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바타라고 하면 온라인의 채팅 프로그램이나 게임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아바타라고 하는 말의 원어는 요즘 부르는 뜻과는 상당히 다르다. 원어 아바타는 본래 고대 인도의 언어로서, 요즘처럼 채팅창이나 온라인 게임에서 치장하고 키우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아바타가 왜, 어째서 온라인에 퍼져가지고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신의 화신들이 돌아다닐까? 그 원인은 바로 PC게임 울티마 IV- 아바타의 모험, 최초로 아바타라는 단어를 게임에 사용한 이 전설적인 게임에 있다. 울티마 IV에서의 아바타란 8가지 미덕(정직,동정,용기,희생,명예,숭고,정의,겸손)을 완성한 하나의 상징적인 아이콘으로서, 세계의 위기로부터 브리타니아를 수호하는 '수호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울티마의 아바타 일행. 이 울티마는 몇편 째의 울티마일까?



따라서 최초의 온라인 아바타는 유저처럼 오프라인의 세계에서 온라인의 세계로 소환당한 이방인 로드 브리티쉬로서, 그는 8가지 미덕의 본질을 완성하여 수호하면서 질서의 수호자라는 의미에서 '아바타'가 된 자이다. 여기서 울티마의 로드 브리티쉬는 최초로 브리타니아에 온 이방인으로서 개인용 PC버전의 울티마에서는 유저들을 브리타니아로 불러들여 세계를 구하려 한 NPC였다.


무수한 유저들이 무수한 방법으로 그를 죽이고 아이템을 빼앗으려 도전했으나 모두 처절히 격파당했고,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결국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저렇게 세면 브리타니아 따위는 자기가 직접 구할 것이지...)


결국 그를 죽이는데 성공하는 알려진 방법이란 오직 한가지. 파괴력 하나만 보면 그야말로 모든 시리즈를 통틀어 최강이지만 한번 사용하면 망가져버려서 두번은 사용할 수 없는 '유리단검'이라는 아이템을 사용해서 잠들어있던 로드 브리티쉬를 찌르는 방법 뿐이었던 것이다.(그나마도 다가가는데 운빨이 필요했고, 거기에 더하여 유리단검 크리가 터져야 가능했다)


어차피 당시의 울티마는 MMORPG가 아닌 개인용 버전이었으니 로드 브리티쉬를 죽이던 자기가 죽던, 메인보드에 달걀을 구워먹건 모니터에 헤딩을 하건 그야말로 PC주인이 알아서 할 문제였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1997년. 울티마 온라인이 나타나면서 이제 게임은 개인의 컴퓨터를 벗어나 저 높은 온라인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고 로드 브리티쉬는 울티마 온라인의 시스템에서는 죽을 수 없는 초강력 먼치킨 NPC로서 브리타니아를 활보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이 터졌다. 사라예보를 방문했던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하고 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던 것만큼이나 게임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파괴력이 지대했던 엄청난 암살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파리의 알마 터널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던 그 해, 울티마 온라인의 베타 테스트 기간이던 1997년 8월 9일. 울티마 시리즈마다 등장하던 로드 브리티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여, 유저들에게 힐과 부활의 서비스를 담당하는 NPC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Rainz, The Man Who Killed Lord British
레인즈, 로드 브리티쉬를 살해한 사나이



주변에는 무수한 유저들이 몰려들어 힐링 서비스와 부활 서비스를 갈구하고 있었고, 손가락만이라도 로드 브리티쉬의 옷자락에 닿아보려고 안간힘을 써서 클릭질하던 상황이었다. 물론 로드 브리티쉬 캐릭터의 모델이었던 리처드 게리엇, 그 유명한 울티마의 아버지 역시 그 상황을 빠짐없이 모니터링 중이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슥 나타난 레인즈(Rainz)라는 유저가 마법 파이어 필드를 사용하여 로드 브리티쉬를 암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리차드 게리엇이 자신의 아바타가 살해당했음에 그만 노발대발한 것. 로드 브리티쉬의 본신이자 NPC의 유저(?)께서는 친히 강림하시어, 막강한 몬스터 데몬을 클릭 무한연타로 소환, 족히 수십마리를 끄집어내서는 세계를 구해야 할 브리타니아의 수호자들, 즉 서버의 테스터들을 그야말로 '아작'을 내어 버렸다. 게다가 세계적인 암살범 "레인즈"는 버그 악용의 죄목을 덮어쓴 채 계정 블럭을 먹고는 브리타니아(울티마 온라인의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로드 브리티쉬가 아작내 놓은 필드. 데몬만 돌아다니고 있다
출처 추억의 스샷: 로드 브리티쉬 살해 사건-작성자 써머



