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라는 말은 e스포츠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승리하려면 최신 메타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년 히어로즈 글로벌 챔피언십에서는 전 세계 팀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한국팀이 2016 시즌을 제패했기에 한국 스타일을 따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영웅과 전략을 활용하는 시도 역시 냉혹한 결과 앞에 묻히고 말았다. '메타'라는 잣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도 그럴 것이 작년부터 HGC KR까지 L5가 상대의 특별한 전략에 완벽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강 L5의 틀을 끝까지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평소 국내 리그에서 볼 수 없었던 크로미-레이너를 뽑아 L5 맞섰지만 0:3으로 완패했고, 작년 히어로즈 슈퍼리그 결승에서도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알라라크로 역전패를 당하며 L5에게 왕좌를 내줬던 MVP 블랙이 그 주인공이다. 이번 이스턴 클래시 결승전에서도 머키를 활용하는 과감한 수를 던지며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머키 카드로 대변되는 그들의 자신감은 이스턴 클래시의 결과로 이어졌다. MVP 블랙은 오랫동안 '벽'처럼 느꼈던 L5를 3:1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새로운 팀원, 포지션 변경이라는 복잡한 리빌딩 과정을 거치면서도 고유의 색깔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새로운 영웅뿐만 아니라 잦은 너프로 버려진 영웅까지 수많은 경우의 수를 모두 준비해왔다. 노력의 결과, 약 1년 동안 오르지 못한 우승자의 자리를 긴 겨울이 지나 다시 한번 차지하게 됐다. 팀원 모두의 노력이 빛났기에 이뤄낼 수 있었던 그 어느 때보다 값진 우승이었다.


MVP 블랙은 작년까지 전략의 핵이었던 '리치' 이재원이 팀을 나가면서 달라져야 했다. 지원자가 없는 근접 딜러-서브 탱커 역할을 누군가 해야 했고, 올라운더였던 '교차' 정원호가 맡게 되었다. 뛰어난 피지컬과 캐리력을 보유한 다른 팀의 서브 탱커들 사이에서 빛을 보기는 더욱 힘들었다. '사케' 이중혁 역시 히어로즈를 시작할 때부터 해왔던 메인 딜러 자리를 새롭게 합류한 '리셋' 임진우에게 양보했다. '교차-사케' 모두 팀의 승리를 위해 새로운 포지션에서 도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HGC까지만 하더라도 두 선수의 영웅 폭이나 숙련도는 아쉬웠다. '교차'는 L5전에서 데하카-제라툴 카드가 사라지는 순간 제 기량을 못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케'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 원거리 딜러 기반인 폴스타트와 해머 상사로 활약했을 뿐 나머지 역할은 미지수였다. 하지만 이스턴 클래시에서 '사케'는 라그나로스, 태사다르 등 다양한 모습을 소화해냈다. 완벽한 활용으로 MVP까지 놓치지 않았다. '교차' 역시 상대 근접 딜러에게 밀리지 않는 암살-교전 능력을 보여줬기에 MVP 블랙이 정상에 설 수 있었다.

'교차'가 주로 담당하는 MVP 블랙의 밴픽은 이스턴 클래시 진행 중에도 꾸준히 발전했다. MVP 블랙은 e스타가 보여준 매서운 티리엘을 밴픽으로 가까스로 막고 힘겹게 승리했다. 티리엘 중심의 밴픽은 결승전 전까지 다른 팀 간 대결에서도 핵심처럼 보였다. 하지만 MVP 블랙은 결승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L5에게 티리엘-발라와 같은 1티어 영웅을 내주고 자신들만의 대처법으로 파훼법을 완성한 것이다. 4강에서 e스타-L5에게 승리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승에 도달할 수 있었다.


