과들.

강지영 팀장은 '기획은 기획만 한다고 끝이 아닌, 대화와 협동을 통해 함께 해야한다'고 말한다. 개인의 의지로 밀고 나가기보다 내부 프로세스 작업을 거쳐 함께 공유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빠르게 바뀌는 요즘 시장에 어울리지 않는 '방망이 깎는 노인'과 같은 일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빠른 것이 대세인 모바일 게임 시장에도 '드래곤네스트'에서 얻은 노하우를 활용한 완성도 있는 모바일 게임이 나타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