뭐...리처드 게리엇이 로드 브리티쉬를 죽이는 방법은 버그 뿐이라고 만들어놓은 데다가 리포트의 의무를 지고 있는 테스터들이 버그 리포팅 베타테스트 기간에 버그를 리포팅하지 않고 사용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은 어떻게든 이해한다 치더라도, 아무 생각없이 힐과 부활을 갈구하던 테스터들을 친절하게 산산조각으로 박살내 놓으신 것은 어떻게든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일정 시일이 지난 후, 이 사건은 게임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베스트 5에 당당히 랭크를 올렸다. 이것이 '로드 브리티쉬 암살사건'의 전말이다.


물론 요즘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게시판은 들끓고 당장 열화가 뻗친 베타 테스터들의 반격으로 인하여 게임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었을 지 모를 일이었지만, 당시 울티마 온라인에서 로드 브리티쉬가 구가하던 인기와 아직 여물지 못한 온라인 게임의 문화, 그리고 실상 울티마 온라인을 제외하면 즐길만 한 다른 게임이 없었던, 한마디로 게임마니아라 불리던 절대 다수의 게임 프롤레타리아들이 처해있던 극한 상황에서 그야말로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던 개발자, 로드 브리티쉬의 승리로 끝났던 사건이다.



머리가 벗겨지기 전의 로드 브리티쉬의 모습.
리처드 게리엇에게는 저렇게 미끈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한갓 게임 크리에이터의 아바타에 불과했던 NPC가 죽었는데 멀쩡한 정신의 게임 개발자가 펄펄 뛰면서 자기가 만든 게임을 테스트해 주기 위해 몰려들었던 유저들을 요절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로드 브리티쉬라는 캐릭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울티마 시리즈의 로드 브리티쉬라는 NPC는 게임 크리에이터인 리처드 게리엇이 직접 제작한 NPC이다. 개발자 리처드 게리엇은 로드 브리티쉬를 자신의 아바타로 삼아 게임 내에 출몰하였는데, 아무도 그를 상대로 삼초를 버틸 수 없었던,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초절정고수 NPC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기실 이 로드 브리티쉬라는 캐릭터는 울티마의 세계인 브리타니아의 통치자로서, 브리타니아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유저를 브리타니아로 소환하여 세계를 구할 임무를 주는 역할을 하는, 말 그대로 람보 뒤의 대령 정도 되는 역할의 캐릭터이다.


로드 브리티쉬의 상징은 실버 서펜트, 즉 은뱀문장이었는데, 이는 로드 브리티쉬의 원 모델인 리처드 게리엇이 어릴 적부터 만들어 사용하던 문장이었다. 리처드 게리엇은 울티마를 제작하던 오리진 사를 떠날 무렵 이 로드 브리티쉬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직접 챙겨 떠났는데, 게임 내에서의 로드 브리티쉬는 실버 서펜트로 기억되는 브리타니아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고 실버 서펜트 문장의 소유자 리처드 게리엇은 브리타니아를 만든 크리에이터, 즉 창조자로서 브리타니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즉 로드 브리티쉬를 챙김으로서 리처드 게리엇은 울티마 전체를 챙겨 떠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잊을 수 없는 추억 속의 그 문장. 실버 서펜트