새롭게 합류한 '리셋' 임진우와 'Ttsst' 강운성 역시 이번 시즌 새롭게 합류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MVP 블랙 속으로 들어왔다. 주장인 '사케'를 대신 메인 딜러를 맡은 '리셋'. 오랫동안 '세체탱'으로 불렸던 '사인' 윤지훈의 빈자리를 대신해 들어온 'Ttsst' 강운성. 부담스러운 자리에서도 그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리빌딩하면서 포지션을 정하는 자리에서 '리셋'은 원거리 딜러로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팀원들에게 말한 말을 지킨 것일까. 이번 이스턴 클래시에서 확실히 눈부신 활약이 이어졌다. 리밍을 잡았을 때 정확한 기술 활용으로 어마어마한 딜을 뿜어내는가 하면 너프로 활용되지 않고 있는 타이커스로 극한의 생존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굳이 1티어 딜러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주어진 밴픽 구도에서 최선의 역할을 해냈다.

'Ttsst' 역시 MVP 미라클 시절과 확실히 달라졌다. 아쉽게 끊기는 장면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이스턴 클래시에서 그런 장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안정감을 갖췄다. L5 전력의 핵심인 '노블레스' 채도준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팀원들과 함께 미리 움직이며 '노블레스'를 말리게 했던 전 세계 유일한 탱커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이스턴 클래시의 백미는 역시 '메리데이' 이태준이였다. 지원가지만 상대 팀의 어그로를 끌고 딜을 넣는 역할을 해서 '캐리데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원가 본연의 역할은 눈에 쉽게 눈에 띄지 않기에 비슷한 역할을 해내는 다른 지원가들과 크게 차이를 실감하기 힘들었다. 그의 카라짐 주먹은 강력했지만, 딜량이 암살자 영웅들보다 높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결승전에서 그가 왜 '캐리데이'인지 신 영웅인 루시우와 구 영웅의 대표주자인 우서로 제대로 보여줬다. 리그에 첫선을 보이는 루시우에 대한 평가는 애매했다. 1티어인지 확실하지 않고, 특정 맵과 조건에서 좋다는 말이 지배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메리데이가 잡은 루시우는 조건을 지워버리고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린 1티어 영웅이었다.

빠른 발로 탱커들이 주로 하는 정찰 및 시야를 확보 역할까지 했다. 미리 자리를 잡으려는 L5의 움직임을 완벽히 봉쇄하고 도망치는 '노블레스' 무라딘의 도주기마저 깔끔하게 끊어버렸다. 위기에 빠진 아군에게 이동 속도 버프를 줘 아슬아슬하게 도망가게 해주는 장면이 이어졌다. 상대 역시 예상 밖의 도주에 과감한 공격이 무리한 시도로 바꿔버리는 묘한 양상이 전개됐다.

▲ 맞춰보시지! 현란한 '메리데이' 루시우 움직임

모두에게 잊힌 우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밴픽적으로 지원가를 신경 써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오랫동안 '메리데이'와 함께해온 우서가 등장했다. 부족한 지속 힐량과 애매한 궁극기라는 평가에 사라졌던 그가 '메리데이'와 함께 모두를 놀라게 했다. 천상의 보호막은 먼저 들어가는 영웅에게 걸어주는 역할이었지만, 이번 만큼은 아끼고 또 아낀 최종 무기였다. 정확한 타겟팅이 장점인 L5가 천상의 보호막이 남아있어서 어떤 영웅을 공격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짧지만 확실하다는 천상의 보호막의 유일한 장점을 살려낸 플레이였다.

'메리데이'는 레가르-우서만 등장하던 시절, 지원가 영웅의 수가 너무 부족하다는 인터뷰를 남긴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 이스턴 클래시를 통해 그 말에 공감할 수 있게 됐다. 남들이 잘 쓰지 않는 영웅이건 새로운 영웅이건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최고의 능력치를 보여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준비하는 것은 그만큼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메리데이'와 MVP 블랙은 이를 해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놀랄 만한 카드를 들고 올지 기대를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보여줄 새로운 메타와 영웅의 진짜 모습을.