대충 여기까지가 울티마에 구현되어 있는 로드 브리티쉬의 발자취이다. 리처드 게리엇, 로드 브리티쉬의 유저, 울티마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이 자, 과연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북미의 포럼을 찾아보면 성당기사단의 후예라는 설에서 프리메이슨 결사단의 당대 마스터라는 설까지 있고 심지어 흡혈귀나 화성인이라는 설도 있긴 하다. 물론 여기서 화성인의 발자취를 찾으려면 끝도 없으니 그건 일단 논외로 치고, 자 그럼 지구인이자 게임 개발자인 리처드 게리엇이라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알아보아야 오늘의 주제인 로드 브리티쉬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리처드 게리엇은 1961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국적이 브리튼인지 미합중국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왔고 짙은 영국식 영어를 써서 또래 친구들을 당혹시켰다 한다. 당시도 지금과 마찬가지지만, 미국식 영어는 정통 영국식 영어와는 달리 마치 혀짧은 사람이 버벅거리는 것처럼 T 발음을 L 발음처럼 굴려버리는 어눌하기 짝이 없는 팔푼이 영어(뷰티플 → 뷰러펄, 셧업 → 샤랍...등등)였는데 리처드 게리엇은 그야말로 발음 딱딱 끊어져서 귀머거리도 알아들을 정도로 정확한 영어발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듣도보도 못한 해괴한, 하지만 지독하리만큼 귀에 잘 들리는 본토발음에 질려버린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향후 게임계를 좌지우지할 전설적인 캐릭터 로드 브리티쉬(Lord British)였던 것이다. 물론 지독하리만큼 잔뜩 비꼬아대던 양키식 유머의 산물이었지만 이 리처드 게리엇이라는 황당한 꼬마는 이게 무척 마음에 들었던지 당장 그에 대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집에 가서 실버 서펜트의 문장을 만들어 버렸다. 문장과 캐릭터가 나왔으니, 울티마의 지배자 로드 브리티쉬와 브리타니아는 여기서 잉태되었다고 해도 억지는 아닌 셈이다.


1977년, 리처드 게리엇은 몇몇 일당들을 규합하여 고등학교에서 자신들만의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스스로 정했던 프로젝트는 판타지 컴퓨터 게임을 만드는 것. 1979년 리차드는 컴퓨터랜드라는 애플 홈컴퓨터를 파는 상점에 일자리를 찾았다. 그는 상점에서 컴퓨터를 팔면서 남는 시간을 애플 컴퓨터에 대한 공부에 쏟았고,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애플 소프트의 베이직을 사용한 아칼라베스(Akalabeth)라는 게임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1년 후, 텍사스 대학의 창조적 무정부주의(Creative Anachronism)이라는 클럽에서 리차드 게리엇은 후에 게임 제작에 함께 할 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리처드 게리엇이 19세 되던 여름 1980년, CPC에서 로드 브리티쉬와 함께 울티마 1이 태어났다.



아직도 이걸 즐기는 사람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정확히 로드 브리티쉬가 일천구백 몇 년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리처드 게리엇만이 대답해 줄 수 있을 뿐인, 창조적인 발상을 간직하고 있던 꼬마 시절의 리처드 게리엇에게서 태어난 정신적 피조물일 테니까. 로드 브리티쉬는 리처드 게리엇과 함께 40년 가까이 고락을 함께 한, 천재적인 크리에이터의 정신적 산물이자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울티마를 즐겨본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은 리처드 게리엇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하지만 울티마를 한번이라도 즐겨본 사람이라면 로드 브리티쉬를 모를 수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로드 브리티쉬는 리처드 게리엇에게 그로서는 얻을 수 없었던 명예와 영광을 주었고, 리처드 게리엇은 오리진 사를 퇴사할 때 그를 울티마에서 빼 옴으로서 그를 버리지 않은 셈이다. 둘은 이제 창작자와 피조물이라는 관계를 넘어, 상부상조하고 동고동락하는 관계가 되었다. 후에 리처드 게리엇이 NC의 미국 지사장인 형 로버트 게리엇을 따라 NC에 입사하여 타뷸라라사를 만들었을 때 나타난 제네럴 브리티쉬가 바로 이 로드 브리티쉬의 버전업 판이라고 할 수 있다.



로드 브리티쉬라는 캐릭터는 일본 슈팅게임 샐러맨더에서 전투기가 되기도 했다



로드 브리티쉬는 리처드 게리엇의 분신, 진정한 의미에서 온라인에 강림한 그의 아바타라고 부를 수 있다. 말 그대로,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로드 브리티쉬야말로 최초의 아바타, 리처드 게리엇의 충실한 화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생각할 때, 기자는 아직 두번째 아바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존재를 보지 못했다. 최초의 아바타가 온라인에 강림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아바타의 개념은 상당히 엷어지고 넓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온라인에 강림한 인간의 화신, 게임 속에서 만드는 각자의 캐릭터가 가지는 수명은 유저가 게임을 끝낼 때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면, 우리는 우리의 아바타가 심지어는 현금을 받고 팔려다니는 노예 신세가 되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노예 취급을 당하는 우리의 캐릭터와, 40년이 넘는 시간 속을 흐르듯 살아가는 로드 브리티쉬.
과연 그의 아바타와 우리의 아바타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 정도면 온라인 유저들의 말로 '상당히 중증'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Inven 대남 - 남중훈 기자
(dainam@inv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